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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사가 제 손 잡고 '고맙다' 했을 때 제일 뿌듯했죠"

[인터뷰] 시각장애인용 음성도서를 만드는 사람들

등록|2013.07.28 17:43 수정|2013.07.28 17:43

녹음봉사자들의 모습인터뷰에 참여한 녹음봉사자들. 왼쪽부터 장재희·김종옥·이은영씨. ⓒ 유정아


"아뇨. 점자책보다 오디오북(음성도서)을 훨씬 많이 써요."

인천 송암점자도서관의 김윤미 팀장(40, 여)은 "시각장애인들은 점자책을 주로 이용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기자처럼 시각장애인의 독서를 떠올릴 때, 비장애인들은 보통 점자책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그들에게 더 친숙한 것은 육성으로 녹음된 음성도서다. 김 팀장은 "요즘 노환으로 시력을 잃는 분들이 예전보다 많아졌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인이 늘어나다 보니 노환으로 시력을 잃게 되는 분들도 많고, 사고로 중간에 실명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은 아무래도 점자가 익숙치 못하다 보니까, 오디오북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죠. 한 권을 만드는 데 반 년 가량이 걸리는 점자책에 비해, 3~4개월 정도가 소요되는 음성도서가 더 많이 만들어져서 접하기도 쉽고요."

그러나 음성도서를 구할 수 있는 경로는 많지 않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복지관과 점자도서관들은 음성도서를 직접 제작해 필요한 이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서의 육성 녹음이다. 이 일은 전부 자원봉사자들이 맡는다.

이들은 일주일에 1,2일 정도 기관을 방문해 녹음실에서 책을 소리내어 읽는다. 성우 못지않게 낭랑한 목소리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에게 낯설기만 한 녹음봉사를 하는 이들은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나 주부였다.

"80년대에는 시각장애인 집에서 음성도서를 만들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는 녹음봉사자 장재희(53, 여)·김종옥(61, 여)·이은영(55, 여)씨. 이들은 각각 1년·3년·20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두 권의 책을 만들고 그만두는 봉사자들이 많은 환경에서, 5권 이상씩을 제작한 이들은 가장 성실한 녹음봉사자에 속한다.

각각 2011년·2012년에 일을 시작한 장재희씨와 김종옥씨는 봉사를 신청한 후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교육받은 뒤 녹음을 시작했다. 그러나 20년의 경력을 가진 이은영씨가 녹음봉사를 시작한 80년대 초에는 지금 같은 음성도서 제작 체계가 없었다.

"남산 근처에 시각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분이 직접 만든 녹음실이 있었어요. 녹음실이라고 해봤자 그 분이 본인 집에 기계를 설치해놓은 정도였죠. 녹음봉사라는 용어도 없었고. 그냥 찾아가서, 거기서 녹음하면서 처음 음성도서를 만들었어요."(이은영씨)

이들은 이 복지관에서 주로 제작 요청이 들어온 책이나 제작팀에서 배정해준 책을 녹음한다. 가끔은 본인이 선택한 책을 가져와 녹음하기도 한다. 김종옥씨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었던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첫 녹음을 진행했다. 김씨는 "좋아하는 책을 오랜만에, 그것도 소리내어 읽으니 이야기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오고 참 재미있더라"며 웃었다.

소설을 주로 녹음한다는 장재희씨는 "많은 등장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목소리를 구분지어 녹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신경쓰이는 부분이다"고 말했다. 이은영씨는 "한 안마사로부터 신청받아 녹음했던 <소설 동의보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그 특별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우리(봉사자)는 녹음실에서 녹음만 하니까, 음성도서를 이용하는 사람들하고는 직접 마주칠 일이 없죠. 그런데 <소설 동의보감>을 녹음하고 얼마 있다가 그 책을 신청한 분하고 마주치게 됐어요. 안마사였는데, 제 손을 꼭 붙잡고 '덕분에 잘 들었다. 일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고맙다'고 계속 말하더라구요. 이 일을 하면서 제일 뿌듯했었던 순간이었죠."

