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드림은 여전히 대안인가?
<유러피언 드림>(제러미 리프킨 지음)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우리는 세상이 더 삭막해져만 가고 재미는 더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탈출할 길 없는 도시의 쳇바퀴 삶이 서글퍼지면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미꾸라지 소쿠리를 들고 고기잡이 하던 시골 고향의 냇가를 떠올린다. 텔레비전도 없었고, 자가용도 없었다. 고작 손수레가 농기구의 전부였던 시절 농사일은 힘들기만 했다. 지금은 엄청나게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다. 도시에서 텔레비전, 자가용이 없는 일반 가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늘 기억 속의 그 힘든 시기를 찾아 들어가려 하고 추억하려 하는가. 어째서 그 힘든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되는가.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이 경제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풍족한 것이 왜 행복과 상관없는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에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이주해 갔던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물질 문명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했다. 넓고 넓은 황무지에 무한히 매장된 자원의 보고 아메리카는 꿈과 용기를 가진 도전적인 사람에게 무한정의 기회를 제공했다. 구 대륙에서 신분, 종교적 박해를 벗어나고자 이주를 결정했던 사람들에게 아메리카는 가장 적합한 기회의 땅이었다. 황무지를 개척해 물질적 부를 축적한 자수성가한 사람은 미국인이 가장 꿈꾸는 성공의 모델이며,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이런 사람을 그들의 영웅으로 소중히 간직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에서의 기회의 균등은 곧 국가가 개인에게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개념일 뿐,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 국가가 지원하는 형식은 아니다.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해야만 한다. 모두가 가난했었던 초기에는 이러한 것은 합리적인 사고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율성으로 인해 전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선망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에도 위기가 찾아 오고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 지고 있다.
아직 유러피언 드림이 태동하였다고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아메리칸 드림의 위기 속에서 유러피언 드림을 그 해답으로 주시한다. 아메리칸과 유러피언은 과연 어떻게 다른가. 빈곤한 개인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그 차이점을 나타낸다. 미국은 개인의 빈곤이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을 비롯한 소외 계층은 원래 가난을 뛰어 넘을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유럽은 개인의 빈곤이 국가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빈부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서 복지 정책 등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은 짧은 근무시간제를 도입하고, 직장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도 충실할 수 있도록 인적 관리에 있어서도 더 많은 융통성을 부여한다. 미국의 경우 근로시간이 계속해서 늘어가는 추세에 있다.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불평하며, 늘 쫓기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성인의 61%가 남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근면함을 요구하였고, 이것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신앙을 가진 미국인들에게서 더 철저히 지켜졌다. 미국에서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은 '구원'의 의미를 내포한다. 유럽 등지에서 그런 의미가 제외된 현대식 효율성 기준을 받아들였지만, 미국인들은 아직도 효율성을 높은 도덕적 가치와 동일시하며, 효율성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사람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비효율은 나태이며, 나태는 죄악 중의 하나라는 논리가 된다.
미국이 일함으로써 행복을 구한다면 유럽은 존재함으로써 행복을 구한다. 미국이 일방주의라면, 유럽은 상호주의다. 현재의 유럽연합은 이러한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거대한 네트워크다. 이러한 차이점은 곧 국가에 부여하는 권한에서도 차이를 나타낸다. 미국은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국가에게 위임하고 있지만, 유럽은 국가의 권력, 권한을 제한하고 관리자로써의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형제도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법적 권한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유럽인들이 수용한다면, 국가의 권한보다 상위에 있는 보편적 인권 자체가 손상된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분명하게 국가에 우선하는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상호주의가 아무런 아픔 없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유럽지도자들은 "완력으로 다른 나라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함으로써 비롯되는 끔찍한 결과를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이야기한다. 수세기 동안 처절하게 싸워 온 EU 25개 회원국들은 이제 무기를 내려놓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유럽의 상호주의는 처절했던 전쟁이 가져다 준 교훈인 것이다.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한 미국은 급격히 일방주의로 기울고 있다. 과도하게 소비하며, 모든 욕구를 채우려 하고 무제한적으로 경제 성장을 중시하며, 강한자에게 혜택을 주고, 약한자는 외면한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전력 투구하며, 미국인들의 개인적인 이익 추구는 점차 순전한 이기심으로 변해가고 있다. 소비와 죽음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은 어떠한가. 1997~99년 인구 10만 명 당 평균 살인율이 유럽은 1.7명인데 반해 미국은 6.26명으로 4배나 된다. 미국 어린이들의 살인, 자살, 총기 관련 사망률이 세계 26대 부유국 가운데서 가장 높다. 200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현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전쟁뿐만 아니라 개인 이익의 추구를 위해 환경과 공존하지 못하는 극한적 개발 등 미국이 일방주의를 통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들은, 어쩌면 더욱 극적이고 큰 재난을 가져오는 사건들이 발생해야만,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도덕적 행위에 시스템적 사고 방식을 도입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할지 모른다.
