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산 고지서 한밤중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18) #5. 다부동전투 ④
한국전쟁 정전 60주년기념일에 부치는 군말 |
2013년 7월 27일, 오늘은 한국전쟁 정전 60주년기념일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에 여기 머리글란을 만들어 군말을 부친다. 내가 이 시점에서 이 작품을 쓰는 것은 한 힘없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남과 북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냉정한 눈으로 한국전쟁의 참 모습을 그려보고자 하는 데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많은 발품을 들였다. 현재까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곳은 거의 내 발로 둘러보았고, 앞으로 전개될 곳도 거의 다 둘러보았다. 심지어 DMZ는 물론 평양과 금강산, 묘향산도. 나는 그동안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의 문헌을 샅샅이 살펴보았고, 지금도 10여 권의 참고도서를 보며 이 작품을 집필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 시의 맥아더기념관 등도 두세 차례 방문하여 70여 일 동안 사진자료 수십 만 장을 일일이 검색한 뒤 그 가운데 일부를 수집해 왔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본 한국전쟁의 실제 상황(피난생활과 1950년 8월 16일의 융단폭격 등)에 대한 기억과 친지 및 동네 어른들에게 들은 증언, 그리고 젊은 시절, 대한민국 육군 보병장교(ROTC)로 최전방에서 보병소총소대장으로 2년 남짓 근무하면서 배우고, 보고 듣고, 느낀 바도 이 작품 속에 자연히 녹아들었다. 내가 유독 이 작품에 전심전력을 다한 것은 다음 세대에게 한국전쟁의 진실을 일부나마 바로 전하고자 하는 한 작가의, 한 퇴역 교육자의 양심 때문이다. 이 혼돈의 시대는 진실과 바른 양심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겨레 간 화해와 용서, 그리고 그 언젠가 다가올 조국통일의 거름이 될 것이다. 오늘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60년 전에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정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애꿎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이름없는 백성들과 피아 장병들, 그리고 이국의 하늘 아래 포연 속에서 죽어간 참전국(중국군 포함) 모든 전사자들의 명복을 빈다. 앞으로 이 연재가 끝날 때까지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을 기대하면서... - 기자말 ▲ 정전협정 조인식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동편 출입문으로 유엔군 측 해리슨 수석대표(유엔기 왼쪽)가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서편 출입문으로 북한 측 남일 수석대표(인공기 오른쪽)가 들어섰다. 두 대표는 책상 위에 놓인 18 통의 정전협정문서에 일일이 서명했다. 마침내 10시 12분, 그 서명작업이 끝났다. 두 대표는 악수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조인식장을 냉랭하게 퇴장했다. 그날 이후 60년이 지난 아직도 그 냉랭한 기운이 한반도 전역을 감싸고 있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세계전쟁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이다. ⓒ NARA |
야간 돌격조
다부동전선에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폭탄과 포탄에,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간이병동조차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전선도 뒤죽박죽이었다. 다부동전투가 길어지고 병력 손실이 많아지자 병사들의 병과와 주특기 분류는 의미가 없어졌다.
전선에서 총알, 수류탄, 폭탄과 포탄은 앞에서만 날아오는 게 아니라, 뒤에서도, 옆에서도, 머리 위에서도 날아왔다. 인민군 모든 전사들은 옥쇄작전으로 주특기 구분 없이 모두 총과 칼, 그리고 수류탄을 들었다. 마침내 김준기 위생병도 보병 야간 돌격조에 차출되어 총칼을 들고 나섰다.
▲ 전선 고지의 참호와 교통호 ⓒ NARA
1950년 8월 27일은 음력 7월 14일로 초저녁부터 달빛이 밝았다. 하지만 이날 자정을 넘기자 유학산 일대는 갑자기 짙은 안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 야전 지휘부는 며칠 전에 혈투로 점령한 유학산 839고지를 엊그제 빼앗긴 뒤 호시탐탐 재탈환의 반격시간을 노리던 중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갑자기 안개가 짙어지자 이를 인민군 야전 지휘부는 하늘이 내린 호기로 판단했다. 야간전투에 능수능란한 그들은 28일 새벽 2시 30분, 고지탈환을 위한 돌격명령을 전 전사들에게 내렸다.
그날 새벽 전투는 얼마나 치열했던지 전사들은 기본 휴대 실탄도, 수류탄도, 모두 다 떨어졌다. 유학산 839 고지를 지키던 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유학산 정상 일대는 양측 병사들이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뒤엉켰다.
이럴 때는 암구호를 묻고 대검으로 상대를 찌르면 늦었다. 양측 병사들은 뒤엉킨 채 서로 머리를 만져보아 머리털이 손에 잡히면 국군으로, 민둥머리면 인민군으로 식별했다. 그리고는 적군이면 즉각 대검으로 상대 복부나 가슴을 찌르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곧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처절한 원시전이 펼쳐졌다.
김준기는 한 국군 신병과 뒤엉켜 육박전을 벌였다. 김준기가 먼저 국군의 가슴을 대검으로 찔렀다. 그러자 또 다른 국군 병사가 대검으로 김준기의 배를 찌른 뒤 벼랑으로 밀었다. 김준기는 '으악!' 비명을 지르며 곧장 절벽에서 떨어졌다.
봉합수술
"김 동무, 김 동무…."
