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독립운동 '백지동맹' 주도한 최순덕 선생 별세
빈소, 광주 한국병원장례식장... 발인 24일
▲ 지난 2008년 이금주(사진 오른쪽) 전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과 함께 한 행사에 참여했던 최순덕(사진 가운데) 선생의 모습. ⓒ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22일 오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전교생들의 시험 거부 투쟁(백지동맹)을 주도한 최순덕 선생이 향년 103세로 별세했다.
1929년 현 전남여자고등학교 전신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최 선생은 당시 11월 3일 광주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가전에 적극 참여했다.
광주역 반일 시위 현장에서 동료들과 치마폭에 돌을 나르기도 했던 최 선생은 많은 학생들이 체포 구속되자 이에 반발하며 시험거부 투쟁을 준비했다. 11월 10일로 예정됐던 중간고사를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최 선생은 중간고사를 하루 앞둔 9일 저녁 동료들과 함께 '구속학생 석방과 조선 독립을 위해 답안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고 연필도 들지 말자'는 내용의 호소문 150여 장을 작성해 배포했다.
최 선생 등은 호소문을 학생들의 책산 안 서랍에 미리 배포하고 1교시 시험이 시작되자 교실을 투쟁을 호소하기도 했으며 전교생이 시험을 거부한 백지동맹은 전국 학생독립운동으로 번졌다.
백지동맹 사건을 주도했던 최 선생과 가담자 학생 46명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며 이듬해 1월 졸업을 앞둔 최 선생은 퇴학 당했다.
1954년 전남여고는 학생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최 선생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부 유공자들이 '백지동맹은 최 선생이 주도한 것이다'는 취지의 탄원서 등을 제출했지만 국가보훈처는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광주면 부면장과 광주여고보 사친회장을 맡고 있던 친구의 아버지가 백지동맹에 참여한 딸이 구속되지 않도록 사건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최 선생의 행적도 묻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에 따르면, 최 선생과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던 이금주(94) 전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은 최 선생의 사망 소식을 접하곤 "이 시대의 양심이자 내가 존경할만 분 중 한 분이신데…"라며 "일제의 만행과 싸우는 우리를 늘 격려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 분이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최 선생의 유족은 광주광역시 부교육감을 지낸 바 있는 이재민 순천향대학교 교수와 이재균(이재균 치과 원장)씨 등 6남 1녀가 있다.
빈소는 광주광역시 서구 쌍촌동 소재 한국병원 장례예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발인은 24일 오전 9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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