결국 인간의 반응은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특정활동이 가져오는 시스템 전체에 대한 해로운 결과가, 인간 서로간 또는 지구에 대한 취약성과 책임의 공동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첫째이며, 둘째는 재앙이 가져오는 두려움으로 생존 전쟁에서 자신만 보호하려는 사고 방식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의 경우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됨으로써 인류나 세계 전체에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미국인들 또한 확고한 책임의식을 개인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좁은 목표에서 세계 윤리증진이라는 대의로 확대 적용한다면 아메리칸 드림도 태동하는 유러피언 드림과 양립할 수 있는 꿈으로 개조될 수 있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부분이 어둠에 덮여 있고 많은 사람들은 나아갈 방향을 잃고 있다. 유러피언 드림은 이 어둡고 험난한 세상에서 길을 인도하는 등대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법규 제정을 환영하지만 유러피언 드림이 어려운 시련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세계 경제의 극심한 침체, 공황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자연과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의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까. 사회혼란, 거리폭동 속에서 개방, 과정 지향적인 다단계 통치체계를 유지할 인내심이 있을까. 이러한 우려 속에서도, 포괄성, 다양성, 삶의 질, 심오한 놀이, 지속 가능성, 보편적 인권, 자연의 권리, 지구상의 평화로 정의되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손짓하며 부른다. 새로운 유러피언 드림은 삶을 추구할 가치가 있게 해주는 꿈이다.
<유러피언 드림>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중에게 소개하여 많이 알려진 책이다. 성과 지상주의가 빚어내는 우등자 독식의 사회가 과연 영원히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부의 편중됨이 과연 가진자의 아량으로 완화되어 무리없이 해결될 수가 있을까. 부의 편중은 어김없이 엄청난 사회 혁명을 통해서 해결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 문제가 쓰러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모델로 숨가쁘게 쫓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심화되고 있다. 우리가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동안에 이미 이 폭탄의 풍선은 계속에서 부풀어 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꿈꾼 사람 사는 세상은 인권의 가치에서도 그 소중함이 결코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가 이러한 심각한 아픔을 더 이상 겪어서는 안 된다는 이상이 담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일방주의가 아니라 이웃과 소통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상호주의 속에서만 우리는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늘 기억 속의 그 힘든 시기를 찾아 들어가려 하고 추억하려 하는가. 어째서 그 힘든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되는가.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이 경제력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풍족한 것이 왜 행복과 상관없는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에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이주해 갔던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물질 문명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했다. 넓고 넓은 황무지에 무한히 매장된 자원의 보고 아메리카는 꿈과 용기를 가진 도전적인 사람에게 무한정의 기회를 제공했다. 구 대륙에서 신분, 종교적 박해를 벗어나고자 이주를 결정했던 사람들에게 아메리카는 가장 적합한 기회의 땅이었다. 황무지를 개척해 물질적 부를 축적한 자수성가한 사람은 미국인이 가장 꿈꾸는 성공의 모델이며,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이런 사람을 그들의 영웅으로 소중히 간직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에서의 기회의 균등은 곧 국가가 개인에게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개념일 뿐,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 국가가 지원하는 형식은 아니다.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해야만 한다. 모두가 가난했었던 초기에는 이러한 것은 합리적인 사고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율성으로 인해 전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선망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에도 위기가 찾아 오고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아 지고 있다.
아직 유러피언 드림이 태동하였다고 공식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아메리칸 드림의 위기 속에서 유러피언 드림을 그 해답으로 주시한다. 아메리칸과 유러피언은 과연 어떻게 다른가. 빈곤한 개인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그 차이점을 나타낸다. 미국은 개인의 빈곤이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을 비롯한 소외 계층은 원래 가난을 뛰어 넘을 능력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유럽은 개인의 빈곤이 국가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빈부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서 복지 정책 등 국가의 적극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은 짧은 근무시간제를 도입하고, 직장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도 충실할 수 있도록 인적 관리에 있어서도 더 많은 융통성을 부여한다. 미국의 경우 근로시간이 계속해서 늘어가는 추세에 있다.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불평하며, 늘 쫓기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성인의 61%가 남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근면함을 요구하였고, 이것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신앙을 가진 미국인들에게서 더 철저히 지켜졌다. 미국에서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은 '구원'의 의미를 내포한다. 유럽 등지에서 그런 의미가 제외된 현대식 효율성 기준을 받아들였지만, 미국인들은 아직도 효율성을 높은 도덕적 가치와 동일시하며, 효율성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사람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비효율은 나태이며, 나태는 죄악 중의 하나라는 논리가 된다.
