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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구곡가'의 원조, 여기 있었네

[복건성 문화유산 이야기①] 중국과 복건성의 세계유산

등록|2013.08.16 11:06 수정|2013.08.16 11:25
중국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몇 군데나 있나?

▲ 둔황 막고굴 ⓒ 이상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는 어디일까? 이탈리아다. 모두 49개다. 그럼 두 번째는? 중국으로 모두 45개 세계유산이 등재되어 있다. 세 번째는 스페인으로 모두 44개의 세계유산이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조만간 중국의 세계유산 수가 가장 많아질 것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는 잠정 목록에 가장 많은 48개가 올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마다 그 중 한두 개가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있다.

그럼 중국은 언제부터 세계유산 등재에 관심을 가졌을까? 유네스코에서 처음 세계유산을 등재하게 된 것은 1978년이다. 당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등 12개 대상물이 처음으로 세계유산이 되었다. 중국은 9년이 지난 1987년에 처음 세계유산 등재를 시작했다. 당시에 등재된 중국의 세계유산은 모두 6군데였다. 자금성, 진시황 병마용갱, 둔황의 막고굴, 태산, 주구점의 북경원인 유적, 만리장성이다. 이들은 중국의 중석기시대부터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때까지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 천산 천지 ⓒ 이상기


그 후 지속적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고, 2013년에도 중국은 두 개의 세계유산을 등재했다. 그 중 하나가 운남성(雲南省) 홍하(紅河) 지역에 사는 하니족(哈尼族)이 조성한 계단식 논이다. 하니족은 1300년 이상 아일라오(哀牢) 산맥의 경사면에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또 다른 하나가 신장성(新疆省)의 천산(天山)이다. 천산 중에서도 토무르(Tomur 托木爾峰: 7443m), 칼라준-쿠에르데닝(Kalajun-Kuerdening 喀拉峻-庫爾德寧), 바인부쿠케(Bayinbukuke), 복다(Bogda 博格達山) 지역을 말한다. 이 중 복다산 아래 천산 천지(天池)는 현재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명 관광지다.

이번 여행도 중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기 위해 계획되었다. 그동안 나는 중국의 중북부에 있는 문화유산만 찾아다녔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부 복건성(福建省)의 문화유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것은 거대한 중국 땅에서 남부와 북부의 문화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남부는 비교적 따뜻하고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해 논농사를 짓는 반면, 북부는 산이 많고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밭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심성도 남부가 온화한 반면, 북부는 강인한 편이다. 온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화를 알기 위해 이번에 복건 토루(福建 土樓)와 무이산(武夷山)을 집중적으로 보기로 했다.
 
복건성 토루 이야기

▲ 영정현 고북촌에 있는 토루의 왕 승계루 내부 ⓒ 이상기


복건성에 있는 토루는 2008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것은 토루가 '두드러진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치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하고 방어용 건물로 활용할 수 있는 흙집으로 700년 이상의 문화전통을 보여준다. 토루는 13세기에 처음 지어지기 시작해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둘째 독특하고 매력적인 대형 건축물로, 공동체 생활과 외적 방어라는 경제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다.

셋째 공동체적 삶의 양상을 보여주는 건축으로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진다. 토루 주변에는 반드시 산과 하천이 있고 농토가 있다. 토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차와 담배를 재배했다. 벼농사는 먹고 살기 위한 것이고, 차와 담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아침 일찍 찻잎을 따고 오전에는 담뱃잎을 땄다. 오후에는 찻잎을 말리거나 덖기도 하고, 담배 조리를 하거나 담배를 말기도 했다. 토루는 대개 복건성의 서남쪽 장주시(漳州市) 남정현(南靖縣)과 용암시(龍岩市) 영정현(永定縣)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 토루의 왕자 진성루 ⓒ 이상기


토루가 생기게 된 계기는 12세기 금나라에 의한 송나라 침입이다. 정강(靖康)의 변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남송이 멸망하고, 1127년 임안(臨安 : 현재 杭州)를 수도로 한 남송(1127~1279)이 성립되었다. 이때 북쪽 지방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강서성, 복건성, 광동성 등 남쪽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남쪽 사람들은 객가(客家)라 불렀다. 객가 중 상당수가 복건성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양식의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객가 토루다. 객가 토루가 나중에 복건 토루로 그 명칭이 통일되었다.

토루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집성촌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하나의 성씨를 가진 가족공동체가 원형 또는 방형의 건축물에 살면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그리고 14세기 말부터 17세기 사이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토루가 지금처럼 대형으로 지어진 것은 17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다.

토루는 대개 3층에서 6층 높이로 지어졌으며, 최대 800명까지 거주할 수 있었다. 이 경우 1층이 부엌과 주방, 2층이 창고, 3~6층이 거실과 침실 등 생활공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젊은이들이 토루를 떠나면서 폐허로 변하는 토루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이산 풍경명승구는 어떤 곳인가?

