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전라-충청 3도 청소년, '의병 후예' 되어 걷는다
푸른꿈고교 이태룡 교장 등 마련... 300명 8.15 기념 '의병 답사' 나서
경상·전라·충청도 청소년 300여 명이 '의병길'을 걷는다. '의병길 답사'는 광복절을 기념해 오는 15일 전북 무주에서 열린다.
무주군이 주최하는 이번 의병길 걷기는 올해로 두 번째다. 무주 사람들은 의병(장)들의 유골을 모아 칠연계곡에 칠연 의총을 조성해 놓았는데, 참가들은 이곳에 모여 의병들이 걸었던 길을 걷는다. 왕복 8km 정도다.
이번 의병길 걷기에는 경남 안의고 40여 명, 충북 황간고 40여 명, 경북 지례중·대덕중 40여 명, 전북 무주지역 5개 고교 200여 명이 참석한다.
의병길 답사를 마련한 푸른꿈고등학교 이태룡 교장은 "3도의 의병 후예들이 조상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의병길을 밟아보고, 조상의 얼을 느끼며, 그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의병문학'을 전공한 문학박사인 이태룡 교장은 의병 관련 저서를 여러권 냈다. 다음은 이태룡 교장이 '의병길 답사'에 앞서 보내온 글의 전문이다.
이태룡 교장의 "8․15 광복 기념 '의병길 답사'"
국운이 쇠퇴해 가던 19세기 말, 일제는 우리에게 '개화(開化)', '독립(獨立)'이라는 침략용어로 우리나라를 삼키고자 했다.
1884년 일제는 그들 앞잡이 내각을 세우려고 갑신왜란(甲申倭亂)을 일으켰고, 10년 뒤 일본공사는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침범하여 기어이 그들 앞잡이 내각을 만든 갑오왜란(甲午倭亂)을 일으켰으며, 1895년에는 일본군경과 자객들이 궁궐로 쳐들어와서 왕비를 참살하고 불에 태운 후 후원에 묻어버린 만행이 을미왜란(乙未倭亂)이요, 10년 뒤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채 우리나라에 일제 통감부를 설치하는 강제 조약을 체결했으니 을사왜란(乙巳倭亂)이다.
을미왜란 이후 일제의 만행에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와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더니, 문석봉(文錫鳳)이 충남 유성에서, 평안도 강계에서 김이언(金利彦)·김창수(金昌洙:김구 선생의 본명) 등이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의병을 일으켰고, 이어 배달겨레는 분연히 의병투쟁에 나섰으니 국권회복기 전기의병이다.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 국권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배달겨레는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또다시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니 후기의병이다.
그러나 배달겨레의 의기를 뒷받침할 만한 무기는 겨우 화승총에 불과했으며, 책을 읽던 양반·유생이나 농기구를 만졌던 농민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조직적인 훈련과 신형 무기를 갖춘 일본 군경을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북에서는 국호남·김동신·노병대·문태서·박도경·박춘실·성문길·신명선·신보현·양윤숙·양한규·유종환·이석용·이성화·이장춘·임병주·전성범·정성현·정일국·최산흥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이 목숨을 건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김동신·노병대·문태서·박춘실·성문길·신명선·유종환·이장춘·임병주·전성범·정일국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은 당시 경남의 거창·안의, 경북의 대덕·지례, 전북의 금산·무주·용담·장수, 충청도의 영동·황간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였으니, 덕유산의 수많은 능선과 계곡에서 뜨거운 피를 뿌렸던 것이다.
무주 출신과 인근 지역 출신으로 덕유산 자락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전사·옥사·교수형을 받아 순국한 분이 17명, 7년 이상 15년 징역형과 종신유형을 받은 분이 25명이나 되고,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판결문이 남은 60명 중에 25명은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그 25명 중, 15명이 7년 이상 15년 징역형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무주를 중심으로 한 덕유산 자락 의병은 호남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영남과 호서지방 출신 의병이 많은 것도 큰 특징이었다.
