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달 한 번 안 밟고 30여km를 내려가다
[<장준하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순례 ⑨] 라오허커우에서 바둥까지
7월 1일이다. 갈 길이 멀어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앞을 쳐다보니 굉장히 높은 산이 앞을 가리운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다. '저걸 어떻게 넘어?' 걱정도 잠시, 길가에 식당이 보이기에 아침을 길에서 먹었다. 쌀국수도 있고 밀가루 덩어리인 꽃빵에 역시 밀가루로 만든 전(일명 부치기)도 있었다. 전은 꼭 우리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흔한 밥이나 장준하 일행이 그렇게 좋아했던 두부탕은 없었다. 뜨거운 물이 있기에 중국에서는 찾기 힘든 인스턴트 커피를 우리는 타 마실 수 있었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라오허커우를 떠난 장준하 일행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계곡을 지나고 절벽을 오르면서 파촉령을 올랐다. 엿새째 고원지대를 향해 오르고 있을 때 호랑이가 바로 앞에 나타났다가 가버렸다고 한다. 파촉령은 고원지대라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아 일정 거리마다 주막이 있어 배고픔을 달래 수 있었다.
겨울이라 고원에는 온통 눈으로 쌓여 있었다. 한파 속에 눈 위를 걷다 그 날 묵을 예정이었던 주막이 나오기도 전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몸 둘 곳 없는 이 고원에서 한밤을 무사히 보내는 것을 오직 신의 의사에 맡겨야 할 정도로 사정이 심각했다. 그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둠이 깔리기 전 우리는 나뭇가지를 꺽어다 움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그 위에 솔가지를 깔고 쭈그리고 앉아보았다. 메마른 눈물이 괴었다간 얼어서 눈시울이 시렸다. 바람만, 그 매섭고 칼날 같은 바람만 아니라면, 그래도 체온과 체온을 맞대고 이 밤을 지새우련만 .....
아, 나의 조국이 주는 이 형벌의 죄목은 무엇인가? 밤하늘에 별떨기가 돋아나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 나의 조국이 주는 이 형벌의 대가는 무엇일까? 밤하늘에 가득한 감회가 바람에 불려가고, 우리는 어두운 허공에서 신의 목소리라도 구하려는 듯이 빈 하늘을 우러렀다. 그것은 기도의 자세였다. 구도자의 마지막 기원 같은 경건한 합장이 마음에 가다듬어졌다. 주여, 우리를 이곳에 버리시렵니까?, 우리의 할 일이, 이보다 더 어려움이 있어야겠기에 주시는 시련이십니까? 주여, 이 이상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더 참으란 말입니까. 나는 나의 흐느낌의 기도를 계속할 기력도 없었다. - 중략 -
아 조국 없는 설움이여. 우리의 조상이 못난 때문에 우리가 이 설원의 심야를 떨고 지새워야 하는가. 아니, 조금도 조상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돌린다는 것은 나의 비겁이다. 나의 조상은 또 조상을 가졌고, 그 조상은 또 못난 조상을 가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어야겠는가? 무수한 밤별이 울어주는 듯, 나의 눈에 들어오는 별빛은 어른거렸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입술을 깨물고 나는 폭발하려는 나의 가슴을 막아야만 했다."[돌베게 244~245쪽]
가까스로 동사를 면한 장준하 일행은 다음 날 그 주막을 찾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그들에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두부탕은 그야말로 환희였다. 두부탕을 계속 끓여 나오게 했지만 그 많은 사람이 다 먹기에는 부족했다.
여관집 식구들과 함께
바오캉에서 싱산(兴山)까지는 온통 산을 넘어가야 하므로 거리가 좀 짧다 해도 하루에 가기엔 너무 멀다. 중간 지점에서 숙박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도상에 마을이 나타나지 않아 어디서 묵어야 할 지 걱정하며 아침에 나섰다. 장준하 일행처럼 묵을 곳을 찾지 못하면 우리도 산중에서 비박해야 할 처지이다.
산을 오르면서 다시 나타난 고속도로는 계곡을 따라 계속 나 있고 어떤 곳은 계곡 위 집 옆으로 고속도로가 나 있다.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소음 때문에 저 집은 얼마나 고달플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은 왜 이리 높은지 뱀이 지나가듯 꼬불꼬불 산을 기어 올라간다. 정상이거니 하면 다시 옆으로 돌아서 옆 산으로 돌아간다. 1500미터 이상 되는 산을 올라가 보니 과연 고원이 나타났다. 산 정상에서 아리랑 고개처럼 오르내르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가다 정상에 도착했다. 또 다시 내리막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거의 35킬로미터를 계속 올라가고 30여 킬로미터를 내려왔다.