▲ 무이산 은병봉을 오르는 사람들 아래로 구곡계 뗏목이 보인다. ⓒ 이상기


무이산은 복건성 북부에 있는 높지 않은 산이다. 최고봉인 삼앙봉(三仰峰)이 해발 717.7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이 유명해진 것은 중국 유학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주자 때문이다. 주자는 이곳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고, 그 사상이 명나라 때까지 중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사실 주자학은 우리나라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려말에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조선시대 내내 사상의 흐름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무이산에서 이처럼 대단한 인문학적인 유산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산수 때문이다. 무이산은 구곡계, 무이궁과 대왕봉, 운와와 천유봉, 호소암-일선천, 수렴동-대홍포, 우림정-연화봉이라는 여섯 개의 뛰어난 경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을 풍경명승구라고 부른다. 이 무이산을 옛날 사람들을 3의 배수로 설명하기도 했다. 3곡이 세 개여서 구곡이 되었고, 여섯 개 경관마다 6개 기이한 봉우리가 있어 36봉을 이루고 있다. 무이산 사이사이 72개 동네가 있고, 봉우리와 쌍을 이뤄 99개 바위가 있다.

▲ 구곡계 중 제2곡 옥녀봉을 지나는 뗏목(竹筏) ⓒ 이상기


무이산은 역사적인 문화유산, 뛰어난 경관, 생물 다양성을 인정받아 1999년 유네스코 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무이산은 위에서 언급한 풍경명승구(7000ha)에 세 가지 유산이 더해진다.

첫째가 서쪽에 있는 무이산 자연보호구역(5만6527ha)이다. 둘째가 한 가운데 있는 구곡계 생태보호구역(3만6400ha)이다. 셋째가 동남쪽에 있는 민월왕성 유지(闽越王城遗址 : 48ha)다. 공식 명칭은 성촌 한성유지(城村汉城遗址)로 한나라 시대 이 지역을 다스리던 민월왕의 궁성 터를 말한다. 이들 네 가지를 합치면 세계유산 무이산의 면적이 9만9975ha에 이른다.    

<무이구곡가>를 모르면 유학자가 아니지

세계유산 무이산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풍경명승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구곡계(九曲溪)와 천유봉(天游峰)이다. 구곡계는 계류가 아홉 번 굽이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아홉 번을 굽이치는 동안 서른여섯 개 봉우리와 아흔아홉 개 바위를 볼 수 있다. 이들 암봉이 모두 일품으로, 이곳을 따라 가며 뱃놀이를 하면 최고의 풍류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무이산 구곡계를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류라고 부른다.

▲ 제1곡에 새겨진 각자 ⓒ 이상기


구곡계는 주자가 이곳에 살며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어 더 유명해졌다. 이 시가의 정확한 명칭은 <구곡도가(九曲棹歌)>다. 구곡에 배를 띄우고 호탕하게 부르는 노래(九曲蕩舟之歌)라는 뜻이다. 구곡에 들기 전 그는 다음과 같이 서곡(序曲)을 지어 불렀다.

무이산 꼭대기에 신선이 살고 있어               武夷山上有仙靈
산 아래 시원한 물줄기 굽이굽이 맑고 맑다.   山下寒流曲曲淸
그 가운데 기막힌 절경을 알고 싶거든           欲識箇中奇絶處
뱃노래 두세 곡을 한가히 들어보세.              棹歌閑聽兩三聲

원래 구곡가는 하류인 1곡으로부터 상류인 9곡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다. 1곡에서 만학천봉을 만나고, 2곡에서 우뚝 솟은 옥녀봉을 만난다. 3곡과 4곡에서는 대장봉이 웅장하다. 4곡과 5곡 사이에는 근래 놓인 다리 오곡대교(五曲大橋)가 있다. 5곡에는 천주봉이 있고, 6곡에는 깎아지른 은병봉이 있다. 은병봉 너머로는 천유봉이 있다. 7곡에는 북랑암이 있고, 8곡에는 쌍유봉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곡에는 청개구리 바위인 청와석이 있다.

▲ 무이정사 ⓒ 이상기


이 무이구곡과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모방해 조선의 유학자들은 산천경개 좋은 곳으로 들어가 정사를 짓고 구곡가를 지었다. 율곡 이이가 해주 석담(石潭)에 은거하며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이후 대한민국의 명승지에는 구곡가가 줄줄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강 정구는 성주와 김천으로 이어지는 대가천의 아름다움을 <무흘구곡가>로 읊었다.

우암 송시열은 청천 화양동에 암서재를 짓고 은거하며 화양구곡을 즐겼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화양구곡가>를 지었다. 옥소 권섭은 <황강구곡가>와 <화지구곡가>를 지었다.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무이산과 <무이구곡가>를 풍류와 시가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래선지 구곡을 노래한 시가 문장 좀 한다는 유학자들이 즐기는 풍류문학의 상징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8월 7일부터 12일까지 중국 복건성으로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왔다. 복건성의 대표적인 세계유산 복건 토루와 무이산을 보기 위해서다. 이들은 중국 납방의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토루는 건축학의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고, 무이산은 인문학적 측면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다. 복건 토루와 무이산이 가지는 세계유산적 의미와 가치를 12회 정도 기사로 연재할 예정이다. 이번 여행에서 교통편은 인천에서 하문까지 그리고 하문에서 무이산까지 비행기를 이용했다. 인천에서 하문까지는 2시간 50분이 걸리고, 하문에서 무이산까지는 40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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