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김진경 총장은 어떻게 국경과 이념의 벽을 넘었을까?

[서평] 중국과 북한에 학교를 세운 김진경 총장의 삶을 담은 <사랑주의>

등록|2013.07.31 20:36 수정|2013.08.12 14:06
바야흐로 '남북관계 제로'의 시대가 도래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상당한 진전을 보였던 남북 화해의 분위기는, 그 이후로 끝을 모른 채 악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지금까지 살벌한 정치적 대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북 평화의 상징으로 기능하던 개성공단마저 무력화되었다. 한반도에서 '젖'과 '살' 냄새는 완전히 사라지고 '피'와 '쇠' 냄새만 가득하게 된 것이다. 남과 북 모두에서, 서로를 향한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강경한 이념이 다른 모든 가치를 억누르는 양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反) 평화적 폐허 속에서도, 굳건하게 서서 희망을 머금고 있는 남북 평화의 상징이 있다. 바로 '평양과학기술대학'이다.

'사랑주의'는 이념과 사상의 벽을 뚫고 중국과 북한에 연변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세운 김진경 총장의 삶을 다룬 책이다. 사실 얼핏 보면 그의 삶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강경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학자 김진경에게 교육 부문을 맡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진경 총장은 모두가 어리석다고 비난할 때도, 묵묵하게 기적을 창조하는 삶을 살아 왔으며, 지금도 그 기적은 계속되고 있다. 이 책은 중국 1급 소설가이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인 조선족 여성 작가 허련순씨가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 전반에 대해 쓴 살아 있는 평전이다.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김진경 총장의 '사랑주의' 인생은 우리에게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던 당돌한 소년

▲ <사랑주의> ⓒ 홍성사

독실한 기독교인인 김진경 총장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아닌 사랑주의자'라는 말이다. 처음 듣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이것만큼 그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는 듯하다. 책의 제목대로, 그는 이념과 사상, 아니 지구상의 모든 벽을 넘어 지금까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해 온 '사랑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보다 더 큰 가치는 없다.

사랑주의자로서의 그의 인생은 역설적이게도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나라를 위해 싸우고 싶은 마음에 군부대를 찾아간 그는 15살이라는 나이 때문에 퇴짜를 맞자, 유리조각으로 손끝을 찔러 '애국'이라는 혈서를 쓰며 간청한 끝에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가장 나이어린 군인이 되었다.

그렇게 당차게 전장에 나섰던 그는, 어느 날 미 군목이 전해준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가 전파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메시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전쟁 중에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살려만 주신다면 지금 자신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북한과 중국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겠다는 것이었다.

'제 생명을 구해 주신다면 우리를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북한과 중국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다 나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나은 길이란 전쟁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로 이끄는 사랑과 협조의 길이었다.(22~23쪽)

놀랍게도 그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자신이 전쟁터에서 한 약속을 어긴 바가 없다. 물론 그의 여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가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것은, 김진경 총장의 젊은 시절만 해도 달나라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황당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 일정 기간 동안 그의 삶은 마음에 품은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안정적인 보성여고 독일어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떠난 유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고신대학교의 전신인 고신대학교 대학부를 설립하고 초대 학부장을 역임하는 등,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삶의 기반을 다졌으나, 어느 순간 친구의 배신으로 계획에도 없었던 미국 이민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땅에서, 김진경은 사업의 성공으로 놀랍게 재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얻은 미국 시민권은 나중에 그가 뜻을 펼치는 데 있어 그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할 삶 속에서도, 중국과 북한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늘 그의 마음을 억눌렀다.

