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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아들아, 쉰넷 아버지를 버려라!

선교사를 꿈꾸는 큰아들에게... 아프리카의 눈물을 너의 눈물로 삼아라

등록|2013.08.01 10:05 수정|2013.08.01 10:05

▲ 요르단, 남수단, 우간다로 아웃리치를 떠났던 큰아들 조승(25) ⓒ 조호진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아들의 풍요로운 삶을 기대한다.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고, 자전거를 태워주며, 함께 공을 차면서 아버지보다 더 힘차고,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걸음마 하던 아들이 쑥쑥 자라서 아버지를 한판에 이기는 그 날의 패배를 손꼽아 기다린다. 큰아들의 이름을 '승'(勝), 외자로 지은 것은 아버지와 같은 패자의 삶이 아닌 승자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다.

군 복무를 마친 아들은 2011년 9월 아프리카로 떠났다. 복학하기 전까지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영어를 공부하며, 짐바브웨 한인교회에서 봉사 활동하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길면 6개월 짧으면 4개월 정도 체류하다 2012년 초에 귀국해서 봄 학기에 복학하는 것이 애초 일정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었다. 아들이 가난한 아프리카에 영혼을 빼앗긴 것이다.

아들이 폭탄선언을 했다. 아비와 부모, 친척과 본토를 떠나 하나님이 가라는 땅,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살겠다는 것이다. 의지를 다지기 위해 퇴로를 차단했다. 아들은 휴학을 연장하지 않았고, 대학은 제적 처리했다. 대신 아프리카에 필요한 산림자원을 공부하겠다며 남아공 대학에 입학원서를 접수했다. 성모 마리아도 아들 예수의 길을 막지 못했는데 못난 아버지가 어찌 아들의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스물다섯이면 자기결정권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낯선 언어와 음식과 문화... 아프리카에서 살아남기

▲ 남수단에 이어 우간다로 떠났던 아들의 다리가 통통 부었다. 리얼 아프리카는 생살 찢는 수술의 고통으로 다가왔다. ⓒ 조호진

아들의 꿈은 선교사이지만, 그것은 미래의 꿈이고 당장은 살아남아야 했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첫째 언어가 가능해야 하고, 둘째 음식에 적응해야 하고, 셋째 문화와 기후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데 아들은 첫째 문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에서 시작한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는 쉽지 않았다. 문화적으로 다른 점도 나를 힘들게 했고,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낙담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그 환경은 내게 영어라는 큰 달란트를 선사했다. 살아남기 위해 말해야 했고, 들어야 했다. 독후감을 써야만 했기에 영어로 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전을 뒤져가며 독파했고, 점점 영어로 기도하게 되었다."

아들은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모인 선교사 지망생 400명 중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아프리카 선교사를 꿈꾸면서 언어 문제를 해결 못 하면 초장에 탈락이다. 아들은 간절함으로 언어 문제를 해결했고, 음식과 문화 등의 문제는 타고난 적응력과 친화력으로 극복했다. 요르단 아웃리치((Out-reach, 선교를 겸한 봉사활동)를 통해 시리아 난민의 비참함을 목격한 아들은 "내 삶의 이유를 알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았다"고 눈물을 흘렸다.

6개월간의 DTS가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들은 더 헌신하고, 더 훈련받고 싶어서 남아공 뮈젠버그 캠프에 남았다. 간사가 된 아들의 할 일은 훈련생들을 돕는 것이다. 아들을 비롯한 간사들은 무급이기 때문에 아웃리치에 참가하려면 비용(한화 170만 원~220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그 비용을 보내줄 형편이 아니었고, 아들도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아들은 아웃리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영상을 제작하고 배포하는 등으로 모금활동을 했다. 그리고는 3주간에 걸쳐 아르바이트하고, 막노동을 하면서 150만 원을 모았고, 후원금을 보태서 아웃리치에 참가했다. 지난 4월 1일 아들은 이태석 신부님이 선교사로 활동했던 남수단과 이웃 나라인 우간다로 아웃리치를 떠났다. 요르단 아웃리치에서는 훈련생이었지만 이번엔 8명의 팀원을 인솔한 리더였기에 책임이 무거웠다.

