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72현 임탁이 잡은 터 '금은당'
충효의 얼이 서려 있는 나주임씨 대종가와 영모정
▲ 나주임씨 대종가 전경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있으며 좌측상단이 안채이고 바로 앞은 사랑채다. 우측상단은 부조묘사당이며 사당옆 언덕 뒤에 영모정이 있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힘차게 뻗어오던 노령산맥을 따라 달려온 말이 신걸산에 멈춰 서서 영산강 물을 마시니 그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목마른 말이 신걸산을 등지고 영산강에서 물을 마시는 터이니 풍수 지리적으로 이보다 좋은 집터는 없을 것이다. 그 곳에 터를 잡아 600여 년 세월이 흘러 새로운 이름을 얻었으니 바로 '금은당(錦隱堂)'이다.
▲ 금은당현판대종가 입구에 걸려있는 금은당 현판 (2013-06-02 촬영) ⓒ 임무택
두문동72현 중 한분인 임탁(林卓)의 고고한 충절을 기리고자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자와 누구에게도 못지않은 높은 덕을 안고 숨었기에 숨을 '은(隱)'자를 합쳐 '금은당'으로 지었다고 한다. 금은당은 나주임씨 대종가 안채의 당호이며 (사)유도회 '한가락회'에서 1997년 지어 올린 것이다.
▲ 대종가 안채나주임씨 대종가 안채이며 정침이라한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나주임씨는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을 지낸 임비(林庇)를 원조로 하는데, 그의 9세손 임탁이 해남감무(황해도에 있는 해남)를 지낼 때 고려의 사직이 막을 내리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게 된다. 임탁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두문동으로 들어간 후 다시 나주 회진으로 은둔하면서 회진은 나주임씨의 성향(姓鄕)이 된 것이다.
▲ 대종가 마루와 종훈족자로 걸린 청고근졸(淸高謹拙)은 나주임씨 종훈으로 '깨끗하고 높은 뜻을 지니고 스스로를 삼가며 겸손하라'는 뜻이다. 임탁의 13세손 임상덕의 문집에 나오는 글을 종훈으로 삼은 것이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임탁의 선조 묘는 개경에 있어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나주임씨 1세 임비를 원조로 부르고 임탁의 묘가 도선묘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임탁은 회진에 정착한 후 조선조의 조정으로부터 수차례 정사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고 후손들에게도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유훈을 남겨 충절의 표상을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 부조묘 사당임탁의 6세손 임평을 기리는 제사를 매년 (음)12월5일 거행한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유훈에 따라 4대까지 100여년 동안 생업에만 전념하며 충절을 지켜왔으나 가세가 쇠락해지자 임탁의 6세손 임평(1462~1522)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우후가 되고 그의 아들 임붕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와 경주부윤이 되면서부터 벼슬길의 문을 열게 되어 나주임씨는 크게 번성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 장묘우문임탁의 7세손 임붕이 부친 임평의 유덕을 기리며 후손에게 남긴 글이다. 부조묘사당에 보관 되어 있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임붕(1486~1553)은 쇠락해가는 가운을 일으킬 뜻을 세운 부친 임평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에 친필로 부친의 행적을 기록하고 그 위패에 제사를 지내라는 장묘우문(藏廟宇文.1553년)을 지었다. 지금까지 460여년간 대대로 부조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어 효행의 본을 세웠으며 나주임씨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한 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 영모정 전경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112호로 지정돼 있다. 영모정 뒷쪽에 나주임씨 대종가가 있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영모정은 임붕의 아들(익(益), 복(復), 진(晉), 몽(蒙))들이 선친의 거로지(居蘆地)를 기념하기 위하여 1556년 지은 정자이다. 영모정 바로 앞에 시비에는 둘째 아들 임복이 남긴 시로써 선친을 그리워하는 효심 지극한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충절로 이어진 가문의 명예가 효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영모정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임탁의 8세손인 임복이 지은 시이며 효심의 지극한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永慕先親處 선친을 길이 사모하는 곳
流傳指一臺 이 한 정자 유전하는구나
堂存依昔賞 정자를 찾아 옛날을 생각하며
思貌幾時廻 풍모를 그리워함이 몇 번이었나
錫類線宗望 면면이 이어갈 종통, 간곡하신 바람은
紹聲篤後來 받드는 정성 후손들이 돈독하다
腹膺吾祖意 삼가 우리 어버이 뜻 가슴에 새기나니
悲痛亦難裁 비통한 마음 또한 가누기 어렵구나
▲ 영모정을 노래한 글임탁의 30세손인 임광순이 지은 글이며 지극한 효심이 전해지는 전통을 노래하고 있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특히 임복(1521~1576)은 거북선을 설계한 사실이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알려진 강항의 문집에서 발견되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내용은 1574년 임복이 국방경비에 대한 십여가지 대책을 선조 임금에게 올렸다. 임금은 그 중 '전선(戰船)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그 설계에 따라 건조하여 불시의 침략에 대비토록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맞아 이순신이 이것을 이용하여 거북선을 제조함으로서 전쟁에 승리하였다는 것이다.
▲ 영모정을 오르는 돌계단백호임제는 이곳 영모정에서 어린시절 시심을 키웠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또한 영모정은 임붕의 손자인 백호임재(1549~1587)의 시향(詩鄕)이기도 하며 임재의 어린 시절은 여기가 놀이터요 공부하던 장소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한 후에는 이곳에서 말년을 유유자적 보냈다. 충절의 표상인 임탁의 후손답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권력층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개는 면면이 이어져온 것이다.(관련기사 :
백호임제는 왜 황진이를 추모했을까?)
▲ 영모정 전경영산강변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매년 (음)10월1일에 나주임씨 대종중 삭회(정기총회)가 열린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그리고 영모정을 중심으로 1934년 항일의 불꽃을 태운 '회진개혁청년회'사건은 그해 추석에 영모정에서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연극을 개최하던 중 출동한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된 사건이다. '회진개혁청년회'는 이십세 전후의 임우택, 임경택, 임광택 등이 주도한 민중계몽운동으로 자주정신 확립, 문맹퇴치, 봉건인습의 타파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 회진개혁청년회 기념비로 영모정 앞뜰에 있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당시 이운동이 탄압으로 큰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이십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항일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선 것은 면면이 이어져 온 충절의 대의에 따른 것이다. '회진개혁청년회' 회원 중 임우택은 나주임씨 29대 대종손이며 임경택은 광주 한일병원장 임채준의 부친이다.
또한 임광택은 전남대 법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임채정 전국회의장이 그의 장남이다. 그리고 임채민 전보건복지부장관, 임채진 전검찰총장, 임채주 전국세청장 등 현세에 나주임씨의 종원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금은당'의 명당 바람이 불어준 것이리라 상상해본다.
▲ 임붕의 유허비영모정의 주인 임붕의 유허비로 영모정 앞에 세워져 있으며 영산강을 바라보고 있다. (2013-06-02 촬영) ⓒ 임무택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였다. 임탁이 금은당 터를 잡고 600여 년, 지금까지 양자를 한번도 드리지 않고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32대까지 이어왔다. 이제 나주임씨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충절의 기개와 효행의 모범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다. 이제 영모정 앞 영산강에 넘실대는 강물을 흠뻑 마시고 갈증을 해소한 백마는 다가올 600년을 향하여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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