당시 그는 명예와 부, 단란한 가정, 신앙 생활까지 부족한 것 없이 모든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성공한 한국계 미국 이민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갖은 시련과 고생 끝에 이룬 것이니 이제는 그냥 누리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겉으론 웃어도 마음은 늘 빚진 사람처럼 무겁고 조급했다. 평안한 나날이 거듭될수록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더해졌다.(84쪽)

중국의 문을 열고,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우다

아무리 무모해 보여도, 간절히 꾸는 꿈은 현실이 되는 법이다. 그에게는 기적적으로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학교를 세우겠다는 그의 꿈은 점차 구체성을 띠어 가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를 세우기까지는, 그의 앞에 놓인 장애물들이 너무 많았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황당한 꿈을 가진 사람을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는 뻔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웃음과 오해와 불신의 세월이 따랐다.

그의 이런 계획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일입니다" 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부에서는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느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당시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사립대가 유행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사립대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외국인이 학교를 세운다니!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132쪽)

하지만, 김진경 총장은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끝에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1992년에는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속 '산업기술훈련학교'의 개교, 1993년에는 연변과학기술대학 본과(4년제) 및 전과(2년제) 정식 개교를 이뤄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 한 개인의 손에서 실현된 것이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은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이자, 최초의 해외투자 유치 대학이었다. 그가 중국에 대해 보여 준 '진심'은 중국의 마음을 녹이고, 얼어 있던 그 땅의 문을 연 셈이다. 게다가 산업기술훈련학교 개교식에서 옌지시 정부는 외국인의 중국 출입국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김진경 박사와 그의 부인 박옥희 여사에게 '옌지시 명예시민증서'를 발급해 주는 특혜를 베풀기도 했다.

옌볜과기대는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이자 최초의 해외투자 유치 대학이다. 이것은 중국 교육 역사상 새로운 기록이며 중국 개혁개방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옌볜방송국은 물론 중국의 13억 인구가 모두 시청하는 중앙 방송인 'CCTV(China Central Television)에서는 옌볜과기대의 개교를 30분간 특집으로 방영했다. 그 외 옌볜일보, 지린신문, 헤이룽장성신문에서 앞다투어 기사를 다루었다. 한국에서도 주요 일간신문은 물론 KBS 등에서도 옌볜과기대 개교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하여 보도했다.(189쪽)

김진경은 자신이 믿는 예수가 설파한 '사랑'의 메시지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성공한 한국계 미국 이민자로서의 안정된 생활을 모두 팽개치며 중국의 문을 두드렸고, 그것이 마침내 놀라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는 그림 같았던 살림집, 그리고 성공 일변도로 나아가고 있던 기업체까지 모두 처분해 연변과학기술대학에 바쳤다. 지금도 그에게는 총장으로서의 권위 의식이나 명예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수입이 생기면 학교를 위해 쓰고,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베푼다.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돌파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소탈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참된 지도자의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이미 연변과학기술대학은 2,600개 중국 대학 가운데 100개 중점 대학 안에 포함되는 성과를 냈다.

학교에는 총장 공관이 따로 없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제일 오래된 제1숙소 2층 맨 마지막 방. 달랑 두 칸짜리 작은 집이다. 중국은 아직 중앙난방 시스템이라서 공동 보일러로 물을 끓여 쇠파이프로 열을 공급한다. 난방 시간이 정해져 있고, 열도 여러 방이 동시에 공급받는 게 아니라 쇠파이프가 연결된 순서에 따라 차례로 공급받게 되어 있다. 그의 방은 제일 마지막 방이어서 온수가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가는 곳이라 학교 숙사 가운데 가장 추운 방이다. 겨울에는 추워서 집 안에서도 옷을 두껍게 껴입고 담요를 무릎에 덮고 지낸다. 따뜻한 방으로 옮기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20년을 버티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242쪽)

북한에서 받았던 사형 선고

김진경 총장은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성공적인 설립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이 전장에서 한 다짐대로, 그의 마음은 중국뿐 아니라, 늘 북한에게도 향해 있었다. 그는 1987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지금까지도 20년이 넘게 북한을 돕는 일을 해 오고 있다. 연변과학기술대학에 이은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설립은 어느 날 우연히 다가온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피어난 것이다.

