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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한국전쟁 때 '원자탄 카드' 접은 이유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46) #13. 거제포로수용소 ①

등록|2013.09.17 09:45 수정|2013.09.17 15:11
중국 한국전쟁 개입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뒤, 10월 1일에는 38선을 돌파했다. 이들은 인민군의 남하보다 더 빠르게 북진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고, 10월 17일에는 함흥과 흥남,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10월 26일에는 국군 제6사단이 압록강 초산에 이르는 등 그해 10월 말에는 유엔군 측이 북한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유엔군의 빠른 북상은 결과적으로 인민군의 남하와 똑같은 시행착오를 낳았다.

▲ 국군의 평양 입성(1950. 10. 25.). ⓒ NARA, 눈빛출판사


그 무렵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미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자신감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추수감사절인 11월 23일까지 북한군의 저항을 잠재울 것입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물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치 않겠는가?"
"우리는 중국군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공군이 없습니다. 만약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다면 대량 살육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대단히 거만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맥아더의 장담은 빗나갔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웨이크 회합이 있은 지 열흘 만에 중국군 1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대규모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그때부터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실 중국은 한국전쟁 개전 이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하자 미국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들은 10월 9일 북경방송을 통해 한국전쟁 개입을 은연 중에 시사했다. 

"미군의 38선 돌파는 중국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 중국 인민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에 맞서게 됨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공격명령을 내리고 있다(1950. 9. 15.). ⓒ 맥아더기념관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외면한 채 계속 북진을 감행했다. 그러자 중국은 자국의 국방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마침내 항미원조(抗米援朝·미국에 대항하며 조선을 원조함)지원군을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미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10월 하순에 이뤄졌다.

미국은 첫 전투에서 생포한 중국군 포로를 통해 중국의 참전을 확인됐지만, 이를 사실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은 종이호랑이 중국이 감히 세계 최강인 자기네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으로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중국을 형편없이 얕보며 설사 중국이 참전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자 최후의 대공세로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준비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은 11월 초 한만국경 폭격으로 시작했다. 미군 폭격기는 2주 동안 북한 대부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1950년 11월 8일 한만국경 신의주 일대는 미 B-29 폭격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 파괴되었다. 그러자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했다. 드디어 11월 하순, 맥아더는 유엔군 총병력 42만 명에게 크리스마스 총공격을 명령했다.

"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다.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그대들은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 11월 25일부터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은 당초 자신만만했으나 복병 중국군의 고전적인 공세와 벼랑 끝 전술로 나온 인민군의 반격에 몹시 당황했다.

중국군은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뜻밖의 장소에서 밤낮으로 북과 꽹과리를 치고 나발을 불며 불쑥불쑥 나타나는 고전적인 전법을 썼다. 이에 유엔군은 제대로 대항치도 못하고 허둥지둥 퇴각하기 바빴다. 유엔군은 특히 중국군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야간 공격을 할 때는 혼비백산 공포감으로 밤새 벌벌 떨었다.

중국군은 "적군이 진격하면 아군은 후퇴하고(敵進我退), 적군이 근거지를 마련하면 아군은 어수선하게 하며(敵據我擾), 적군이 피로하면 아군은 공격하고(敵疲我攻), 적군이 달아나면 아군은 추적한다(敵退我追)'는 마오쩌둥의 16자 전법을 교범으로 삼았다. 유엔군 측은 중국 전통의 전법에 그만 정신을 잃었다. 또한 끊임없는 중국군의 파상공세로 유엔군 측은 아주 질려버렸다.

게다가 날씨조차도 유엔군 편이 아니었다. 유엔군은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북부지방의 강추위가 적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다. 이런 혹한 속에 유엔군은 2주일 동안 약 250킬로미터나 계속 후퇴했다.

중국인민해방군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이 나발을 불며 고전적인 전법으로 유엔군 진지를 향해 돌격하고 있다(강원도 횡성전투, 1951.). ⓒ 중국해방군화보, 눈빛출판사


맥아더 해임

한국전쟁 전세는 또다시 대역전이었다. 인민군에게 중국 인민해방군(아래 중국군)의 참전은 천군만마와 같은 원군이었다. 중국군의 참전에 힘입은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 일로에서 단박에 일대 공세로 전환했다.

