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식구들의 모진 삶, 분단때문이다
[공모- 가족인터뷰] 68년 분단이 너무길다, 평화통일이 소원
▲ 부모님 사진. ⓒ 윤영전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윤석천 동강(아호)은 나라가 일제에 강제병합을 당한 을사늑약을 맺던 해에 빛고을 무등산 산자락 효골에서 태어났다. 유아 때부터 배움에 다가가 한학을 배우고 언문을 터득하시었다. 청년기에는 고을에 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도선산 재각의 재실에서 효골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동강은 내 6형제 할아버지 중에 셋째 할아버지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넷째 할아버지가 결혼 후 3개월 만에 운명하시어 17살에 출가해온 할머니가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문중어른들은 과부가 되어 재가를 하지 않고 있어 부득이 조카인 동강을 양자로 정하여 아버지는 숙모의 양아들이었다.
양모에 입계한 아버지는 서당을 다녀 군 백일장에 장원을 하는 등 양모를 즐겁게 하였다. 어느덧 18살이 되어 중매로 나주 도례 풍산 홍씨가의 딸 부잣집 맏딸에 장가를 갔다. 그리고 이듬해 아들을 낳아 친가와 외가에 경사였다. 그리고 계속된 아들과 딸들을 8남매 두어 주변의 부러운 일가를 이루었다.
이렇듯 청상과부 숙모를 양모로 모시고 혼인하여 11명의 일가를 이루면서 밀려온 애환이 있었으니 바로 해방공간에서다. 36년의 일제하에 1945년 8월15일 광복을 이뤘다고 했으나 곧 분단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맏아들 영철이 건준에 가입하고 이어진 6.25전쟁에 둘째를 의용군에서 국군으로 입대시켰다.
필자는 4살 때 해방공간과 정부수립과 전쟁전후의 일들을 어느 정도 짐작했기에 의문 나는 일들을 부모님과 할머니에도 자주 묻곤 하였다. 특히 부모님이 이순을 맞이하기 전에 3남인 필자가 모시면서 조용히 여쭙고 어느 때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인터뷰를 수차례 하였다. 그리고 부친이 직접 쓰신 회고록에 의해 정리했다.
- 아버지가 청상과부이신 숙모에게 양자 가고 한세대를 이루던 때 회고해 주시면.
"나는 형을 한 분 두고 둘째로 태어나서 아래 동생들이 자주 태어나 애를 보느라고 서당에도 못 갔었다. 그래서 형처럼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어 안타까웠다. 14살이던 해에 집안에서 숙모에게 양자를 가게 되었는데 양모께서 바로 서당에 다니게 해주어 즐겁게 공부했다. 역시 배우면 안다는 것을 실감했었다."
- 그리고 결혼은 하실 때에 심정과 당시 해방 전까지 상황은...
"서당을 3년을 다니고 어느 사이 18세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결혼은 서둘렀다. 아마도 당신의 손자를 직접 받아보시고 싶으셨나 보자. 이곳저곳 중매가 들어 왔는데 서당 선생께서 아신 나주 도례 홍씨 가에 좋은 규수가 있다며 중매를 넣었다.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그저 말만 듣고 어른들이 결정해 주신대로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일제는 나이 들면 징용을 가야 한다는 말이 제일 두려웠었다."
- 맏형이 중학을 졸업하고 광주군청과 효지면사무소에 호적서기로 근무한 일을 말해주세요.
"양할머니와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길삼을 하여 맏형을 중학을 보냈는데 일본 교장선생이 형을 탐하여 일본에 데려간다고 했다. 할머니는 기겁을 하시고 당신을 죽이고 데려가라고 해서 접었다. 그만큼 할머니는 맏형이 손자이면서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형이 일본에 가 공부를 해 왔다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일제를 비난하면서 일본에 간다는 것은 불가했다."
- 해방공간에서 특히 형이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결국 밤 사람이 되었는데.
"당시에 해방공간에서 조금 지식인이라 하면 응당 분단된 해방이 아닌 통일된 조국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무나 하지 않았다. 형은 일찍이 마을 머슴들하고 사랑방에 자주 어울려 평등 자유를 주장했었다. 그러기에 어느 때는 참봉 할아버지에게 불려가 자식을 똑똑히 가르치라고 야단쳤다. 하인에게 어찌 양반의 자제가 행동거지가 바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은 계속해 지하에서 건준 일을 하고 조직을 다졌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 결국 건준 일로 피해 다니고 군청 면사무소를 나가지 못하고 도망자가 되었고 붙잡혀 한 달간을 고문당하면서도 조직을 불지 않았면서요.
"형은 지하운동을 하면서 어느 때는 거지로 나무장사로 위장해서 다니던 모습을 저도 본 일이 있지요. 1949년 2월 붙잡혀 고문을 그렇게 당하고도 조직을 불지 않아 결국은 죽임을 당한 사실을 저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근 한 달 동안 집에 오지 않아 갈만한 곳에 수소문을 다 해보았지만 알지 못해 아는 경찰서 서원에게 물었는데 벌써 1달을 고문 받았으나 조직원 불지 않아 그만 죽임을 당했다.
형이 광산군 서창면 진부촌에 친구이고 조직원이었던 한경수가 사복형사 둘이 형을 끌고 다녀 조직원 대질 심문을 벌이다 그만 총3발에 죽임을 당했다는 연락받았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아무리 무기든 권력자라 해도 엄연히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는데 재판도 없이 그만 파리 목숨처럼 숨졌다는 사실에 할머니랑 모두 혼절하고 말았다. 그때 조국 분단이 원망스럽고 정권이 원수 같았다. 그러나 세월은 갔다."