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 전경인천 남구 학익동에 위차한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전경이다. ⓒ 유정아




"교육받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했으면"

가정집에서 녹음을 하던 시절에 비해 체계는 잡혔지만, 음성도서 제작 여건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인천시에서 음성도서를 제작하는 곳은 이 시각장애인복지관 한 곳뿐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봉사자들은 모두 왕복 두 시간 이상의 거리를 오가며 녹음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본인이 힘든 것보다, 녹음봉사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더 안타까워했다.

"사람들이 알아도 잘 못 오는 것 같다. 봉사 자체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또 녹음실에서 마이크 앞에 대고 책을 읽는다고 하니까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아요. 와서 교육만 받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장재희씨)

김종옥씨는 "젊은 사람들이 녹음봉사에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물론 나이 든 사람들이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 젊은 사람들이 녹음한 책을 들어보면 내가 한 것보다 더 상쾌한 느낌이 들어요. 목소리도 더 또렷하고 호흡도 안정적이니까 듣기에 더 편하죠. 이용하는 사람들한테도 그게 더 좋지 않겠어요?"

이들은 "교육을 받을 때는 젊은 사람들도 종종 있는데, 막상 녹음을 시작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우리 같은 중년들이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이유와 관련해, 이은영씨는 "녹음실 운영 시간의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공공기관이다 보니까 직원 근무 시간에 맞춰 운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젊은 사람들은 다 회사랑 학교에 있을 시간이니까 하기가 힘들죠. 시 전체에 하나뿐이니 접근성도 좋지 않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음성도서 녹음실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 내 음성도서 녹음실이다. 봉사자들은 이 곳에서 책 내용을 녹음한다. ⓒ 유정아


"제작하는 기관도 늘리고, 녹음실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음성도서. 그 제작 과정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할까. 인터뷰를 진행한 봉사자와 복지관 담당자들은 '낙후된 녹음기기'를 자장 먼저 지목했다.

녹음에 이용하는 컴퓨터와 기계들이 오래된 기종이라 주변 소음이 심하다는 것. 물론 편집과정에서 소음은 삭제된다. 장재희씨는 "그래도 직원들이 거기에 신경을 쓰고 고생하는 건 인력 낭비가 아닌가 싶다"며 "장비가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국의 여러 시각장애인복지관이 음성도서를 제작하고 있지만, 이들 간 자료교류가 어렵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됐다. 현재 음성도서가 완성된 출판물을 읽고 녹음해 파일로 만드는 식으로 제작되다 보니, 저작권 측면에서 공유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도서를 여러 기관에서 각각 제작하는 일이 많다. 전국의 음성도서 제작 시스템을 일원화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지만, 아직은 어려운 일이다.

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정보문화팀 대리인 한미애(35, 여)씨는 "그래도 요즘 들어 기관간 협력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에는 부천 해밀도서관과 우리 복지관이 자료교류 협약을 맺기도 했어요. 녹음 파일을 보내는 것은 못 하고, CD로 완성된 음성도서들을 주고받았죠. 올해는 전국 8개의 점자도서관이 같은 방식으로 자료교환을 해 볼 예정입니다. 이게 확산되면 음성도서 제작의 효율이 좀 더 높아지겠죠."

음성도서의 제작과정에 참여하는 동시에, 스스로가 이용자이기도 한 시각장애인 김윤미 팀장은 "음성도서를 제작할 수 있는 장소가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 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의 녹음봉사자 수는 35명. 규모에 비해 많은 편이지만, 한 권을 제작하는 데 수 개월이 걸리다 보니 매달 완성되는 책이 5~7권 가량으로 적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책을 신청하면 만들어 주지만, 만들어지는 책이 적으니 오래 기다려야 하는 때도 많다.

"제작하는 기관이 늘어나는 것도 좋고, 이미 제작하는 기관에서 녹음실을 늘리는 것도 좋아요. 제작되는 음성도서가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은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점자책이나 음성도서로 제작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요."

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직원들인터뷰에 참여한 인천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직원들. 위는 정보문화팀 대리인 한미애씨. 아래는 복지관 내 송암점자도서관 팀장인 김윤미씨. ⓒ 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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