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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천지분간이 안됐다

[백두산, 고구려유적 답사기②]백두산을 백두산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등록|2013.08.03 17:44 수정|2013.08.04 21:30
 

▲ 힘들여 올라간 백두산 천지. 세찬 비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오문수


백두산과 고구려유적 답사 이틀째다. 지린성 통화시에서 1박한 일행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백두산을 향해 떠났다. 백두산!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고, 한국인들이라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 백두산 아닌가? 중국 동북3성을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여행 중 다른 목적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백두산 천지만 보면 그래도 흡족해 한다는 곳이다.

여행의 성공 여부는 날씨가 크게 좌우한다. 출발지에서 날씨가 좋았다가도 고산지대에서는 날씨가 급변한다. 차에 올라탄 일행 모두가 하늘을 쳐다본다. 찌뿌듯한 하늘. 곧 소나기라도 내릴 것만 같다. 장마철인데 어쩌랴! 그러나 누구도 체념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며 경치를 구경한다.

'통화'는 중국 지린성에 소재한 도시이며 통화지역의 행정중심지다. 일찍부터 다양한 임산물과 인삼으로 잘 알려진 울창한 산림지대인 창바이 산맥 서남쪽에 있으며 훈강이 도시 옆을 지난다.

▲ 10미터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찬 비바람이 몰아친 백두산 등정길 ⓒ 오문수


▲ 엄청나게 비바람이 몰아쳐도 가마꾼들은 태우고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 6만원쯤 든다 ⓒ 오문수


이 지역이 중국에 병합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932년 일본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을 때 철도가 건설되어 만주의 주요철도망뿐만 아니라 북한과도 연결됐다. 이 지역에는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음을 안 일본인들이 중공업기지를 건설할 계획으로 훈강에 발전소를 세웠다.

그래서일까 차창 밖에는 시커먼 석탄 야적장이 많이 눈에 띈다. 석탄 광산이 아닌 곳은 거의 옥수수 밭이다. 차창밖에 비치는 산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조금은 어설픈 모습의 지붕만 빼고는 한국시골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동북3성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얼굴은 우리와 빼닮았다. 작은 키, 펑퍼짐한 얼굴이며 무표정한 모습. 우리의 이웃 모습이다. 2백만 명의 조선족이 사는 곳.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 누가 이들을 중국인과 한국인으로 갈라놓았는가?  남한과 북한은 또 누가 갈라놓았는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자들은 또 누구인가? 가만 생각해 보면 위정자들이 정치적 야욕에서 한 짓이다. 평범한 백성들은 땅 욕심도 없고 그저 배부르며 평화롭게 사는 걸 원한다.

힘이 없어 빼앗긴 백두산과 간도지방

백두산 아래 첫 번째 마을이라는 송강하가 가까워지자 도로 주변에는 달라진 모습이 눈에 띈다. 북부지방 고산지대에서 자란다는 하얀 자작나무가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교통사고가 나 길가에 넘어진 승용차도 보인다. 이제 말로만 듣던 백두산이 가까워졌나 보다.

백두산은 2, 3백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휴화산이라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었다. 삼국이 성립되기 전 읍루, 숙신, 동옥저가 백두산 주변에 살았고 이들은 백두산을 성역으로 섬겼다.

▲ 대피소 옆에 피어난 바위구절초.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 간신히 촬영했다 ⓒ 오문수


1677년(숙종 3)에는 궁정내무대신인 무목납 등 4인이 백두산에 파견되어 실황을 조사한 <장백정존록>을 기록하니 이것이 바로 최초의 백두산 기록으로 추정된다. 1712년(숙종38) 5월 청나라의 제의에 의해 '오라총관', '목극등'과 조선 군관 이의복, 조태상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정계비를 세울 당시는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 높이 2150m의 분수령이었으니 정계비라고 할 수도 없다. 백두산정계비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륵석위기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즉,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

▲ 백두산으로 가는 도중 만난 건설현장. 이 고속도로가 뚫리면 통화시에서 4시간 이상 걸리던 백두산 길이 한시간 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지나친 상업적 개발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동북공정의 일환일까? ⓒ 오문수


토문강과 두만강이 엄연히 다른데도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면서 토문강 일대의 국토를 잃게 되었다. 또 일제는 남만철도의 부설 문제로 청과 흥정해 철도 부설권을 취하는 대가로 한반도의 5~6배에 달하는 간도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줌(1909년 간도협약)으로써 우리의 영토를 잃게 되었다. 백두산정계비는 만주사변 직후 사라졌다.   

백두산을 백두산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서글픔

중국쪽 서파 산문을 통해 백두산 천지로 오르는 길은 등정이 어렵지 않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1442계단을 오르면 천지가 보인다. 백두산! 영험한 산이라서인지 그 진면목을 보이기 싫은가 보다. 바람과 함께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10미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일행 중 누구도 등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꼭 보아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리라.

▲ 백두산의 인기를 반영하듯 비바람에도 수많은 차량이 주차하고 있다. 중국인 방문객이 연간 4백만, 한국인이 12만명 방문한다고 한다 ⓒ 오문수


40분쯤 걸려 정상에 오르니 안개가 잔뜩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중국측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석뿐이다. 비바람이 너무 거세 돌아볼 엄두를 못 내고 디카로 간신히 사진을 찍은 후 비바람을 피할 요량으로 목재데크 밑으로 들어가려는데 중국 군인이 못 들어가게 한다. 그곳에는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고 한다.

언뜻 본 한글 안내 간판에도 "이곳에서는 말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의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의 백두산을 두고 중국쪽 백두산을 바라보는 것도 서러운데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니…. 서글프다. 백두산 천지에는 16개의 봉우리가 있고 중국 측에 6개, 북한 측에 7개가 있으며 나머지 3개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선에 있다.

천지를 둘러싼 산봉우리들은 해발 고도 2500m 이상이고, 수면의 해발고도는 2189m로 세계 화산호 가운데 가장 높다. 동서의 길이는 3.54㎞이고, 남북의 길이는 4.5㎞이며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384m이다. 옛날 책에서는 천지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을 이루고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을 이뤘다고 하지만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장백폭포를 지나 송화강 상류로 흘러간다.

▲ 대협곡 모습. 백두산이 화산 폭발할 때 용암이 흐르던 자리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생긴 커다란 계곡이다. ⓒ 오문수


일행은 천지를 못 본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협곡 구경에 나섰다. 대협곡은 백두산이 화산 폭발을 일으킬 때 용암이 흐르던 자리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씻겨 이뤄진 것이다. 협곡 주위로는 원시림이 장관을 이루고 협곡 바닥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협곡의 크기는 폭이 평균 120미터이고 깊이는 평균 80미터로 길이는 10킬로에 달한다.

다음 코스는 스위스 알프스산처럼 예쁜 들꽃이 널려있다는 왕지. 그런데 하늘이 말린다. 하는 수 없지. 일행은 다음번에 또 한번 올 것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다음 블로그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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