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파출소 최대만 순경을 찾습니다"
[인터뷰] 부모 찾으러 한국 방문하는 입양인 한나 소피아 요한슨
▲ 한나 소피아 요한슨 ⓒ 한나 소피아 요한슨
미국 샘포드 대학교 교수인 데이비드 스몰린은 그의 글 <아동세탁>에서 "친부모로부터 훔친 아동, 구매한 아동 혹은 납치한 아동을 '고아'로 만들어서 입양을 보내는데 입양제도의 법적규정이 체계적으로 아동을 '세탁' 혹은 합법화 하는데 쓰였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데 있어서 아동의 기록세탁 혹은 기록위조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제인 정 트랜카 같은 해외입양인은 친모가 엄연히 한국에 생존해 있었고 입양 보내진 딸 제인에게 한복 선물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제인의 기록엔 여전히 그녀가 '고아'로 기록되는, 아동세탁 즉 아동의 이력에 대한 기록조작이 버젓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나라 해외입양의 역사는 아동에 대한 기록위조 그리고 여성에 대한 제도적 차별과 멸시로 점철된 수치스런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해외입양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결코 유쾌하거나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그 못난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 아무리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역사라 해도 버릴 수 없는 우리 역사이고 오늘을 이루고 있는 우리 몸과 정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끄러운 우리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생각이 한층 깊어지고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오욕의 역사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스웨덴 입양인 한나 소피아 요한슨(37, 한국이름 김정열)씨는 오는 7월 22일부터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를 찾기 위해 2주간 방한한다. 요한슨씨는 한국 방문 전 친부모를 찾는 데 도움을 달라며 기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다음은 지난 며칠간 요한슨씨와 스카이프 인터뷰로 주고받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한나씨 입양전 ⓒ 한나 소피아 요한슨
대한사회복지회 기록에 따르면 1976년 4월 21일 오전 11시경 요한슨씨는 서울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후 약 10시간 후인 그날 오후 9시 35분경 최대만 순경은 당시 순찰차로 순찰 중 요한슨씨를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664-8번지 앞에서 발견했다. 당시 최대만 순경은 백차 181 파출소에서 근무했고, 나중에 이 파출소는 왕십리파출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최대만 순경은 1991년 경찰에서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한슨씨가 발견된 하왕십리동 664-8번지는 1978년경 이금엽씨가 구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한슨씨는 지금 최대만 순경과 이금엽씨를 간절히 찾고 싶어 한다. 혹시 친부모에 대한 한 가닥 정보를 알 수 있을지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요한슨씨는 한국 친부모에 대해서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당시 최대만 순경은 요한슨씨를 서울아동병원으로 데려갔다. 이 병원은 나중에 서울 서초구 헌릉로 260번지로 이전했다. 1976년 5월 11일, 서울아동병원은 요한슨씨를 대한사회복지회로 보냈고, 같은 해 8월 중순까지 요한슨씨는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머무른 후 스웨덴으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기록에 따르면 1976년 스웨덴 양부는 요한슨씨를 입양하러 한국에 왔다. 그 당시 양부모가 직접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서 아이를 입양해 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요한슨씨는 스웨덴 시골에서 성장했다. 12살 때인 1988년 요한슨씨가 서울올림픽을 스웨덴 양부모 집에서 본 기억이 한국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당시 한국 배구팀은 선전했고 그 일을 계기로 요한슨씨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배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유명한 한 스웨덴 기자가 한국 보신탕집을 취재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본 스웨덴 급우들 몇몇은 요한슨씨가 개를 먹는 한국에서 왔다고 소리를 지르며 욕한 기억이 있다. 그때 요한슨씨는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네 엄마는 양공주, 아빠는 미군이었지?"
▲ 한나 소피아 요한슨 관련 서류 ⓒ 한나 소피아 요한슨
요한슨씨는 입양아로 스웨덴에 살면서 겪은 인종차별 경험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경험이었다. 스웨덴에는 해외입양인들이 많지만 아시아 사람은 적다.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은 곳곳에서 요한슨씨에게 "차이나맨(China Man)!,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넌 여기에 속하지 않아!"라고 소리쳤다. 그녀가 들었던 가장 흔했던 인종차별적 발언은 "네 엄마는 양공주, 아빠는 미군이었지? 넌 혼혈아지?"였다. 요한슨씨는 혼혈아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 인들은 모든 해외입양인들은 혼혈아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요한슨씨는 10대 때 마구간에서 말과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말을 돌볼 때가 가장 편했고 시비 거는 스웨덴 인들도 없었다.
"내가 말을 돌 볼 때 주위사람들은 내 피부색에 관심이나 시선을 두지 않았어요. 말에만 관심과 시선을 두었고 그래서 난 아주 편했지요."
요한슨씨의 양부는 정신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3년 전 은퇴했다. 그녀의 양부는 스웨덴 시골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젊어서는 목수 일을 하시다가 나이가 들어서 간호사로 취직하여 은퇴한 것이다. 요한슨씨 양모는 오는 12월 그동안 다니던 보험회사에서 은퇴한다. 그녀의 양모는 총 8년간만 학교를 다녔다.
양부모님에게는 친아들이 하나 있고 요한슨씨에게는 오빠가 된다. 그녀의 오빠는 학교 교사로, 아내와 16세 된 아들이 있다. 요한슨씨는 기차로 몇 시간 거리에 사는 양부모와 사이는 좋지만 자주 만나지는 않고 전화통화를 자주 한다.