희미한 의식 속에 누군가 자기를 불렀다. 분명 최순희 위생병 목소리였다. 준기는 그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천연적으로 위장이 잘된 은폐 엄폐된, 어둑한 동굴 속이었다. 준기가 돌격조로 차출된 뒤 새로 찾아 이동한 천연 야전병동이었다. 가마니를 깐 동굴 바닥에는 붕대를 감은 10여 명의 부상병들이 누워 있었다.
"어드러케(어떻게) 요기를…."
"오늘 아침 수색조가 절벽 아래 칡덩굴 위에 쓰러져있는 동무를 업고 왔어요. 높다란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이처럼 살아난 것은 기적이에요. 더욱이 대검에 배를 찔리고도. 그 칡덩굴이 김 동무를 살렸어요. 아마도 그 시간에 누군가 정화수 떠놓고 김 동무를 위해 빈 탓일 겁니다."
"우리 오마니가 기랬나 봅네다. 내레 새벽에 벼랑으로 밀린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다음은 영 기억이 없구만요."
"아무쪼록 살아 돌아가세요."
"고맙습네다. 우리 오마니는 날마다 내레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기다릴 겝네다."
"그러실 테지요."
"최 동무! 제발 날 살레주시라요."
"내가 무슨 힘이 있나요."
"내레 잘 압네다. 최 동무의 상처 꿰매는 봉합술 솜씨를…."
"글쎄, 두고 봅시다."
순희는 준기의 상처와 밖으로 쏟아져 나온 창자를 깨끗이 소독한 뒤 도로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뒤 수술용 바늘과 실로 준기의 복부를 정성껏 꿰맸다. 마취 없이 복부를 꿰매는 수술이라 준기는 바늘이 살갗에 들어갈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최순희 위생병 전사는 이미 수술 전 수건으로 준기의 입을 틀어막았고, 팔과 다리를 묶었지만 준기는 워낙 고통이 심한 탓에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옆자리 윤성오 상등병이 일어나 준기의 상체를 잡았다.
"김 동무, 참으시오. 그래야 삽네다."
순희는 재빠르게 준기의 찢어진 뱃가죽을한 땀 한 땀 꿰맸다. 준기의 비명이 커지며 몸을 뒤척이려 하자 옆의 또 다른 부상자가 달려들어 하체를 껴안았다. 곧 준기는 생살을 꿰매는 아픔에 지쳐 그만 의식을 잃었다.
▲ 투항 권유 삐라 ⓒ NARA
투항 권유 삐라
낙동강전선의 전세는 날이 갈수록 유엔군 측으로 기울었다. 유엔군은 개전 이래 제공권을 확실히 쥐고 있는데다가 1950년 8월 초순 이후 각종 야포의 화력도 점차 인민군을 크게 앞질렀다. 개전 초 유엔군 측에 한 대도 없었던 탱크도 부산항에 속속 도착하여 그새 인민군의 네댓 배 넘게 각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러자 그동안 무소불위로 전선을 마구 누비며 활개 쳤던 인민군 T-34 탱크는 그만 그 위력을 잃었다. 게다가 미 전투기와 새로 유엔군 측 병사들에게 지급된 3.5인치 대전차 로켓포에 인민군 탱크는 솔개 앞 병아리 꼴로 맥을 못 췄다.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은 무엇보다 병참선이 끊어진 게 전세가 기울어진 결정타였다. 인민군은 병력이나 장비, 그리고 식량, 피복 등, 모든 보급이 미군기의 공습으로 극심한 동맥 경화증에 걸렸다. 그러자 전선의 인민군들은 병력과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전투에서 병참선은 생명선이나 다름이 없었다. 굶주린 병사가 어찌 용감하게 싸우겠는가.
게다가 전선의 인민군 전사들은 미 공군 쌕쌕이소리에, 대포소리에 주눅이 들고 사기마저 떨어졌다. 날마다 미 정찰기에서 뿌려대는 투항 권유 삐라도 그들 사기 저하에 한몫을 했다. 미군 비행기에서 뿌린 각종 삐라들은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을 하얗게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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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보장증명서 북한군 장병에게. 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
"인민군들은 이미 모두가 포위되었다."
"이미 연합군포로수용소에 있는 그대의 전우들은 잘 먹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또 그들은 재빠른 치료를 받고 있다."
"일만 명 그대들의 전우가 이미 연합군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좋은 음식과 치료를 받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이 끝나면 그들을 곧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성명하였다."
이런 삐라와 이미 투항한 인민군 병사들의 투항 권고문은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전사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점차 전선에서는 도망자나 투항자가 속출했다. 그러자 인민군 독전대는 더욱 혈안이 되어 전사들을 닦달했다. 그들은 인민군 전사의 주머니에서 유엔군 측의 투항 권유 삐라만 나와도 즉결처분을 내렸다.
독전대가 독사처럼 무섭게 전사들의 도망이나 투항을 막았지만, 이미 떨어진 인민군의 사기를 되살리지 못했다. 그 무렵 인민군들은 포로로 잡힌 뒤, 포로신문에서 대체로 전선에서 배가 고픈 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고, 그 다음이 독전대가 가장 두려워 도망하거나 투항했다고 진술했다.
▲ 유엔군이 인민군을 생포하고 있다(1950. 8. 12.). ⓒ NARA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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