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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품에 안기니까 조금도 무섭지 않네요"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23) #6. 탈출(1) ⑤

등록|2013.08.05 10:07 수정|2013.08.05 10:07

▲ 산딸기(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전재고개) ⓒ 박도


참 이상하네요

"참 이상하네요. 이렇게 동생 품에 안기니까 조금도 무섭지 않네요."
"나두 순희 동무가 겥(곁)에 이시니끼니(있으니까) 여기가 전쟁터 같디 않구만."
"이제 우리 사이 동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잖아요."
"습관이란 참 무섭디."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나온 모앙입니다."
"긴데 품에 안긴 체네(처녀)를 마냥 누이라구 부르기는 기렇구(그렇고)."
"그래도 누인 누이야요."
"알가시오. 긴데 내레 하늘 같은 사수였던 순희 누이 품에 이렇게 안기다니."
"그래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에요. 그리고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말 들어보지 못했나요?"
"메라구(뭐라구)?"
"그냥 그런 말이 있다고요."
"알가시오. 긴데 우리 학교 생물 선생님이 기러더구만요. 너자(여자)들이 남정네보다 더 오래 사니까 홀어미가 안 되려믄 한 살이라두 나이 어린 남정과 혼인하라구 하더만요."
"그거 말이 되네요. 대체로 여자들이 남자보다 네댓 해는 더 오래 살지요."
"내레 누이랑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이렇게 살고 싶구만요."
"뭐라고요?"
"기러구 싶다는 소원이야요."
"사나이 소원이 고작 그거예요?"
"내레 디금은 기래요. 이 길루 누이랑 넹벤(영변) 우리 집까디 가서 우리 아바지 오마니한테 내레 색시라구 소개시키고 싶구만요."

105m Howitzer(곡사포)아티스트: F.A. Snoderly(1951. 2. 13.).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 아티스트가 망중한 시간에 부대 언저리의 105미리 곡사포를 스케치한 소품. ⓒ NARA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갈수록 태산이군요."
"내레 솔딕히(솔직히) 기런 욕심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당 서 낙동강을 건넷수다."
"뭐라고요?"
"아, 기래서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과 위대한 인류 력사가 만들어디디 안카시우."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우선 우리가 이 전선을 빠져나가는 일부터 만만찮을 거예요."
"기럴 테디요. 하디만 네로부터 디성이면 감턴(감천)이라 햇수."
"우리 날이 어두울 때까지는 일단 여기서 잠자코 숨어 있어요."
"기럼, 우리는 인민해방군에게두, 국방군에게두 눈에 띄면 붙잽힐 거이구. 기때 정체가 들통 나면 포로로 잡히디 않으면, 곳당(곧장) 총살일 거야요. 우리 날이 어둡걸랑 날래 여기를 출발합세다."

몸을 씻고 왔어요

준기는 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준기는 우물물로 몸을 깨끗이 닦은 뒤 큰 양푼에다가 물을 가득 담아 방 안으로 들여왔다.

"동생, 아주 잘 했어요. 자주 들락날락 하기도 위험한데."

준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곧 순희가 바깥으로 나갔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돌아왔다. 

"나도 우물에서 몸을 닦고 왔어요. 우물물이 아주 차고 시원하더군요."
"몸을 닦자 하늘을 나는 기분이구만요."

순희는 보자기에 싼 밥을 폈다. 준기는 방문을 막은 돗자리를 조금 걷었다. 그러자 갑자기 방 안이 환해졌다. 밥맛이 꿀맛이었다. 고추장이 엄청 매웠다. 장아찌는 무척 짰다.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을 맵고 짜게 먹는다고 하더니 아까 먹은 장아찌가 정말 그랬나 봐요."

순희가 눈물을 글썽이며 양푼의 물로 입 안을 헹궜다. 준기도 땀을 송골송골 흘리면서 양푼의 물을 마셨다.

"반은 남겨뒀다가 이따 밤길 떠나기 전에 저녁으로 먹읍시다."
"그러디요."

순희는 남은 밥과 반찬을 다시 보자기에 싼 뒤 윗목에 밀쳐두었다.

"밤새워 가려면 미리 푹 자 두는 게 좋겠지요."
"기럼요. 이 방 안에서 달리 할 일두 없으니 기럽세다."

그들은 바닥에 깐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나른한 여름날 오후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행랑채 옆 가죽나무에서 매미가 발악하듯 울기 시작했다.

▲ 금강산 구룡연 계곡의 옥류담 ⓒ 박도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연재소설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일일이 검색하여 수집한 것들과 작품 취재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지인 및 애독자들이 제공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이번 회는 두더운 날씨이기에 애독자를 위해 특별히 시원하고 맑은 금강산 옥류담 사진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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