당시 안의·함양과 운봉·장수를 넘나들게 한 고개가 육십령이라면, 거창·무주에는 '지경령'이라는 고개가 있었다. 경남 거창군 고제면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인데, 예로부터 서부경남 지역인 거창·안의에서 경북 대덕·지례·김천·상주 등지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고, 무주를 거쳐 당시 전북이었던 금산과 충북 영동·황간 등지로 오갔던 것이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의병이 무풍장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이 고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한말이라고 하는 국권회복기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의병들이 모여 덕유산 자락으로 몰려들었다. 무주, 용담, 장수, 지례, 대덕, 금산, 영동, 황간, 거창, 안의 등지에서 격렬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역사를 간직한 곳이 바로 덕유산 자락이다.
주요 의병투쟁지를 살펴보면, 경남 거창의 어인동·황산·지경령, 안의의 대황령·우전촌·신평·덕동·월성·영각사, 경북 지례의 임계·갈계·청암사·덕산·평촌·예영동, 충남 금산의 심천리·부북면 등지, 충북 황간의 물한리·원촌리, 영동의 양내면 일대와 이원역, 전북 무주의 무풍장·삼공리·현내리·설천동·철목·한치·안성·칠연계곡·진도리·원통사, 용담의 노채리·작월리·수철리·조림·괴목정, 장수의 장계장·어전·양악동·옥곡·쌍암리·이문성 등 수십 차례가 넘는 수천 명이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일제는 각지에 군대를 파견하고, 헌병대·경찰서(주재소)를 두어 의병살육전을 펼쳤다. 1908년 여름 전북지역에 파견된 수비대란 명칭의 일본군은 991명인데, 덕유산 부근에 배치된 일본군이 583명이고, 헌병대와 경찰을 포함하면 1천명이 넘었다.
그들은 살상거리 200미터 5,6연발총에 기마병까지 운용한데 비해, 의병은 살상거리 20여 미터 화승총과 관청에서 거둬가고 숨겨둔 포수의 엽총 몇 자루에 불과했으니, 의병들은 기습공격 외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의병에 참여하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오늘은 경남 안의고와 충북 황간고, 지례와 대덕중학교 학생, 무주지역 5개 고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고, 경향 각지의 많은 분들이 참여한 것은 당시 3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의병 후예들이 조상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의병길을 밟아보고, 조상의 얼을 느끼며, 그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주군이 주최하는 이번 의병길 걷기는 올해로 두 번째다. 무주 사람들은 의병(장)들의 유골을 모아 칠연계곡에 칠연 의총을 조성해 놓았는데, 참가들은 이곳에 모여 의병들이 걸었던 길을 걷는다. 왕복 8km 정도다.
이번 의병길 걷기에는 경남 안의고 40여 명, 충북 황간고 40여 명, 경북 지례중·대덕중 40여 명, 전북 무주지역 5개 고교 200여 명이 참석한다.
의병길 답사를 마련한 푸른꿈고등학교 이태룡 교장은 "3도의 의병 후예들이 조상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의병길을 밟아보고, 조상의 얼을 느끼며, 그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의병문학'을 전공한 문학박사인 이태룡 교장은 의병 관련 저서를 여러권 냈다. 다음은 이태룡 교장이 '의병길 답사'에 앞서 보내온 글의 전문이다.
이태룡 교장의 "8․15 광복 기념 '의병길 답사'"
▲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청소년 300여명이 오는 15일 전북 무주 칠연계곡 소재 '칠연의총'에 모여 왕복 8km를 걷는 '의병길 답사' 행사를 벌인다. 위 사진은 광주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호남의병장 모습이고, 아래는 전북 장수 계북면 양악리에 있는 문태서.박춘실 의병장 전적비. ⓒ 이태룡(자료사진)
1884년 일제는 그들 앞잡이 내각을 세우려고 갑신왜란(甲申倭亂)을 일으켰고, 10년 뒤 일본공사는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침범하여 기어이 그들 앞잡이 내각을 만든 갑오왜란(甲午倭亂)을 일으켰으며, 1895년에는 일본군경과 자객들이 궁궐로 쳐들어와서 왕비를 참살하고 불에 태운 후 후원에 묻어버린 만행이 을미왜란(乙未倭亂)이요, 10년 뒤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채 우리나라에 일제 통감부를 설치하는 강제 조약을 체결했으니 을사왜란(乙巳倭亂)이다.