김진경 총장은 1987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북한을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왔다. 쌀 천 톤을 북한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북한 라선시에 위치한 보육 시설인 라선어린이집을 비롯하여 량강도 대홍단군, 혜산시, 함경북도 청진시, 회령시, 온성군, 경원군, 길주군 등 209개 지역의 10세 미만의 어린이 약 33,700명에게 매달 식량, 분유, 의류, 약품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20년 넘게 북한의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계속 이어 왔다. 이 일로 한 달에 열 번씩 북한을 다닌 적도 있다.(290쪽)

하지만, 북한의 문을 열기는 중국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 일을 위해, 김진경은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연금 사건'이 그것이다. 북한 주민과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조심스럽게 이어 가던 1998년 9월 12일, 김진경 총장은 북한 당국에 구속되었다. 당시에 이 사건은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김진경 총장과 함께 북한을 돕는 일을 하던 조선족 학자인 이명숙 사장이 북한에 연금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이불과 쌀, 그리고 각종 약품들을 북한 수재민들에게 날라다 주는 역할을 했는데, 북한 당국은 이명숙 사장을 잡아들여 이 행위의 배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북한에 가야 이 일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한 김진경 총장은 죽음을 불사하고 북한에 가게 된다.

"나를 잡기 위해 모두들 잡아들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가야겠네."
  그 말에 모 간부는 다급히 말렸다.
  "안 됩니다. 가면 바로 잡힙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이 일은 끝나지 않아."
  그는 죽음이 두려워 다른 사람의 위험과 고통 뒤에 숨어 사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 그러시다면 북측에서 의문으로 여기는 열두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가십시오."
  "열두 가지가 아니라 스무 가지라도 두렵지 않네. 나는 간첩 활동을 한 일도 없고 법에 위반되는 일을 한 적도 없어. 내가 한 일이라면 북한 인민들에게 옷과 식량을 갖다 준 일밖에 없단 말일세."
  "바로 그게 문제가 된 것을 왜 모르십니까?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그것이 문제라니깐요."
  "자네도 그게 문제라고 보나?"
  "나야 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진실을 믿지 않는 게 문제라는 거죠."
  "믿도록 노력을 해야지. 진실은 통하는 법이야."
  "노력을 하셔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에 가시면 영영 못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래 봤자 사형밖에 더 있겠나?"
  김 총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평양행을 택했다. 자신이 나서서 북한에 해명하지 않으면 이 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295~296쪽)

북한 당국은 '북한 체제 전복 음모죄'를 적용해 김진경 총장을 구속했다. 김진경 총장이 그동안 제공한 식량을 비롯한 많은 지원 물자가 한국 정보부와 미국 정보부의 자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김진경 총장은 성의 있게 자신의 행동이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임을 설명했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이름에는 '조선을 왕래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당 지도부에 파급시키려 선동한 죄, 조선 행정부에 중국식 개혁개방을 유도한 죄, 북한 인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죄' 등이 떨어졌다. 그리고 김진경 총장은 사형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옳은 일을 하다가 당한 일인 만큼, 그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당시 그가 썼던 유서는, 그의 죽음 앞에서도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심정을 잘 보여 준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는, 모두 네 장의 유서를 썼는데, 하나는 학교에, 하나는 아내에게, 하나는 미국 정부에, 하나는 북한 당국에 쓴 것이었다.

그는 모두 넉 장의 유서를 썼다. 하나는 학교에 보내는 편지였다. "총장이 죽었다고 절대 곡이나 장례식을 하지 말고 천국으로 가는 송별식을 하고 풍악을 울리라"는 당부였다.
  두 번째로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과 정리할 부분들에 대하여 썼다.
  세 번째로 미국 정부에 썼다.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북한에 보복하지 말라. 나는 오해로 죽지만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천국으로 갔으니 보복하지 말라. 만약 보복을 한다면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은 내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끝으로 북한 당국에 썼다. "내 육신은 평양의과대학에 기증해 달라. 나의 육신은 아직 크게 앓아 본 적 없는 아주 건강한 몸이다. 내가 죽으면 내 장기를 필요로 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이식해도 좋다."
  유서를 다 쓰고 나서 그는 그날의 기분을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날개 아래 쉬다. 새털과 같은 이 부드러움, 평화롭구나.(300~301쪽)

