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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배기 여행, 이런 겁니다

[서평] 현명한 여행자를 위한 삐딱한 안내서 <여행정신>

등록|2013.08.05 14:37 수정|2013.08.05 14:37

▲ 길가의 상점들 중 한 집 걸러 하나씩은 하얀 A4용지에 휴가임을 선포하고 문을 닫았다. 매직으로 투박하게 써진 글씨에서 그이들의 소박한 설렘을 읽는다. ⓒ 김병현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무더운 여름, 휴가만큼 청량감을 주는 단어가 또 있을까. 우리는 대개 휴가를 계획하며 꿈을 꾸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휴가를 이용해 훌쩍 떠나는 여행은 바쁜 일상과 숨 막히는 도시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달콤하게 다가온다.

여행이 주는 달콤함의 이유 중 하나는 새로움이다. 여행은 항상 새롭다. 같은 장소라도 다른 시각, 동행한 이들, 여행자의 감정 상태 등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때로는 즉흥적으로도 살아보고, 예상치 못한 일에 황홀해하며, 깜짝 놀라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여행자의 특권이요, 자유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겪는 일들도 각각의 사람들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경험에서 오는 차이다. 예컨대 같은 해수욕장이라도 지독한 바가지를 쓴 기억을 가진 사람은 그곳을 좋지 않은 이미지로 기억할 것이고, 우연한 만남으로 평생의 짝을 만난 이는 그곳을 추억의 장소로 기억할 것이다.

여행은 '자신만의 단어'로 구성된다

장 피레르 나디르와 도미니크 외드는 이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여행 용어 사전인 <여행정신>을 썼다. 부제는 '현명한 여행자를 위한 삐딱한 안내서'다. 너무나 삐딱해서 여행에 대한 당신의 환상을 깨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망마시라. 이들 역시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한 주관적인 책이라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으니.

"아무에게도 길을 물어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을 자유조차 잃게 되리라"라고 어느 현자는 말했다. 계획이 다 세워져 있는데 어떻게 경이에 빠질 수 있겠는가? 코스가 다 짜여 있는데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겠는가? 일정이 다 잡혀 있는데 어떻게 놀랄 수 있겠는가?(본문 9쪽)

▲ <여행정신> 겉표지 ⓒ 김병현


여행 책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낭만적인 단어 해석들도 있다. 프랑스 소설가 외젠 다비의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을 한 쪽밖에 읽지 못한 셈이다'와 위고 베를롬의 '진정한 여행은 어딘가에 가는 행위 그 자체다, 일단 도착하면 여행은 끝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여행 서적에 걸맞은 문구도 배치시켜뒀다. 각각 '세계를 읽다'와 '거꾸로 여행'이란 단어를 해석하며 인용한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수많은 여행관련 서적들과 차별되는 부분은 여행에 관한 실망을 보여주며 쏟아내는 재치에 있다.

표현이나 문체가 아주 익살맞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에코투어리즘'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에코투어리즘(ecotourism)은 생태학(ecology)과 관광(tourism)의 합성어로, 환경에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여행 방식을 뜻한다. 조금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상업성이 끼어들면 퇴색해버린다는 점을 꼬집는다.

우선 '리조트 수영장에서 화학물질로 뒤범벅된 칵테일을 홀짝이며 보름 내내 빈둥대는 휴가는 당신의 취향'이 아니라면, 멀리 떠나기 전에 사소한 몇 가지를 알아둬야 한다며 포문을 연다.