싱산으로 가는 갈림길에 한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오우디앤(欧店)이라는 곳이다. 주변이 온통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중에 산골 같은 마을이다. 숙소로 들어가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으나 이 마을을 지나면 묵을 장소가 없을 것 같았다. 마을로 들어가니 여관이 있었다. 일층엔 슈퍼가 있고 이층엔 살림집 그리고 삼층이 객실이다. 화장실의 변기는 수세식이지만 양변기가 아니고 쪼그리고 일을 봐야하는 좌변기이다. 양변기가 없어서 그런지 화장실이 꽤 커 보였다.
마을을 둘러봐도 볼 것 거의 없는 아주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숙박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알았지만 만일 여기를 지나쳐 갔으면 싱산까지는 숙박할 곳이 없어 장준하 일행이 겪은 고초를 우리도 그대로 겪을 뻔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대체로 모기는 없었지만 이곳에는 소리도 나지 않는 모기들의 습격을 받아 여기저기 물리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에 주인집이 우리를 초대했다. 그들이 식구들과 어떻게 어울려 사는지 구경도 하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그들은 티브이에서나 본 한국인을 처음 보았다고 하며 매우 반가워했다. 아마도 한류의 영향일 것이다. 우리가 귀국하고 며칠 후 그 산골의 여관집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전 선생이 번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한국 친구들께 안녕하세요! 나는 장연(여자 중학생)의 엄마입니다. 여러분이 누추한 곳에 찾아오셔서, 우리 집에 생기가 돌게 했고, 깊은 감동과 영광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하는 정신을 보고 우리는 감동을 했습니다. 편지를 받고 나서 딸아이는 학교에서 과외수업을 하느라고, 나도 한동안 바빠서 답장을 바로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마 연분인 듯합니다. 비록 서로 다른 나라에 살도 있지만 우린 한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이었습니다. 이걸 보면 거리감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을 친구로 맞이해서 매우 기쁩니다. 자주 연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는 경험 못 할 환상적인 내리막
7월 2일 날씨는 화창했다. 5시 반경 모여서 함께 가볍게 간식을 하고 6시에 출발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오르막이다. 끊임없이 올라간다. 올라가는 속도는 시속 5킬로미터 정도다. 한 시간마다 쉬기를 반복했다. 한 30여 킬로미터 꾸준히 올라가니 고원지대가 나타났다. 1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 위에는 집들이 듬성듬성 있다. 산 정상에서는 능선과 산 옆구리를 타며 20여 킬로미터나 갔다. 아리랑 고개 넘듯이 오르고 내림을 반복한다. 고원지대의 경사는 완만하여 집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산 위에서는 주로 고추, 담배, 옥수수, 토마토를 경작하고 있었다. 그 높은 고원에도 태양열을 받아 더운 물을 공급한 태양온수기가 집집마다 달려있다. 상표 이름도 태양우(太陽雨)다. 태양이 주는 비라는 뜻인가? 중국 정부는 태양열 에너지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더운 물은 잘 나왔다.
비로소 내려갈 수 있는 정상이 나타났다. 그 다음부터가 환상적이다. 저 까마득한 아래에 움푹 파인 도시가 보이는데 거기가 오늘의 목적지 싱산이다. 내려 달리기 시작하는데 페달을 밟을 필요가 없었다. 오직 브레이크의 강약만 조절하면 되었다. 올라온 것처럼 꼬불꼬불 내려간다. 속도가 나자 온 신경이 곤두섰다. 한참을 내려가니 팔이 아플 지경이다. 이러다가 타이어가 파열되면 어떻게 되지? 왜냐하면 내 타이어가 오래 써서 금도 많이 가서 불량했기 때문에 걱정이 덜컥 들었다. 속도를 자연히 늦출 수밖에 없었다. 내려가는 길만 자그만치 30킬로미터나 된다. 그 사이 단 한 번도 페달을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내리막은 내 생애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온 신경이 곤두서 무척 기분이 짜릿했다. 내려와서 보니 산 정상이 까마득히 멀리 보인다.
4시쯤 싱산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시내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높은 산 이외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완벽하게 사방이 높은 산으로 꽉 막혀 있다. 완전한 분지이다. 여기에 양자강의 지류가 흐른다. 장준하 일행은 여기서 두 조로 갈라진다. 돈을 헤프게 써 남은 돈이 거의 없는 사람은 걸어서 바둥(巴東)으로 갔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갔다.