그 유서는 아마 김진경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김진경 총장은 연금된 지 42일이 되는 날에 석방되게 된다. 모진 고문과 오해를 겪었던 터라, 억울함이나 원통함을 표현하고 싶을 법도 하지만, 그는 북한에서 풀려나 100여 명의 외신들이 카메라를 들고 진을 치고 있었던 베이징공항에 내릴 때, 일언지하에 기자 회견을 거부하며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비밀 출구로 가만히 빠져나온다. 세계 언론의 관심사가 된 자신의 일에 대해 입을 닫은 것이다. '내 조국, 내 민족의 일'을 언론에 나서서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는 북에서 있었던 '42일'을 '억류'라 하지 않고 '체류'라고 표현했다. 억울함이나 원망 한마디쯤 쏟아 낼 수 있었을 테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북측의 입장을 이해했고 그들에게 해가 되고 누가 될 만한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학의 한 집회에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했다.
  "나를 억류하고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마저도 용서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313쪽)

마침내 북한의 문이 열리다

김진경 총장이 북한에 대해 보여 준 한결같은 '진심'의 행보는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 쉽게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2001년 1월, 북한은 먼저 김진경 총장에게 손을 내밀어 연변과학기술대학과 똑같은 대학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권 탄압국이자 강경한 독재 국가인 북한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학자에게 대학 설립을 스스로 요구하게 된 이유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북한에 연금되었던 시간 동안 보여 준 김진경 총장의 태도, 즉 그가 주장하는 '사랑주의'의 실천이 북한의 문도 열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2001년 1월. 북한 당국에서 김진경 총장에게 전화를 해왔다. "옌볜과기대에 대표단을 보내려는데 받아 주시겠느냐?"라는 내용이었다. 김 총장은 "즉시 오시라!"는 답을 주었다. 이리하여 김 총장이 북한 당국에 연금되었다가 풀려난 지 2년여 만에 북한에서 대표단이 도착하게 되었다. 만나 보니 김진경 총장을 연금하여 심문하던 사람도 끼어 있었다. 대표단은 윗선에서 김진경 총장을 모셔 오라고 한 내용문을 그에게 전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감옥에 억류되었던 사람은 다시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전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전례를 깨고 김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그 뒤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과 김책공대 대표단이 옌볜과기대를 방문하여 옌볜과기대의 운영을 낱낱이 조사했다. 그리고 "평양에 옌볜과학기술대학과 똑같은 대학을 세워 줄 것을 요청"했다.(315~316쪽)

북한 당국은 김진경 총장이 원하는 대학 위치에 있던 군사기지까지 철수할 정도로 그와 곧 세워질 평양과학기술대학을 배려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곳은 공교롭게도 낙랑 공주가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며,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가 있던 자리였다. 그리고 허가를 받은 지 8년 만인 2009년 9월 16일, 마침내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준공식 및 총장 임명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 25일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이 강의를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의 개학을 두고 "강경파 공산주의 국가와 복음주의 기독교 학자라는, 서로 다른 종자의 결합이 북한에서 열매를 맺었다"라는 말로 특종 보도를 냈다. 이를 이끌어낸 원동력은 오직 그의 '사랑주의'였다.

2011년 8월 25일에는 북한 정부가 김진경에게 '평양 명예시민증'과 '교육학 명예박사증'을 수여하는 행사를 가졌다. 북한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에게 명예시민증을 준 것이다. 또한 2011년 6월에는 당의 지시로 전국 모든 대학이 학업을 중지하고 건설 현장에 동원되는 일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평양과학기술대학만 예외가 되어 수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북한 정부도 김진경 총장의 '사랑주의'에 감동한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배려이다.