미국이 일함으로써 행복을 구한다면 유럽은 존재함으로써 행복을 구한다. 미국이 일방주의라면, 유럽은 상호주의다. 현재의 유럽연합은 이러한 상호주의에 바탕을 둔 거대한 네트워크다. 이러한 차이점은 곧 국가에 부여하는 권한에서도 차이를 나타낸다. 미국은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국가에게 위임하고 있지만, 유럽은 국가의 권력, 권한을 제한하고 관리자로써의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형제도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해진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법적 권한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유럽인들이 수용한다면, 국가의 권한보다 상위에 있는 보편적 인권 자체가 손상된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분명하게 국가에 우선하는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상호주의가 아무런 아픔 없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유럽지도자들은 "완력으로 다른 나라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함으로써 비롯되는 끔찍한 결과를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이야기한다. 수세기 동안 처절하게 싸워 온 EU 25개 회원국들은 이제 무기를 내려놓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유럽의 상호주의는 처절했던 전쟁이 가져다 준 교훈인 것이다.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한 미국은 급격히 일방주의로 기울고 있다. 과도하게 소비하며, 모든 욕구를 채우려 하고 무제한적으로 경제 성장을 중시하며, 강한자에게 혜택을 주고, 약한자는 외면한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전력 투구하며, 미국인들의 개인적인 이익 추구는 점차 순전한 이기심으로 변해가고 있다. 소비와 죽음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은 어떠한가. 1997~99년 인구 10만 명 당 평균 살인율이 유럽은 1.7명인데 반해 미국은 6.26명으로 4배나 된다. 미국 어린이들의 살인, 자살, 총기 관련 사망률이 세계 26대 부유국 가운데서 가장 높다. 200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현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전쟁뿐만 아니라 개인 이익의 추구를 위해 환경과 공존하지 못하는 극한적 개발 등 미국이 일방주의를 통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들은, 어쩌면 더욱 극적이고 큰 재난을 가져오는 사건들이 발생해야만,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도덕적 행위에 시스템적 사고 방식을 도입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할지 모른다.
결국 인간의 반응은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특정활동이 가져오는 시스템 전체에 대한 해로운 결과가, 인간 서로간 또는 지구에 대한 취약성과 책임의 공동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첫째이며, 둘째는 재앙이 가져오는 두려움으로 생존 전쟁에서 자신만 보호하려는 사고 방식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의 경우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됨으로써 인류나 세계 전체에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미국인들 또한 확고한 책임의식을 개인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좁은 목표에서 세계 윤리증진이라는 대의로 확대 적용한다면 아메리칸 드림도 태동하는 유러피언 드림과 양립할 수 있는 꿈으로 개조될 수 있을 것이다.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부분이 어둠에 덮여 있고 많은 사람들은 나아갈 방향을 잃고 있다. 유러피언 드림은 이 어둡고 험난한 세상에서 길을 인도하는 등대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법규 제정을 환영하지만 유러피언 드림이 어려운 시련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세계 경제의 극심한 침체, 공황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자연과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의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까. 사회혼란, 거리폭동 속에서 개방, 과정 지향적인 다단계 통치체계를 유지할 인내심이 있을까. 이러한 우려 속에서도, 포괄성, 다양성, 삶의 질, 심오한 놀이, 지속 가능성, 보편적 인권, 자연의 권리, 지구상의 평화로 정의되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손짓하며 부른다. 새로운 유러피언 드림은 삶을 추구할 가치가 있게 해주는 꿈이다.
<유러피언 드림>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중에게 소개하여 많이 알려진 책이다. 성과 지상주의가 빚어내는 우등자 독식의 사회가 과연 영원히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부의 편중됨이 과연 가진자의 아량으로 완화되어 무리없이 해결될 수가 있을까. 부의 편중은 어김없이 엄청난 사회 혁명을 통해서 해결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 문제가 쓰러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모델로 숨가쁘게 쫓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심화되고 있다. 우리가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동안에 이미 이 폭탄의 풍선은 계속에서 부풀어 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꿈꾼 사람 사는 세상은 인권의 가치에서도 그 소중함이 결코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가 이러한 심각한 아픔을 더 이상 겪어서는 안 된다는 이상이 담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일방주의가 아니라 이웃과 소통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상호주의 속에서만 우리는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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