현재 요한슨씨는 스톡홀름에 있는 국가기관 노동문제연구소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전에는 스웨덴 교육부 범죄예방국 조사관으로 근무했고, 그 전에는 스톡홀름대에서 이학박사를 받고 연구원과 강사 생활을 했다.
요한슨씨는 금년 여름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해외입양인모임에 참여한 후 본격적으로 친부모를 찾고자 한다. "제가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부모님도 나이가 드셨을 테고, 더 늦게 전에 친부모님을 찾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입니다"라며 그 감회를 전한다.
"입양기록, 정부에서 총체적으로 관리했으면..."
▲ 한나 소피아 요한슨 ⓒ 한나 소피아 요한슨
요한슨씨는 3년 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대한사회복지회를 방문하여 그녀는 자신의 입양서류를 봤다. 그리고 당시 1976년 그녀가 발견되었다는 곳의 주소를 찾았다. 이 주소는 요한슨씨 입양서류에는 없는 정보였기 때문에 그녀가 처음 접한 정보였다.
그 당시 요한슨씨는 자기가 어린 시절 보내진 아동병원도 방문했는데 여기서도 자신이 전에 모르던 새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당시 대한사회복지회 직원들은 요한슨씨가 1976년 발견된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가 발견된 건물은 1989년 철거되었고 그 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요한슨씨는 올해 4월 중앙입양원에 문의하여 혹시 대한사회복지회에 자신이 모르는 자기 입양 기록이 더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는 대한사회복지회가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 최대만 순경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3년 전 제가 대한사회복지회를 방문했을 때 왜 내게 그런 소중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 후 요한슨씨는 한국에 있는 해외입양인 지원단체인 뿌리의집, 해외입양인모임(TRACK) 등에 최대만 순경을 찾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지금껏 찾지 못했다. 중앙입양원의 경우는 최대만 순경을 찾았고 요한슨씨 요청사항을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입양원은 내게 최대만 순경의 연락처는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최대만 순경님, 이 기사를 보시면 제발 뿌리의집(02-3210-2451)으로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요한슨씨는 지금까지 자신에 관한 기록과 정보가 너무 파편적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 기록과 정보를 찾는 일이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녀는 오는 7월 22일부터 친부모를 찾기 위해 2주간 방한한다. 2007년 해외입양인모임 행사 차 첫 모국 방문을 한 이래 2010년 두 번째로 잠깐 방한한 후 친부모를 찾기 위한 본격적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요한슨씨는 해외입양인들의 기록을 한국정부나 중앙입양원 같은 기관에서 총체적으로 관리해주었으면 한다.
"친부모님을 만나면 나를 왜 입양 보냈는지, 내가 입양 보내진 후 1976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게 또 한국 형제자매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또 친부모님이 나를 찾으려고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나를 먼 나라로 해외입양 보낸 친부모님에게 화를 내지는 않아요. 단지 내 배경이 궁금하고 친부모님과 한국 친척들이 궁금합니다"라며 요한슨씨는 친부모님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이 궁금하다고 한다.
"해외입양, 이제는 중지하라!"
▲ 한나 소피아 요한슨 ⓒ 한나 소피아 요한슨
한국정부에 대해서 요한슨씨는 "이제는 제발 해외입양을 중지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한국은 이제 자국민이 낳은 아이를 해외에 버리지 않고 스스로 돌볼 만큼 부유합니다. 전 사회복지가 잘 된 스웨덴에서 자랐습니다. 편부모는 스웨덴 정부에서 재정지원, 양육비지원을 받지요. 그리고 지금 스웨덴사회 구성원들은 편부모나 미혼부모에게 아무 편견이나 차별이 없지요. 한국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편부모에 대한 차별을 없애도록 정부에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야 합니다"는 권고를 잊지 않았다.
또 요한슨씨는 한국정부가 '입양의 날'을 정해 입양을 권장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친엄마가, 결혼여부에 무관하게, 자녀와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며 힘주어 말했다. "한국정부는 중앙입양원의 권한을 강화시켜 입양인들을 위한 입양 후 서비스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라는 강조도 잊지 않았다.
요한슨씨는 한국인들이 편부모, 특별히 편모를 지원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이야기 했다. "그래서 편모들이 자녀양육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키울 수 있는 풍토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친부도 결혼여부와 무관하게 자기가 낳은 자녀 양육에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대한사회복지회를 비롯한 모든 입양기관들은 입양에 관한 모든 서류 또는 복사본을 중앙입양원에 이관하고 친부모를 찾으러 온 입양인들에게 공개해야 합니다. 또 입양기관들은 아동을 입양 보낼 때 그 아동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아동과 함께 보내야 합니다. 만약 대한사회복지회가, 저를 발견한 순경에 대한 정보를 3년 전 제가 대한사회복지회를 방문했을 때 제게 직접 알려주었더라면, 전 지금이 아닌 3년 전에 친부모 찾기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쯤은 벌써 친부모님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마 1970년대 한국 입양기관들은 나중에 입양인들이 찾아와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요청할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외입양인들이 자기의 입양정보를 얼마나 알고 싶어 하는지 그 상황을 잘 아는 만큼 입양기관들의 정책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아동이 입양될 당시에 입양부모에게 그 입양아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제공해 주면, 나중에 입양인들이 그 입양기관들을 반복해서 방문하여 입양정보를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한국에 살지 않고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친부모 찾기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한사회복지회가 저를 대신하여 최대만 순경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지금 친부모를 찾기 위해 전적으로 자원봉사자나 지인들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만약 한국정부가 그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해외입양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해외입양인들에게도 그 경제력에 걸맞은 입양 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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