1950년 11월 말, 인민군과 중국군 연합인 공산군은 청천강과 장진호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12월 6일에는 평양을 탈환했다. 12월 25일에는 공산군이 38선 이북의 거의 전 지역을 다시 장악해 오만불손한 맥아더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 공산군은 12월 31일 밤 전 전선에서 다시 38선을 돌파한 뒤 남하했다. 이어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고, 1월 중순에는 37도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총공세가 참패로 돌아가자 몹시 경악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패배를 당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비장의 카드를 뺐다. 그는 기자 회견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원자탄 사용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의 국제전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전 세계 여론은 들끓었다. 대부분 나라가 미국의 원자탄 사용계획을 비판할 뿐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조차도 반대 여론이 높아갔다.

미국 다음으로 한국전에 많은 지상군을 파견한 영국도 원자탄 사용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마침내 미국은 세계적인 반대 여론과 그 무렵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정보에 그만 한국전에서 원자탄 사용 카드를 접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군의 제3차 공세로 37도선까지 후퇴를 거듭했던 유엔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는 대반격의 작전을 펼쳤다. 1951년 3월 18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했고, 3월 23일에는 38선 이남을 다시 장악했다. 그때부터 미국 내 여론은 확전보다 전쟁을 제한하는 기류로 흘러갔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전격 해임은 이러한 미국의 분위기를 대변한 조치였다.

▲ 맥아더가 퇴역식을 마친 뒤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걸어가고 있다(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 1951. 4. 16,). ⓒ 맥아더기념관


거대한 천막의 섬

1950년 11월부터 유엔군은 거제도 고현, 수월지구 등지에 거제포로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대부분 포로들이 지었다. 먼저 거제도에 도착한 포로들은 수용소 울타리 철조망 설치작업부터 했다.

그런 다음 불도저로 부지 정지작업을 한 뒤 감시 망루를 설치했다. 포로들은 정지작업을 한 부지에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천막을 쳤다. 잠깐 새 거제도는 온통 천막으로 뒤덮인 섬이 되었다. 초기 막사는 천막뿐이었으나, 곧 흙벽돌 등 반영구적 막사들도 들어섰다.

유엔군은 거제포로수용소를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4개 구역과 28개 동(棟)으로 배치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7, 8, 9구역으로 배열하였으며, 1개 단위 구역에는 6000명을 수용할 수 있게 터를 잡았다.

유엔군은 부산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거제포로수용소 공사와 함께 점차로 이송시키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말에는 부산포로수용소의 5만여 명이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3월 1일에는 행정본부, 나머지 부속기관과 잔류 인원도 이송하기 시작하여 그해 6월 말에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는 14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때부터 부산포로수용소는 거제포로수용소의 보조 기능을 담당했다. 유엔군은 전투지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일단 부산포로수용소에 모은 뒤 분류해 거제도로 보냈다. 유엔군은 포로수용소 이전 작전은 성공했을지언정 포로 관리에는 치밀치 못하여 역대 포로수용소장들은 숱한 곤혹을 치러야 했다.

거제포로수용소가 문을 열자 친공 포로들은 부산포로수용소와는 달리 곧장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안은 미군도, 한국군도 들어가지 못하는 무법천지로 변했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내에서 살육전이 벌어졌다.

친공 포로들은 수용소 내 주도권을 확실히 잡고자 반공 포로들에게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친공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서 인민재판까지 열렸다. 또한 수용소 내에 인공기가 게양되고, 적기가가 울러 퍼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유엔군 측은 이러한 사태를 반전시키고자 포로수용소에 반공청년단을 들여보냈다. 그러자 포로수용소 내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된 바, 해방동맹의 친공포로와 반공청년단의 반공포로가 그들이었다. 이들 두 세력은 팽팽히 맞서면서 수용소 내에 인공기와 태극기가 밤낮으로 바꿔 게양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연일 포로수용소 철조망 안에서 두 세력 간 전선을 방불케 하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친공 포로들은 드럼통을 잘라 만든 칼로 반공 포로를 살해한 뒤 시체의 각을 떠 맨홀이나 변소에 집어넣는 야만적인 살육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에 맞선 반공 포로들의 친공 포로에 대한 반격도 막상막하였다.

▲ 중국군 참전으로 후퇴하는 유엔군들, 강추위 속에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 길에 길에서 자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많이 동사했다. 추위는 적군보다 더 무서웠다.(1950. 12.) ⓒ NARA, 눈빛출판사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맥아더기념관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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