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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아이들은 왜 '수시충'이 돼야 하나

[교육단상] '용'과 '지렁이'가 어울리는 세상을 꿈꾸며

등록|2013.09.02 12:29 수정|2013.09.02 12:29

▲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고3 학생들. ⓒ 연합뉴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이다. 용은 개천에서 나지 않는다. 개천은 지렁이가 나는 곳이다. 용이 날 수 없는 곳이다. 원래 그랬지만, 이치상으로 봐도 그렇다. 생각해 보라. 그 좁디좁은 개천에서 어떻게 거대한 용이 날아오늘 수 있겠는가.

옛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개천의 지렁이가 단번에 용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랬을까. 사실과 거리가 멀다. 최근에 조선 왕조의 과거 급제자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글 하나를 읽었다. 역사학자 한홍구 선생이 쓴 <대한민국史> 2권에 나오는 '쇠사슬에 묶인 학원, 그리고 지식인'이 그것이다.

옛날에도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없었다

조선시대 500년간 문과에 합격한 이가 1만5000여 명이다. 이들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은 750개다. 상당히 많다. 언뜻 전국 방방곡곡의 개천에 있는 인재들이 골고루 등용한 듯하다. 하지만 전체의 75%에 해당하는 하위 560개 씨족 출신 급제자는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반면 상위 36개 씨족 출신의 급제자는 전체의 50%를 차지하였다.

대규모 급제자를 낸 씨족 분포를 보자. 왕실 후예인 전주 이씨가 873명으로 가장 많다. 권세가의 대명사 격인 안동 권씨와 파평 윤씨, 안동 김씨 등은 각각 359명, 332명, 315명이다. 사계 김장생이 속한 광산 김씨나 연암 박지원의 집안인 반남 박씨도 200명을 훌쩍 넘는 급제자를 배출했다.

조선 왕조 500년간 200명 이상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씨족 수는 14개 정도다. 이는 중국의 명청 시대에 과거 급제자 5만 1695명중 4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씨족이 거의 없었던 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과거 급제의 빈익빈부익부라고 해야 하나. 일부 특권 가문이 과거 제도를 싹쓸이하면서 급제자 수를 과점하게 되는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더욱 강화된다.

과거 제도를 능력 본위의 대표 사례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이는 실상과 거리가 멀었다.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과거 제도의 취지는 말뿐이었다. 과거 급제는 기존 지배층이 사회 상층으로 진입하기 위한 추인 과정일 뿐이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특권적이고 배타적인 환경과 집중적인 과거 훈련뿐이었다.

경제적인 부와 문화적으로 우월한 환경은 용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조선시대와 같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다. 한 마디로 용은 부촌에서 난다. 개촌 따위와는 절대 섞이지 않을 부촌은 어떤 곳인가. 교육 특구이자 사교육 1번지라는 서울 강남과 같은 곳이다.

가령 서울 강남과 서초의 서울대 입학생 수를 보자. 강남구는 2010년 145명에서 2011년 160명을 거쳐 2012년에 224명으로 급증한다. 서초구 역시 2010년 77명과 2011년 75명을 지난 후 2012년에 102명으로 대폭 상승한다. 이들 수를 2012년 금천구의 9명과 성동구·강북구·서대문구·영등포구의 8명, 중랑구의 6명 등에 견줘 보라.

개천이 아니라 부촌에서 나는 용

수시철이다. 일선 학교의 3학년 교실은 입시 상담과 서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학생과 교사 모두 '멘붕'을 호소한다. 낯선 서류와 흡족하지 않은 성적, 복잡한 전형 등 이것저것 챙겨보고 꼼꼼히 따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밤늦게까지 퀭한 눈으로 입시 정보 시스템을 들여다보는 담임 교사와 아이들은 마치 살아 있는 시체, 좀비 같다.

아이들은 공공연히 '수시충'이라는 말을 쓴다. 정시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수시 전형에서 입시 승부를 보려는 아이들을 비꼬는 말이다. 아이들이 수시충이 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 수시 전형으로 모집하는 인원 때문이다. 2014학년도 입시에서 수시 전형으로 모집하는 인원은 25만1608명에 이른다. 이는 작년보다 8385명이 늘어난 수치로, 전체 모집정원의 66.4%에 해당한다.

수시 전형에서는 수능 점수보다는 학생부나 자기소개서 등의 내신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한다. 수능은 상대적으로 더 부촌인 지역에서 우수하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부촌과는 거리가 먼 지역의 대다수 학교가 수시에 목을 매는 현상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수시 전형 때문이다. 수시 전형의 복잡함은 각 입시 기관에서 내놓은 수시 자료집이 웅변해 준다. <수시지원전략서>라는 제목으로 된 L사의 자료집은 무려 1173쪽에 이른다. 두께가 4.8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묵직한 자료집은 차라리 둔기에 가깝다. 나머지 기관의 자료집도 기본이 천 쪽에 달한다.

수시 전형 수도 어마어마하다. 194개 4년제 대학에서 실시하는 수시 전형 수는 모두 1863개다. 여기에 각 학교에서 구별해 놓은 세부 전형 종류도 다양하다. 수시 전형 수는 2013학년도의 2105개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숨 막히는 숫자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부촌의 정보력과 입시 분석 전략 등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개천의 지렁이와 부촌의 용이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하지만 여전히 한켠에서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더 쉬워졌다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다. 이들은 수능 연계 70%의 신화를 이어가는 EBS 교재 반영률과 공짜로 들을 수 있는 EBS 인강, 인터넷을 통한 입시 정보의 개방 등을 그 근거로 든다. 이들은 개천의 아이들이 용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환경이 아니라 공부하려는 열정이 부족한 개인 탓으로 돌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EBS 연계 정책 덕분에 사교육 소외 계층이 한몫 볼 여지가 늘어난 건 분명하다. 대교협(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나 기타 사설 교육 기관들이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입시 정보 시스템도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나 수시로 열람해 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의 부족한 열정뿐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들의 학업 열정은 공부깨나 하는 아이들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 없다.

그런데도 왜 용들은 강남·서초와 같은 서울의 교육 특구나 특목고니 자사고니 하는 부촌에서 더 많이 나올까. 그곳에 있는 아이들의 열정은 원래부터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주변 환경으로부터 길러진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느 한쪽의 영향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상관도를 명확히 따져 가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모두가 지렁이가 되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개천 지역의 아이들이 수시충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딴지를 걸고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학을 가지 않으면 영원한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공포를 안겨주는 세상의 속악을 말하고 싶다. '공정한(?)' 입시 제도를 부르짓는 수많은 교육 전문가들의 위선을 까발리고 싶다.

나는 용과 지렁이가 사이좋게 사는 세상을 바란다. 용이 지렁이에 공감하고, 지렁이가 용에게 협력하는 대동 세상을 꿈꾼다. 개천이라고 천대받지 않고, 부촌이라고 으스대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광탈(광속탈락의 준말로, 낮은 성적 때문에 수시 전형에 지원해봤자 탈락할 것이 뻔한 상황을 자조적으로 일컫는 고3 입시생의 속어)'로 절망하는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무망하게 읊조리는 어느 고3 담임의 넋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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