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순희 흔적 찾아서 구미까지 왔지만...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50) #14. 구미 ①

등록|2013.09.24 14:20 수정|2013.09.24 14:20

▲ 강추위 속에 끝없이 이어진 1.4 후퇴 피난행렬, 피난민들이 봇짐을 지고 서울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1951. 1.). ⓒ NARA, 눈빛출판사


[제2부를 시작하면서]

이번 50회부터는 <어떤 약속> 제2부다. 그동안 제1부 첫 회부터 그때그때 빠짐없이 읽어주신 많은 애독자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혹 중간에서 읽으시거나 이제부터 읽는 분을 위하여 제2부 시작에 앞서 그동안 연재된 제1부 줄거리를 간단히 들려드린다.

 이 작품의 화자인 박상민은 작가로 2007년 2월 하순, 미국 워싱턴 근교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검색하였다. 그런 가운데 한 인민군 포로가 미군 포로신문관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그 포로가 매우 어린데 놀랐다. 그 순간 문득 어린 시절 자기 고향마을에 흘러온 인민군 포로 김준기 아저씨가 떠올랐다.

이 작품의 남 주인공 김준기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평북 영변군 용산면 용문중학교 학생으로 조선인민군에 입대한다. 여 주인공 최순희는 서울 적십자간호학교 학생으로, 인민군 서울 입성 후 의용군에 입대한다. 이들은 낙동강 다부동전선에서 위생병 사수 조수로 만난다. 1950년 8월 하순부터 유엔군 총공세로 날마다 다부동 유학산 일대에 쏟아 붓는 미군 B-29 폭격기의 폭탄 세례를 견디지 못해 최순희는 김준기를 꼬드겨  한밤중 두 사람은 전선을 탈출하여 낙동강을 건넌다.

이들은 한 민간 집 행랑채에서 몸을 피하면서 서로 정을 통한다. 최순희는 탈출 도중 이별을 대비하여 김준기에게 전쟁이 끝난 뒤 8월 15일 낮 12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이후 탈출 도중 김준기는 유엔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로 가게 된다.

그는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휴전을 앞두고 남이냐, 북이냐를 결정 순간에 고향의 어머니냐 서울의 순희냐의 선택에 몹시 갈등을 느끼다가 포로송환을 묻는 기표소에서 먼저 떠오른 얼굴에 따라 'S'(South, 남)와 'N(North, 북)'을 택하기로 작정한다. 준기는 마침내 'S'쓰고 반공포로로 남녘에 남는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김준기는 천만 뜻밖에도 헌병들의 안내를 받으며 수용소 철조망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준기는 그렇게 그리던 바깥세상에 나왔건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준기의 실망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래도 준기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최순희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는 포로 석방 일주일 뒤 국군에 입대한다. 군 복무 중에도 약속한 날 대한문에 갔으나 끝내 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준기는 강원도 화천의 한 국군부대 의무실에서 복무한 뒤 제대하고는 곧장 순희를 찾아나선다.

[제2부]

#14. 구미

형곡동

구미사람들은 '형곡동(荊谷洞)'을 '사창' 또는 '시무실'이라 불렸다. 사창이란 별칭의 유래는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을 저장해 두던 곳집 '사창(社倉)'이 이곳 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시무실이란 '가시골'의 변형된 말로,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가시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다.

1950년대 경북 선산군 구미면 형곡동은 일백 호 안팎의 꽤 큰 마을이었다. 그 무렵 이 마을도 다른 예사마을처럼 이른 봄이면 양식이 떨어지는 집이 많았다. 그럴 때면 이 마을 아낙네들은 금오산에서 산나물 푸성귀를 뜯어다가 알곡 반, 나물 반의 나물밥이나 국수, 수제비, 범벅 등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그 시절 봄이면 대부분 구미 일대 사람들은 몇 날 며칠 굶주려 피부가 누렇게 붓는 부황에 시달렸다.

1956년 8월 하순 어느 날, 저물 무렵 낯선 사내가 형곡동 인동댁 집 앞을 기웃거렸다. 그 시절은 전쟁 여파로 거지들이 많았다. 하지만 낯선 사내는 행색이나 행동거지로 보아 거지는 아니었다. 낯선 사내는 대문 앞에서 집안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누군교(누굽니까)?"
"아, 예. 디나가는 사람입네다."
"근데, 왜 남의 집안을 그렇게 기웃거리시오?"
"아, 디난 육니오(6·25) 때 내레 이 집에 잠시 머물고 간 적이 있어 기럽네다."

그때 집안에서 30대 후반의 한 사내가 대문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어무이(어머니), 뭔 일입니까?"
"저 사람이 지난 육이오 난리 때 우리 집에 잠깐 머물고 간 적이 있다 카네."

주인 사내는 구미 장터마을에서 가축병원을 개업한 수의사 김교문이었다. 그는 낯선 사내에게 물었다.

▲ 남과 북을 마다하고 끝내 중립국으로 가는 북한군 포로들(1954. 1. 20.). ⓒ NARA, 눈빛출판사


낯선 방문객

"어디서 온 누구시오?"
"강원도 화천에서 온 김준기입네다."
"나도 김가요. 근데 말씨는 강원도 사람이 아닌데?"
"내레 군대생활을 강원도 화천에서 했디요. 원래 고향은 펭안도 넹벤입네다."

"아, 네. 그런데 우째 우리 집에 머물다 갔소?"
"내레 기때 인민군으로 다부동 유학산까지 내려왔다가 미군 쌕쌕이 때문에 견딜 수 없어 한밤둥에 낙동강을 건넸디요. 기러고는 이 집에 와 옷을 갈아입고 한낮이라 행랑채에서 잠시 몸을 피해 가시우(갔습니다)."
"아, 네. 우리 가족도 모르는, 그런 일이 있었구먼요."

