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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반공 정치'의 한복판에서 비틀거리다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39] <동맥(冬麥)>

등록|2013.07.02 11:31 수정|2013.07.02 11:31
내 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내 몸은 아파서
태양에 비틀거린다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광선(光線)의 미립자(微粒子)와 분말(粉末이 너무도 시들하다
(압박해주고 싶다)
뒤집어진 세상의 저쪽에서는
나는 비틀거리지도 않고 타락도 안했으리라

그러나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시퍼런
작열의 의미가 밝혀지기까지는
나는 여기에 있겠다

햇빛에는 겨울보리에 싹이 트고
강아지는 낑낑거리고
골짜기들은 평화롭지 않으냐―
평화를 의지를 말하고 있지 않으냐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 사이에서
(1958)

김수영 선생님, 시 <동맥>을 보고 있습니다. '동맥(冬麥)'은 '겨울 보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리는 된서리 차가운 늦가을에 싹을 틔워 한겨울 내내 그 푸름을 자랑하지요. 그래서 신산(辛酸)스러운 겨울 풍경 속에 서 있는 보리를 본 이들은 잘 압니다. 그 겨울 보리가 지금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 그렇기에 그 차가운 동토(凍土)가 보리에게는 차라리 얼마나 따뜻한 어머니의 품이 되고 있는지를….

선생님의 전집에서는 이 시가 1958년의 마지막 작품으로 실려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1958년은 제1공화국이 이승만 독재 정권의 극악한 '반공 정치'로 얼룩진 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해 10월에 진보당의 조봉암 선생이 사형 판결을 받은 일과, 성탄 전야인 12월 24일에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날치기로 통과된 일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지요.

조봉암 선생님이 누구입니까.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조봉암 선생님은 이승만이 직접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시켰을 정도로 그 능력이 탁월한 분이지 않았는지요. 그 덕분에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된 토지 개혁이 나오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수천 년 간 농민들을 옥죄어 온 소작제를 철폐한 것도 조 선생님의 공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조 선생님은, 권력욕에 눈이 먼 이승만과는 격이 다른 분이셨습니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국회부의장이던 조 선생님은 국가 서류를 한 장이라도 더 챙길 요량으로 국회에 남아 고군분투하는 바람에 가족을 챙기지 못한 분이셨지요. 부인인 김조이 여사가 납북된 사정도 여기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그는 라디오 연설로 온 국민을 현혹해 놓고는 한강을 건너 몰래 도주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조봉암 선생은 그 엄혹한 시절에 '진보'라는 말을 최초로 쓴 정치인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선생님께서도 당시 신문을 통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대회에서 나온 개회사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 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 다 같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후 조봉암 선생님은 1958년 1월 국가 변란 혐의로 체포된 후 간첩 혐의로 기소됩니다. 이후 공판 진행은 철저하게 정치 논리에 따라 진행됩니다. 사건의 빌미가 된 간첩 양명산이 2심 재판에서 "고문에 못 이겨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았다"며 애초 진술을 번복했음에도 사법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조봉암 선생님에 대한 사형 판결은, 이후 1959년 2월에 대법원에서 확정됩니다. 1958년 7월 30일, 대법원은 들끓는 여론 속에서도 변호인단의 재심 청구를 기각하고, 바로 그 다음 날인 7월 31일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합니다. 체포에서 사형 집행까지 1년 6개월이 걸린 이 사건을 우리 역사는 '사법 살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봉암 선생님의 죽음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이 톡톡한 구실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2·4 보안법 파동'으로 알려진 사건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승만이, 전국에서 선발한 무술 경관 300여 명을 국회에 투입하여 의사당 안에서 농성 중인 민주당 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뒤 자유당 의원 128명만으로 보안법 개정안을 표결 처리하여 128대 0으로 통과시킨 사건입니다.

이렇게 개정된 보안법은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틀어막는 데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17조 5항인 '인심혹란죄'라는 해괴한 죄명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지요.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라는 사설과 칼럼 '여적' 등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심기를 건드려 1959년에 폐간된 경향신문이 그 첫 번째 희생물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내 몸은 아파서 / 태양에 비틀거린다"(1연)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신 저간의 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뒤집어진 세상"(2연 5행)에서 왜 선생님께서는 '비틀거리'(2연 6행)고 '타락'(2연 6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도 말입니다.

1950년 당시 정부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부역자 수가 55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여기서 한국전쟁 후에 부역자로 몰려 고초를 겪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낼 필요는 없겠지요. 인민군에게 끌려가 온간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다시 포로 수용소에 갇혀 처참한 시간을 보낸 후 석방된 선생님께는 그 부역자들의 일이 남일로만 다가오지는 않으셨을 테지요. 그래도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인민군 노래도 못 부르고 정부 욕도 못 한다면, 그럼 유형(수영의 지인인 시인 유정을 말함)은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게요. 불쌍한 문인들의 흉이나 보라는 게요. 유형의 시가 예술지상주의적인 건 순전히 그 조심조심 때문이에요. (<김수영 평전>, 261쪽)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려 말 못할 고초를 겪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분에 겨웠을까요. 서슬 퍼런 보안법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틀어막는 세상 아니었습니까. 그런 세상에서, 비록 술자리에서나마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요. 의용군으로 끌려가 배운 인민군 노래로 자신의 분함을 토해낼 수 있었던 이가 또 있었을까요.

그런 반골 기질이 있었기에 선생님께서는 '겨울 보리'를 보면서 스스로 '믿는 것'(2연 1, 2행)을 말씀하셨겠지요.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시퍼런 작열의 의미가 밝혀지기까지는"(3연 1, 2행) 그 '비틀거리'는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한 것이겠지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선생님께서는, 햇빛에 싹이 트는 '겨울 보리'와 마당에서 뛰어노는 어린 강아지, 그리고 평화로운 산골짜기의 풍경까지도 그저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사실 어찌 보면 그렇게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내는 일 말고 선생님께서 달리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의 입과 눈과 귀가 봉쇄된 그 시절에 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살아가던 그 시절을 저는 감히 온전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니, 두려워서 떠올리는 일조차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세월이 훌쩍 흘러 2013년이 되었는데도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악머구리 끓듯 하는 정치 현실을 보면서 많은 이가 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희망을 키워야 할 2013년의 '겨울 보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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