- 그리고 나서 6.25 전쟁이 나고 아버지와 둘째형의 부역이 이뤄지고 고난이었죠.
"말도 마라. 당시의 상황은 한권의 소설로도 부족하다. 인민군이 점령한 7월 22일 날에 대문을 박차고 들어 닥친 인민군장교와 군당위원장이었다. 영철 동지의 조국통일운동을 하다 죽임을 당한 사연에 조의를 표한다면서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때 어떻게 우리 죽은 영철이를 아느냐고 했더니, 다 안다고 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이제 1년이 넘어 잊으려고 애썼는데, 효지면 인민위원장을 맡으라고 했다. 내가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반동이라는 그들의 말에 그만 말문을 닫았다."
- 인공 2개 월 반 동안 인민위원장 맡으시면서 겪으신 고초가 있으셨지요.
"세상이 바뀌니 참으로 기고만장했다. 어떤 자는 평소에 감정을 격상시켜 크게 갈등을 만들어 인민위원회에 올려 달라고도 했다. 이런 저런 아주 소소한 일들의 진정이 쏟아졌다. 그때 양측에 대해서 지금 세상이 영원하지도 않고 서로 원수가 되는 그런 상황은 막아야 한다고 거절해 원만하게 위원장을 했었다. 그리하고 나서 부역자로 자수를 했는데 나중에 전쟁이 끝날 무렵 무고죄로 고소를 당해 감옥을 한 달간 살고 다 늙은이가 되었다. 날 고소한 그자가 자신이 한일을 덮어씌우려 하다 스스로 자백해 석방이 되었다. 참으로 아픈 고문이었다. 너의 형의 고문도 생각했다."
- 특히 인공이 물러갈 때, 피난을 하시면서 산에 입산을 하시다 하산하시었지요?
"그래. 그 얘기가 내 인생에 중요한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려고 생각하니 산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참 올라가면서 좀 깊게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산에 들어가면 빨치산이 될 터인데 과연 양모와 처자식 10식구를 어찌 한단 말인가? 어려움이 있지만 하산을 해서 부역자가 되더라도 고향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하산했다.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다. 하산하면서 군경합동 토벌대에 붙잡혀 하는 수 없이 약초 캐는 사람으로 변장해 늙은 부모 약초 캐는 사람이라 하고 토벌대장에게 하소연하여 풀려나왔다.
- 의용군에 간 둘째 형도 북으로 넘어가다 군관 장교의 배려로 고향으로 왔지요.
"참으로 은인이고 기이한 인간관계다. 내가 인민위원장 할 때 인민군 군관장교가 형을 무조건 데려가 중책을 주었다. 그리고 9.28수복으로 남에 점령했던 인민군과 의용군들이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뻔 했는데 좋은 홍군관장교가 형에게 명령했다. 윤동지 지금 나와 같이 북으로 안전하게 넘어간다는 보장이 없소. 그리고 분단조국에 이미 형을 조국에 바쳤는데 동지마저 잃을 수는 없소. 비록 부역자가 되겠지만 살아서 할머니와 부모님께 영철형 몫까지 효도하고 형제들에게도 잘 하시오. 명령이요.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좋은 인연이었다."
- 아버지도 6번이나 죽을 고비 넘고 고문으로 몸도 쇠약하셨는데 고문 후유증은?
"모두 하느님의 도움으로 명줄이 길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모두 자수를 하라고 해서 자수를 했었지. 부역자 모두 살기위해 부역을 했노라고 선처를 바란다고 썼지. 앞으로 절대로 죄과를 묻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만 1.4 후퇴와 전선이 전진 후퇴가 될 때마다 부역자를 즉결 처단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었지. 그래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사실 인민위원장까지 했으니 처단 감이었지. 그동안 면민들에게 선정을 한 결과인지 좌우지간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사실이 기적이라 생각한다. 특히 한 조국에 인민의용군과 국군에 입대한 둘째형의 형태는 그야말로 분단조국의 비애다."
분단조국에서 아버지의 말년은 모든 시름 잊으시고 82세까지 시조를 읊으시면서 여생을 마치셨다. 어머니 또한 84세까지 온갖 풍상을 이겨내시고 고향 선산에 계신다. 필자 또한 연좌 죄와 부역자에서 움츠리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귀국했다.
맏이는 비록 일찍이 운명하셨지만 조국의 평화통일에 진력하시었고 둘째 형은 6.25 참전자로 중부전선에서 중상을 당해 상이제대 하여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필자 또한 참전유공자가 되었으나 분단조국에 평화통일이 급선무다.
아버지께 더 여쭙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다음으로 미루고 이만 정리한다. 저희 자식들도 아버님과 형의 부역에 억매여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움츠리며 살아왔다. 좌우익 이데올로기 다 끝난 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생각이다. 11식구의 사연들이 많다. 8남매에서 부모님 가슴 안에 3남매를 묻어야 했다. 부모님 먼저 자식들이 세상을 뜬다는 것은 불효라는데 이 모두 분단조국 때문이다.
필자도 남은여생을 이 땅에 분단을 허물고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매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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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60년을 보내면서 이제는 평화협정으로 가는 소망을 한다. 언제나 남북이 하나되는
통일을 이룰까? 이번 가족사를 쓰면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 이땅에 통일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