곁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인동 댁이 아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내 본께로 마이 시장해 보인다. 행랑채로 모시다가 저녁이나 대접해 보내라."
"네, 그라지요."

김교문이 앞장서 김준기를 행랑채로 안내하며 말했다.

"우쨌든(어쨌든) 김씨는 우리 집과 인연이 있소. 행랑채에서 나랑 저녁을 먹으면서 남은 얘기나 마저 들려주이소."
"저넉까지나…."
"먼 데서 일부러 우리 집을 찾아왔고, 곧 끼니 때인데 요기는 하고 가셔야지요."
"아무튼 고맙습네다."

▲ 서울시민들이 덕수궁에서 정전회담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열고 있다(1953. 6. 16.). ⓒ NARA, 눈빛출판사


행랑채

김준기는 김교문이 안내한 행랑채로 들어갔다. 준기는 방안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행랑채의 떨어졌던 방문은 그새 새로 달려 있었고, 찢어진 창호지만 메워졌을 뿐 6년 전 순희와 하루 낮을 보낸 그대로였다. 김교문이 안채에서 밥상을 들고 오는데 행주치마를 입은 부인 장숙자가 따라왔다.

"손님, 찬은 없어도 맛있게 드이소. 국시(국수)입니데이. 여기 구미사람들은 국시에 날콩가루를 넣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예. 우리 어무이 말을 들으니 육이오 때 우리 집에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카던데 그때 벗은 옷을 안방 다락에 두고 갔지예?"
"기랬습네다."
"내가 피난에서 돌아와 다락을 치우다가 인민군복이 나와서 얼매나 놀랬는지예."
"아딕도 기때 일을 잘 외우구 계십네다."
"그때 하도 놀래 지금도 안 잊어뿌리지예. 근데 군복이 두 벌이나 나오던데예?"
"맞습네다. 나 말구 한 너자(여자)두 이 집에서 머물었디요. 장농(장롱)에서 옷도 꺼내 입었고요. 그런 뒤 우리가 입은 군복을 벗어 다락에 던뎠수다."

"아, 그랬구먼요."
"아무튼 죄송합네다."
"난리 때라 그랬겠지요."
"기러긴 해두…. 사실은 내레 그 너자를 찾으러 요기에 왔습네다. 난리 둥에 항께(함께) 도망가면서 추풍넝 어드메에서 서로 헤어뎃디요(헤어졌지요)."
"아, 네. 그럼 시장하실 텐데 어이(어서) 저녁이나 드이소."
"고맙습네다."

부인 장숙자는 총총걸음으로 안채로 돌아갔다. 준기는 처음 먹어보는 경상도 국시였다. 국수가 구수한 게 맛이 좋았다.

"우리 마을은 하루 세끼 밥 먹는 집은 없습니다. 하루 한두 끼는 나물 죽 아니면 국시나 호박범벅이지요.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형편이 좀 나아도 그렇습니다."
"내레 고향 넹벤도 마찬가지디요. 거기선 감자나 옥수수를 많이 먹습네다."

▲ 정전회담 정식체결에 앞서 부상포로 교환 합의가 먼저 이루어져 그들을 송환코자 거제도에서 수송한 부상인민군을 앰블런스에 옮겨 싣고 있다(1953. 4. 21.). ⓒ NARA, 눈빛출판사


"없다카네요"

▲ 금오산 채미정 경모각에 안치된 야은 길재 선생상 ⓒ 박도

"우리 마을은 모두 없이 살아도 글 하나는 어느 마을에 안 빠질 겁니다. 원래 이 고장 선산은 학문과 충절의 고장이지요. 저 금오산에서 야은(冶隱, 본명 길재) 선생이 공부했지요. 바로 그 어른이 영남학파를 세웠답니다."
"아, 네. 기런 곳인 탓인지 인심이 돟더군요. 기때 이 집을 떠나 금오산 아홉산골짜기에서 한 보름을 더 피난한 뒤 떠났디요."

"아, 그래요. 근데 여긴 웬 일로 또 왔습니까?"
"기때 이 집에 같이 와 옷을 갈아입구 바로 이 행랑채에서 잠시 항께 머물고 갔던 거(그) 사람을 찾을라구 왔습네다. 혹시 스무 서넛 살 되는 서울 말씨를 쓰는 너자가 이 집을 찾아온 적은 없었습네까?"

"나는 못 봤습니다. 내 집사람하고 어무이한테 한번 물어보지요."
"사실은 전쟁이 끝나면 거 너자와 8월 15일 낮 12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디요. 기런데 거 너자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이렇게 찾아다닙네다. 지난 메칠 동안 서울에서 찾아 헤매다 종적을 알 수 없어 혹시나 이곳에 들러 간 적이 있나하여 헛걸음삼아 왔습네다."

"아, 네.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구먼요. 그래서 아까 우리 집안을 기웃거렸구…."
"기러습네다."
"내 상을 물리면서 안채에 가 물어보지요."
"고맙습네다."

김교문은 밥상을 들고 안채에 간 뒤 잠시 뒤 행랑채로 왔다.

"그런 젊은 여자는 찾아온 적은 없다카네요. 이 마을에 이따금씩 경남 남해에서 며루치(멸치) 장수나 전남 담양이나 곡성 쪽에서 대소쿠리 장수들이 찾아오는데, 그 여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과수(寡守, 과부)들입니다."
"아, 예."

그 말에 준기는 실망하는 빛이 아주 역력했다.

▲ 북으로 돌아가는 포로들이 판문점 일대에서 유엔군이 지급한 옷을 벗어 길에다 버리고 있다(1953. 8. 21.). ⓒ 눈빛출판사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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