을미왜란 이후 일제의 만행에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와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더니, 문석봉(文錫鳳)이 충남 유성에서, 평안도 강계에서 김이언(金利彦)·김창수(金昌洙:김구 선생의 본명) 등이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의병을 일으켰고, 이어 배달겨레는 분연히 의병투쟁에 나섰으니 국권회복기 전기의병이다.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 국권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배달겨레는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또다시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니 후기의병이다.
그러나 배달겨레의 의기를 뒷받침할 만한 무기는 겨우 화승총에 불과했으며, 책을 읽던 양반·유생이나 농기구를 만졌던 농민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조직적인 훈련과 신형 무기를 갖춘 일본 군경을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북에서는 국호남·김동신·노병대·문태서·박도경·박춘실·성문길·신명선·신보현·양윤숙·양한규·유종환·이석용·이성화·이장춘·임병주·전성범·정성현·정일국·최산흥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이 목숨을 건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김동신·노병대·문태서·박춘실·성문길·신명선·유종환·이장춘·임병주·전성범·정일국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은 당시 경남의 거창·안의, 경북의 대덕·지례, 전북의 금산·무주·용담·장수, 충청도의 영동·황간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였으니, 덕유산의 수많은 능선과 계곡에서 뜨거운 피를 뿌렸던 것이다.
무주 출신과 인근 지역 출신으로 덕유산 자락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전사·옥사·교수형을 받아 순국한 분이 17명, 7년 이상 15년 징역형과 종신유형을 받은 분이 25명이나 되고,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판결문이 남은 60명 중에 25명은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그 25명 중, 15명이 7년 이상 15년 징역형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무주를 중심으로 한 덕유산 자락 의병은 호남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영남과 호서지방 출신 의병이 많은 것도 큰 특징이었다.
당시 안의·함양과 운봉·장수를 넘나들게 한 고개가 육십령이라면, 거창·무주에는 '지경령'이라는 고개가 있었다. 경남 거창군 고제면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인데, 예로부터 서부경남 지역인 거창·안의에서 경북 대덕·지례·김천·상주 등지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고, 무주를 거쳐 당시 전북이었던 금산과 충북 영동·황간 등지로 오갔던 것이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의병이 무풍장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이 고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한말이라고 하는 국권회복기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의병들이 모여 덕유산 자락으로 몰려들었다. 무주, 용담, 장수, 지례, 대덕, 금산, 영동, 황간, 거창, 안의 등지에서 격렬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역사를 간직한 곳이 바로 덕유산 자락이다.
주요 의병투쟁지를 살펴보면, 경남 거창의 어인동·황산·지경령, 안의의 대황령·우전촌·신평·덕동·월성·영각사, 경북 지례의 임계·갈계·청암사·덕산·평촌·예영동, 충남 금산의 심천리·부북면 등지, 충북 황간의 물한리·원촌리, 영동의 양내면 일대와 이원역, 전북 무주의 무풍장·삼공리·현내리·설천동·철목·한치·안성·칠연계곡·진도리·원통사, 용담의 노채리·작월리·수철리·조림·괴목정, 장수의 장계장·어전·양악동·옥곡·쌍암리·이문성 등 수십 차례가 넘는 수천 명이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일제는 각지에 군대를 파견하고, 헌병대·경찰서(주재소)를 두어 의병살육전을 펼쳤다. 1908년 여름 전북지역에 파견된 수비대란 명칭의 일본군은 991명인데, 덕유산 부근에 배치된 일본군이 583명이고, 헌병대와 경찰을 포함하면 1천명이 넘었다.
그들은 살상거리 200미터 5,6연발총에 기마병까지 운용한데 비해, 의병은 살상거리 20여 미터 화승총과 관청에서 거둬가고 숨겨둔 포수의 엽총 몇 자루에 불과했으니, 의병들은 기습공격 외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의병에 참여하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오늘은 경남 안의고와 충북 황간고, 지례와 대덕중학교 학생, 무주지역 5개 고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고, 경향 각지의 많은 분들이 참여한 것은 당시 3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의병 후예들이 조상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의병길을 밟아보고, 조상의 얼을 느끼며, 그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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