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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부활 꾀하는 북한, 그 속내는 무엇인가

최고지도자 변화 과정에 나타난 새로운 양상... 시스템 택할 수밖에 없었을 듯

등록|2013.08.29 14:51 수정|2013.08.29 15:58
수령 중심의 유일지배체제를 구축했던 북한에서 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전형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뇌졸중과 2009년 1월 김정은 후계자 내정, 2011년 12월 김 위원장 사망으로 이어지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이다.

항일투쟁을 정통성의 근거로 하는 김일성 주석이나 1970년대 초반부터 후계자로 내정돼 20년간 후계자 수업을 받은 김 위원장의 부재 속에서 북한은 시스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사회주의 전통의 시스템인 노동당을 선택했다.

선군정치, 그러나 노동당이 중심

북한에서 노동당의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는 모습은 실증적으로 목격되고 있다. 최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나라의 자주권과 안전을 굳건히 지키며 당의 선군혁명 위업을 다그치는 데서 지침으로 되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지만 회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회의 보도 하루 전날 김정은 제1위원장이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북한군 기관지 <조선인민군>에 '김정일 동지의 위대한 선군혁명사상과 업적을 길이 빛내여나가자'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따라서 회의는 이 담화의 후속조치를 논의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담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노동당의 영도'다. 김 제1위원장은 "인민군대의 총적 방향은 오직 하나 우리 당이 가리키는 한 방향으로 총구를 내대고 곧바로 나가는 것"이라며 군에 대한 당의 영도를 강조했다.

장정남 인민무력부장도 27일 <노동신문>에 실린 글에서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력사적인 담화에서 인민군대의 총적방향은 오직 하나 우리 당이 가리키는 한방향으로 총구를 내대고 곧바로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고 밝혔다.

군부에 대한 지도권이 노동당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선군정치라는 슬로건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지만 군에 앞선 노동당의 역할이 강조되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회의 개최는 당의 영도를 실증하는 회의로 평가된다.

김정은 위원장의 권한에도 변화가...

북한이 작년 9월 개정한 것으로 알려진 당·군·민간의 행동지침인 '전시(戰時)사업세칙'의 개정 방향도 노동당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북한은 2004년 4월 채택했던 전시사업세칙을 갓 출범한 김정은 체제에 맞게 수정하면서 전시상태의 선포와 해체의 결정자를 '수령' 개인에서 '집단'으로 바꾸고 선포 시기도 새로 명시했다.

특히 세칙 개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노동당의 권한과 역할을 강화한 점이 눈에 띈다. 전시상태의 선포 권한이 종전 '최고사령관'이라는 최고지도자 개인의 단독 결정에서 '당 중앙위, 당 중앙군사위, 국방위, 최고사령부 공동 명령'으로 수정됐다. 종전에는 최고사령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전시상태 선포가 가능했다면 현재는 4개의 통치 및 군사 기관의 공동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물론 김정은 제1위원장이 노동당 제1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 국방위 제1위원장, 최고사령관을 겸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결정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직책이 아닌 주요 통치기구가 합의를 이뤄 공동명령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적시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김 제1위원장의 독자적 결정만으로 전시상태 선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명시한 셈이다.

개정세칙은 또 전시사업 총괄 지도기관을 종전 국방위원회에서 당 중앙군사위로 집중한다고 변경했다. 이는 김정은 체제에서 군부의 영향력과 무모한 도발행위를 견제하는 동시에 군이 아닌 노동당을 중심으로 국정 전반을 통치 운영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수령 대신 노동당을 강조하는 북한

여기에다 북한이 최고지도자에 대한 주민들의 행동 규범 역할을 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유일사상 10대 원칙)을 39년 만에 개정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북한은 제목까지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으로 바꾼 이번 개정에서 2011년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김일성 주석과 동급으로 격상하고 수령뿐 아니라 노동당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했다.

북한은 10조 65항으로 이뤄졌던 유일사상 10대 원칙을 올해 6월 10조 60항으로 축소, 통합하면서 노동당의 권능을 강조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제3조에 "당의 권위를 절대화하며 결사옹위해야 한다"거나 제4조에 "당의 로선과 정책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특히 기존 제4조 8항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교시와 개별적 간부들의 지시를 엄격히 구별하며"를 제4조 7항의 "당의 방침과 지시를 개별적 간부들의 지시와 엄격히 구별하며"로 바꿔 수령에 대한 언급 부분을 삭제하고 노동당으로 대체했다.

제9조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유일적 영도 밑에"는 "당의 유일적 영도 밑에"로 바뀌었고 간부 선발 척도로 명시했던 제9조 7항의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당에 대한 충실성과 실력'으로 고쳤다.

북한이 이처럼 수령 대신 노동당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노동당이라는 정치 시스템을 이용해 북한 사회를 지도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에 작동하지 않던 노동당의 기능과 역할을 김정은 체제에 복원하기 시작했으며 당 정치국 회의 등을 통해 국가 중대사안을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노동당 정치국은 2011년 12월30일 회의를 열어 김 제1위원장을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하는 결정서를 채택하고 당 구호를 심의했으며 2012년 1월에는 특별보도를 통해 김 위원장 유해를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하는 결정을 내놓기도 했다. 또 2012년 4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를 열어 김 1위원장을 당 제1비서로 추대하고 당의 조직을 실무를 위주로 재정비했다.

작년 7월에는 상무위원, 위원, 후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정치국 회의를 열어 리영호 해임안을 처리하기도 했다. 또 올해 2월에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를 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65돌(9월9일)과 조국해방전쟁승리 60돌(7월27일)을 승리자의 대축전으로 맞이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북한, 태국식 입헌군주제를 준비하는가?

북한은 왜 이처럼 노동당의 부활을 꾀하고 있는가. 북한의 변화를 읽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다.

우선은 김정은 체제가 이전 체제만큼 공고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으로 보인다.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 만큼의 정치적 경험이 없다보니 수령 개인보다는 시스템에 의존하는 체제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입헌군주제를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김씨 일가'의 수령 자리는 보장하지만 국가운영은 노동당을 비롯한 시스템을 통해 해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생전에 스웨덴이나 태국 등의 정치 시스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 대목은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노동당의 부상은 정치적 측면과 더불어 북한의 경제적 변화와 연계해서도 주목된다. 북한은 김정은 체제 들어 경제단위의 자율권 확대, 소득 분배체계 개선 등을 추구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변화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지도자 개인의 결정보다 시스템을 통한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덩샤오핑이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결심으로 시작됐을 수 있지만 결국 정책의 추진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가능했다. 따라서 북한의 노동당이 앞으로 중국의 공산당과 같은 역할을 할 가능성이 주목된다. 특히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 경제 총책임자인 박봉주 내각 총리가 참석하고 경제분야에서 군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추론이 힘을 받는다.

북한 노동당의 부활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것이 잠깐의 시도일지, 아니면 앞으로 북한을 이끄는 새로운 동력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북한 변화의 핵심중의 하나가 노동당의 위상과 역할의 강화임을 분명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knsi.org) 홈페이지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이 글을 쓴 장용훈님은 <연합뉴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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