▲ 우리가 오늘 넘어야 할 산이다. ⓒ 이규봉
▲ 쌀국수, 꽃빵, 전으로 아침을 먹다. 그 흔한 밥은 없다. ⓒ 이규봉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라오허커우를 떠난 장준하 일행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계곡을 지나고 절벽을 오르면서 파촉령을 올랐다. 엿새째 고원지대를 향해 오르고 있을 때 호랑이가 바로 앞에 나타났다가 가버렸다고 한다. 파촉령은 고원지대라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아 일정 거리마다 주막이 있어 배고픔을 달래 수 있었다.
겨울이라 고원에는 온통 눈으로 쌓여 있었다. 한파 속에 눈 위를 걷다 그 날 묵을 예정이었던 주막이 나오기도 전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몸 둘 곳 없는 이 고원에서 한밤을 무사히 보내는 것을 오직 신의 의사에 맡겨야 할 정도로 사정이 심각했다. 그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둠이 깔리기 전 우리는 나뭇가지를 꺽어다 움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그 위에 솔가지를 깔고 쭈그리고 앉아보았다. 메마른 눈물이 괴었다간 얼어서 눈시울이 시렸다. 바람만, 그 매섭고 칼날 같은 바람만 아니라면, 그래도 체온과 체온을 맞대고 이 밤을 지새우련만 .....
아, 나의 조국이 주는 이 형벌의 죄목은 무엇인가? 밤하늘에 별떨기가 돋아나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 나의 조국이 주는 이 형벌의 대가는 무엇일까? 밤하늘에 가득한 감회가 바람에 불려가고, 우리는 어두운 허공에서 신의 목소리라도 구하려는 듯이 빈 하늘을 우러렀다. 그것은 기도의 자세였다. 구도자의 마지막 기원 같은 경건한 합장이 마음에 가다듬어졌다. 주여, 우리를 이곳에 버리시렵니까?, 우리의 할 일이, 이보다 더 어려움이 있어야겠기에 주시는 시련이십니까? 주여, 이 이상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더 참으란 말입니까. 나는 나의 흐느낌의 기도를 계속할 기력도 없었다. - 중략 -
아 조국 없는 설움이여. 우리의 조상이 못난 때문에 우리가 이 설원의 심야를 떨고 지새워야 하는가. 아니, 조금도 조상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돌린다는 것은 나의 비겁이다. 나의 조상은 또 조상을 가졌고, 그 조상은 또 못난 조상을 가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어야겠는가? 무수한 밤별이 울어주는 듯, 나의 눈에 들어오는 별빛은 어른거렸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입술을 깨물고 나는 폭발하려는 나의 가슴을 막아야만 했다."[돌베게 244~245쪽]
가까스로 동사를 면한 장준하 일행은 다음 날 그 주막을 찾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그들에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두부탕은 그야말로 환희였다. 두부탕을 계속 끓여 나오게 했지만 그 많은 사람이 다 먹기에는 부족했다.
여관집 식구들과 함께
바오캉에서 싱산(兴山)까지는 온통 산을 넘어가야 하므로 거리가 좀 짧다 해도 하루에 가기엔 너무 멀다. 중간 지점에서 숙박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지도상에 마을이 나타나지 않아 어디서 묵어야 할 지 걱정하며 아침에 나섰다. 장준하 일행처럼 묵을 곳을 찾지 못하면 우리도 산중에서 비박해야 할 처지이다.
산을 오르면서 다시 나타난 고속도로는 계곡을 따라 계속 나 있고 어떤 곳은 계곡 위 집 옆으로 고속도로가 나 있다.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소음 때문에 저 집은 얼마나 고달플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은 왜 이리 높은지 뱀이 지나가듯 꼬불꼬불 산을 기어 올라간다. 정상이거니 하면 다시 옆으로 돌아서 옆 산으로 돌아간다. 1500미터 이상 되는 산을 올라가 보니 과연 고원이 나타났다. 산 정상에서 아리랑 고개처럼 오르내르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가다 정상에 도착했다. 또 다시 내리막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거의 35킬로미터를 계속 올라가고 30여 킬로미터를 내려왔다.