덮개 없는 작은 트럭 짐칸에 서서 몇 시간은 버틸 각오를 해야 한다. 나뭇가지(그리고 여기에 당연히 따라오는 송충이며 뱀)를 피하기 위해 몸을 푹 숙이기도 하고, 정글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지나고, 걸핏하면 나오는 시내며 강을 건너야 할 것이다. (중략) 열정에 찬 이곳의 생산업자는 자기네 농장에서 재배하는 커피 원두가 세계 최고라고 큰소리를 치며 겨우 티백 사이즈 한 봉지에 10유로나 받는다. 하지만 지속 가능하고 환경 친화적인 유기농 커피니 그러려니 해야 한다. 이런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에서 왜 최고의 커피를 맛볼 수 없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본문 109~110쪽)

그 후로도 숙소의 불편함과 문명과 떨어지는 데서 오는 답답함 등을 장황하게 나열한다. 급기야는 워터 봅슬레이를 초음속으로 타고 내려오다 두개골이 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부디 무사히 다녀오길 바란다!"

공항의 수하물 검사를 도박 게임에 비유한 이야기나 리조트를 원주민으로부터 부유한 이들을 가둬놓기 위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공간, 즉 일종의 거꾸로 된 인종차별이라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몇 번을 킥킥댔는지 모르겠다. 

독창적인 '여행사전'을 만들어보자

이런 식의 단어 해석들이 여행일정을 어떻게 구성하게 될까. 저자들의 주관적인 해석에 충실히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는 일련의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편의상 <여행정신>에 나오는 단어들 위주로 구성했다.

'다른 곳에 대한 열망'을 품고 '여행사 직원'을 만나 자연이 고스란히 보전된 '오지'를 갈망하며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여행을 하며 '찰칵찰칵' 사진도 찍고, 현지의 '뷔페'도 맛본다. '버스'를 타고 '해변'을 방문하는 것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는 '크루즈'를 타고 귀국한다.
 
자, 여기까지가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다. 하지만 저자들의 경험을 대입해보면 이렇게 바뀐다. 책의 해석에 충실히 상황들을 풀어보자.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기일 뿐'인 다른 곳을 찾기 위해 여행사로 향한다. 여행사 직원은 '차마 떨쳐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매혹적인 카탈로그를 눈앞에 펼쳐 보여주며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발급해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왼쪽 창문으로 멋진 경치가 펼쳐지는 비행기의 오른편 좌석'에 앉아 '주로 관광지 바깥에 위치하는 곳'을 동경해 유명 관광지로 떠난다. 물론 당신이 관광지 바깥으로 나갈 일은 없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카메라가 당신 대신 경치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한다. 식사는 '영양가는 높은 싸구려 치킨 조각에, 30분은 족히 삶고서 물기도 제대로 빼지 않은 채 내놓은 퉁퉁 불어터진 파스타,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냉동 피자, 형광색의 정체 모를 걸쭉한 디저트'로 때운다. 참,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운전기사가 갑자기 비치타올을 손에 척 걸치고서 20분의 정차를 선언하고 해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라도' 당황하지 말라. 배차 간격이라는 개념이 없는 곳도 있으니.

분명히 '인터넷으로 볼 때는 산호초 호수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결한 해변이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콘크리트로 뒤덮인 하나같이 똑같은 해안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실망은 이르다. 크루즈가 남았다. 이 떠다니는 호텔은 굉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덕분에 '복도와 계단과 갑판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미로'에서 자기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식당이나 스파, 카지노에 가는 법을 익힐 즈음 배에서 내리게 된다. 

뭐, 속뜻은 각자가 해석하더라도 여행이 훨씬 풍성해 보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이 '해설판'도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가시적인 과정의 서술은 같더라도 그 해석만큼은 독창적인 자신만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여행이 진짜 여행 아닐까. 우연과 재난, 불편은 여행의 일부이며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가장 생생한 추억거리를 선사할 것이다. 스페인의 시인 마차도는 이렇게 얘기했다.

"여행자여, 길은 바로 그대의 발자취다."

내 발자취를 왜 남의 발자국에 포개려고만 하는가. 이제 자신만의 여행단어 사전을 편찬해보자. 길을 잃을까 무섭다고? 두려워 말라. 그것 또한 '여행정신'이다.
덧붙이는 글 <여행정신>ㅣ장 피에르 나디르, 도미니크 외드 지음ㅣ이소영 옮김ㅣ 책세상 펴냄ㅣ2013.07ㅣ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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