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남녀 화가가 살다간 '수덕여관'
[전통가옥의 숨은 멋 엿보기 125] 이응로 화백의 집 수덕여관
▲ 덕숭산에서 흐르는 내를 건너 들어가는 수덕여관 입구 ⓒ 하주성
초가로 된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수덕사라는 고찰의 일주문 곁에 자리하고 있는 이 고택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산41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인 '이응로선생사적지'. 이 집은 한 때 여관으로 사용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이라는 간판을 아직도 달고 있다.
이 수덕여관은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화가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이다. 또한 이응로 화백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고택이다.
▲ 초가집인 수덕여관은 대문 한편에 정자 높임마루를 놓았다. 마루 뒤편에 걸려있는 수덕여관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 하주성
수많은 고초를 받은 이응로 화백
이응로 화백은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다. 이듬해인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 충남 기념물인 수덕여관은 이응로 화백이 1944년에 구입한 초가집이다. ⓒ 하주성
1948년에는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62년 프랑스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콜라주전을 열었다. 1965년에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 화단과는 단절되다시피 했으며 주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에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또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이 되었다.
여류화가 나혜석도 살다간 수덕여관
이응로 화백은 집 앞에 있는 바위에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추상화하여 표현했다.
이 수덕여관은 수원 출신인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나혜석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물렀다고 하지만, 사실은 수덕사의 경내가 아닌 이 수덕여관이라는 것이다. 미술계 남녀 거장이 묵었던 이 수덕여관이야말로 우리 미술사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할 곳이다.
▲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돌아 온 이응로 화백이 남긴 작품 ⓒ 하주성
▲ 바위에 음각한 이응로 화백의 작품. 두 점이 남아있다. ⓒ 하주성
ㄷ 자형의 초가집, 방이 많은 것은 여관이기에
수덕여관은 ㄷ 자형의 초가집이다. 정면으로 보면 중앙에 출입문을 두고 한편으로 정자와 같은 높임마루를 들였다. 마루 밑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한 듯하다. 원형을 복원하였다는 수덕여관은 정면 5칸에, 측면은 한편은 6.5칸, 또 한편은 4칸으로 꾸며졌다.
집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우측의 날개채는 모두 6개의 방을 드렸다. 아마 이곳에서 손님들이 묵었을 것이다. 객방의 방문 앞에는 툇마루로 연결을 하였으며, 중앙에도 방이 있다. 정자마루를 올라갈 수 있는 이 방은 사랑채 대용으로 사용이 된 듯하다. 좌측 날개채는 안채의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 집 뒤편에 놓여있는 장독대 ⓒ 하주성
좌측엔 넓은 툇마루를 놓았으며, 뒤편에는 장독과 우물이 있다. 이 고택 앞으로는 덕숭산에서 나오는 물이 시원한 소리와 함께 흘러내린다. 한 여름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마 이응로 화백이 이 집을 사들인 것도, 주변의 경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 수덕여관 앞에 더덕구이 집들이 즐비했어요. 그때만 해도 상당이 싼값에 더덕구이를 먹을 수 있었죠. 개천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더덕구이에 동동주 한 잔 하면, 세상시름을 다 잊을 수가 있었으니까요."
▲ 이응로 화백이 작품활동을 하던 고택. 이곳에선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도 3년간 기거했다. ⓒ 하주성
▲ 마당 가운데 선 굴뚝. 여관이라 방이 많아 굴뚝이 여기저기 서 있다. ⓒ 하주성
오랜만에 수덕사를 찾았더니 입구에 늘어선 점포들로 인해 절의 분위기까지 달라졌다는 관광객의 푸념이다. 수덕여관을 한 바퀴 돌면서 찬찬히 살펴본다. 대문 앞에 꽃을 피운 배롱나무 한 그루가 초가집과 딱 어울린다.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간 노화백의 시름도 모르는 체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 무심하게 흐르고 있는 개울의 물. 세월은 그렇게 잊히는 것인가 보다.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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