김 총장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에서 국제대학을 성공시킨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것이 실현된다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루어 내고야 말았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결코 우연도 필연도 아니다. 이는 오로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섬기는 '사랑주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결실일 뿐이다.(345쪽)

그의 '사랑주의'에서 세계 평화의 길을 찾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증오와 대립,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도 남북관계는 '부도' 상태다.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한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 갈등이 쉽사리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떠한 '체제'나 '제도'로는 남북 간을 가로막고 있는 이념의 장벽을 진정으로 넘을 수는 없다. 모든 시스템 안에는 인간의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그 마음에, 벽을 허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마음의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설령 남북통일이 성사되더라도 남북한 주민들 간의 진정한 통일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김진경 총장의 '사랑주의'는, 모든 체제와 제도보다 앞서는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위대한 철학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랑주의'는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인데, 그것이 현실의 정책과 제도로 과연 연결될 수 있는지를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교육자로서의 변치 않는 신념인 그의 '사랑주의'는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 냈고, 지금도 기적을 창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사랑주의'를 바탕으로 제 2, 제 3의 평양과학기술대학과 개성공단 등이 만들어져서 통일로 가는 데 굳건한 다리가 되기를 바란다. 다양한 '변수'들이 난무하는 남북관계에, '상수'로서 남북 평화와 협력의 상징으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이 설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평양과기대 설립이 남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핵 문제로 긴장이 팽배한 한반도 정세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미 행정부의 불신과 보수 진영의 강경 대응책을 불식하기 위한 평화카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평양과기대에 한국 교수, 학자뿐 아니라 재미동포 과학자, 세계 각국 교수진이 들어가서 엘리트들을 가르칠 경우, 평양은 국제 평화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두 체제가 만나서 함께 배우며 일할 수 있는 중간 지대 역할을 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며 통일로 가는 지름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 북측 지도계층이 서방세계와 국제사회의 시장 기능과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소개함으로써 대화와 교역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330~331쪽)

그가 세운 연변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은 오늘날 세계적인 인재를 배출하는 국제대학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한국, 북한, 중국을 잇는 대화 창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김진경 총장은 자신의 생명까지 걸고 국경을 넘나들기를 수천 회 거듭한 끝에, 유엔도 하지 못한 일들을 해 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주의'의 결과물이었다. 또한 그는 지금 미국 국적자이자 한국 서울특별시 명예시민, 중국 영구시민권자, 그리고 북한 평양시민권자이다. 총 4개국의 시민권이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랑주의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해 냈다.

2012년 2월 2일, 미국 백악관이 주최하는 조찬기도회에 연설자로 초청된 김진경 총장은 160여 나라의 대표들 앞에서 '평화에는 대가가 따른다(Peace comes with a Price)'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는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 연설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연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회교권 대표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회교권 대표들은 그 자리에서, 우리가 돈을 낼 테니 우리나라에 와서 중국과 북한에서 세운 것과 같은 국제대학을 세워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진경 총장은 런던에 있는 회교권 유럽 본부 사무실로 초청되어, 회교권 사람들과 사랑과 평화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이 일정한 궤도에 들어서면 아랍권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그의 '사랑주의' 행보가 또 어떤 기적을 창조할지 기대된다.

"남이야 나에게 어떻게 했든 내가 바로 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남북한은 서로를 '네 탓이다' 하기 때문에 주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란 가진 자가 그 대가를 지불할 때만 이루어집니다. 뭔가 다툼이 일어났을 때 가진 자가 먼저 양보해야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왜냐, 가진 자가 물러나는 것은 양보이지만, 없는 자가 물러나는 것은 굴욕이라 느끼기에 물러나기 힘든 것입니다."(314쪽)

"모든 인류에게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원칙은 사랑주의뿐입니다. 내 것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는데 거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주의는 이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철학입니다."(333쪽)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