싱산으로 가는 갈림길에 한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오우디앤(欧店)이라는 곳이다. 주변이 온통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중에 산골 같은 마을이다. 숙소로 들어가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으나 이 마을을 지나면 묵을 장소가 없을 것 같았다. 마을로 들어가니 여관이 있었다. 일층엔 슈퍼가 있고 이층엔 살림집 그리고 삼층이 객실이다. 화장실의 변기는 수세식이지만 양변기가 아니고 쪼그리고 일을 봐야하는 좌변기이다. 양변기가 없어서 그런지 화장실이 꽤 커 보였다.
마을을 둘러봐도 볼 것 거의 없는 아주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숙박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알았지만 만일 여기를 지나쳐 갔으면 싱산까지는 숙박할 곳이 없어 장준하 일행이 겪은 고초를 우리도 그대로 겪을 뻔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대체로 모기는 없었지만 이곳에는 소리도 나지 않는 모기들의 습격을 받아 여기저기 물리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에 주인집이 우리를 초대했다. 그들이 식구들과 어떻게 어울려 사는지 구경도 하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그들은 티브이에서나 본 한국인을 처음 보았다고 하며 매우 반가워했다. 아마도 한류의 영향일 것이다. 우리가 귀국하고 며칠 후 그 산골의 여관집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전 선생이 번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한국 친구들께 안녕하세요! 나는 장연(여자 중학생)의 엄마입니다. 여러분이 누추한 곳에 찾아오셔서, 우리 집에 생기가 돌게 했고, 깊은 감동과 영광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하는 정신을 보고 우리는 감동을 했습니다. 편지를 받고 나서 딸아이는 학교에서 과외수업을 하느라고, 나도 한동안 바빠서 답장을 바로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마 연분인 듯합니다. 비록 서로 다른 나라에 살도 있지만 우린 한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이었습니다. 이걸 보면 거리감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을 친구로 맞이해서 매우 기쁩니다. 자주 연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여관집 식구들과 함께 ⓒ 이규봉
다시는 경험 못 할 환상적인 내리막
7월 2일 날씨는 화창했다. 5시 반경 모여서 함께 가볍게 간식을 하고 6시에 출발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오르막이다. 끊임없이 올라간다. 올라가는 속도는 시속 5킬로미터 정도다. 한 시간마다 쉬기를 반복했다. 한 30여 킬로미터 꾸준히 올라가니 고원지대가 나타났다. 1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 위에는 집들이 듬성듬성 있다. 산 정상에서는 능선과 산 옆구리를 타며 20여 킬로미터나 갔다. 아리랑 고개 넘듯이 오르고 내림을 반복한다. 고원지대의 경사는 완만하여 집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산 위에서는 주로 고추, 담배, 옥수수, 토마토를 경작하고 있었다. 그 높은 고원에도 태양열을 받아 더운 물을 공급한 태양온수기가 집집마다 달려있다. 상표 이름도 태양우(太陽雨)다. 태양이 주는 비라는 뜻인가? 중국 정부는 태양열 에너지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더운 물은 잘 나왔다.
비로소 내려갈 수 있는 정상이 나타났다. 그 다음부터가 환상적이다. 저 까마득한 아래에 움푹 파인 도시가 보이는데 거기가 오늘의 목적지 싱산이다. 내려 달리기 시작하는데 페달을 밟을 필요가 없었다. 오직 브레이크의 강약만 조절하면 되었다. 올라온 것처럼 꼬불꼬불 내려간다. 속도가 나자 온 신경이 곤두섰다. 한참을 내려가니 팔이 아플 지경이다. 이러다가 타이어가 파열되면 어떻게 되지? 왜냐하면 내 타이어가 오래 써서 금도 많이 가서 불량했기 때문에 걱정이 덜컥 들었다. 속도를 자연히 늦출 수밖에 없었다. 내려가는 길만 자그만치 30킬로미터나 된다. 그 사이 단 한 번도 페달을 돌리지 않았다. 이러한 내리막은 내 생애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온 신경이 곤두서 무척 기분이 짜릿했다. 내려와서 보니 산 정상이 까마득히 멀리 보인다.
4시쯤 싱산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시내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높은 산 이외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완벽하게 사방이 높은 산으로 꽉 막혀 있다. 완전한 분지이다. 여기에 양자강의 지류가 흐른다. 장준하 일행은 여기서 두 조로 갈라진다. 돈을 헤프게 써 남은 돈이 거의 없는 사람은 걸어서 바둥(巴東)으로 갔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갔다.
▲ 장준하 일행이 배를 타고 갔을 양자강 지류 ⓒ 이규봉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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