"우간다와 남수단은 TV로만 봐왔던 그런 아프리카였다. 짐바브웨와 남아공 등의 남부아프리카는 발전도 되어 있고 부유한 편이다. 그러나 우간다와 남수단은 정말 가난한 나라 중의 가난한 나라였다. 우간다에 도착한 지 한 달 후, 우리는 최근에 내전이 끝난 남수단으로 이동했다. 수풀이 우거지고, 전기는 당연히 없으며, 빗물을 받아 쓰고, 조그마한 마켓조차도 30분을 걸어가야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다."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심하지만 별도리가 없어요!"

▲ 아프리카 떠나기 전에 헌혈을 하고 있는 큰아들 조승(맨 우측). ⓒ 조호진


아들은 남수단과 우간다 아웃리치를 떠나기 전에 '리얼' 아프리카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했다. 아울러 긴장된다는 소식을 끝으로 카카오톡과 페이스북 등의 모든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서 2개월이 지나서 아들에게 연락이 왔는데 가슴 철렁거리는 소식이었다. 

"적혈구 백혈구 수치가 엄청나게 낮대요. 수혈을 받아야 한다고 의사가 그래요.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심하고, 많이 아프지만 별도리가 없어요. 라면이 제일 그립네요. 아마, 김치를 못 먹어서 면역력이 약해진 것 같아요."

아들의 팀원들은 남수단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거기서 훈련생 한 명이 말라리아에 걸리면서 베이스가 있는 남아공 뮈젠버그로 이송됐지만, 팀장인 아들은 괜찮았다. 남수단의 아웃리치를 마치고 우간다의 '아루아'라는 시골 지역으로 옮긴 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아들은 심한 두통에 시달리다 보건소에 갔더니 말라리아라고 했고, 3일간 처방해준 약을 먹었는데도 호전은커녕 몸이 불덩이에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악화됐다. 다른 의료기관으로 옮겨 진료했더니 '봉와직염'(Cellulitis)이라고 다르게 진단했지만, 병명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의 낙후한 의료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아들의 표현대로 왼쪽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올랐다. 일주일간 통증에 시달렸지만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급히,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에 있는 외국인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영국인 의사는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감염부위의 생살을 찢어낸 뒤에 고름을 짜냈다고 했다. '리얼' 아프리카는 초원이 아닌 생살 수술이었다. 아들은 고통을 감당하면서 선교사의 길에 대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에 대해 생각했다고 했다.

▲ 아들이 입학시험을 본 남아공대학에서 합격통보가 왔다. ⓒ 조호진


지난 7월 24일 아들이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입학시험을 본 남아공대학의 3개 과에서 모두 합격통보가 왔다고 했다. 아들은 스물여섯인 2014년 초에 남아공 대학의 새내기가 된다. 아프리카 선교사를 꿈꾸는 아들은 승자의 삶이 아닌 힘들지만, 행복한 삶을 선택했다. 생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난민을 돕지 못하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가난한 아프리카에서 겸손을 배운 아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확신했다며 행복한 표정이다.

스물다섯 아들이 쉰넷의 아버지를 한판에 이겨버렸다. 아들에게 속물의 삶을 요구했던 아버지가 졌으니 패자로서 타협안을 제시한다. 선교사의 길을 가려면 아버지가 준 피를 쏟아내고 예수의 피를 채워라. 그리고 아프리카의 눈물을 자신의 피눈물로 삼는 진짜 선교사가 되길 부탁한다.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며 전 세계에서 남아공 뮈젠버그로 모인 400명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이자 아시아인인 스물다섯 살 청년아, 너는 내 아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버려라.
덧붙이는 글 <빛과소금>에 기고한 글을 수정하고 보탠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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