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증거수집 위법한데 40억 벌금형 유지?
[분석] 선창규씨 '광우병 우려 미국산 쇠고기 유통' 사건 항소심 판결문
▲ 항소심 판결문 중 일부. 1차 압수수색이 위법하게 진행돼 거기에서 수집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기술돼 있다. ⓒ 오마이뉴스
[기사 수정 : 3일 오후 6시 14분]
지난 8월 30일 오전 11시 서울고등법원 303호 법정. 황병하 재판장(서울고등법원 제1형사부)이 판결문의 주요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피고인 선창규가 금품을 요구하고 수수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 부분의 1심 판단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다."
'광우병 우려 미국산 쇠고기 유통' 혐의 등으로 기소된 선창규씨의 무죄 범위가 배임수재 혐의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미 1심에서 광우병 우려 미국산 쇠고기 유통 혐의에는 무죄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그런 가운데 항소심에서 선씨의 금품수수 등 배임수재 혐의에까지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검찰이 지난 2009년 2월 선씨를 체포하면서 내세운 혐의들은 모두 무너졌다(관련기사: 6개월 옥살이시킨 '광우병 쇠고기 유통', 전부 무죄). 이제 남은 것은 별건수사를 통해 추가된 조세포탈(탈세) 혐의뿐이었다. 황병하 재판장이 항소심 선고를 이어갔다.
"조세포탈 증거로 수집된 증거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
순간 법정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세포탈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면 이와 관련한 검찰의 공소사실과 1심 판결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재판이 끝난 뒤 선창규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조세포탈 혐의에도 무죄가 선고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종 결론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선창규의 처남인) 김아무개의 영업실적표는 (조세포탈의) 증거능력이 있다. (중략) 선창규는 장수축협과는 별도로 중간가공업체를 실질적으로 운영해 매년 25억 원의 소득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세 신고를 하지 않았다. 종합소득세를 포탈한 점이 인정된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는 형량을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으로 낮추었지만 '벌금 40억 원'은 그대로 유지했다. 벌금 40억 원은 1일 400만 원으로 계산해 1000일의 노역장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조세포탈 증거들, 영장에 기재되지 않아
▲ 선창규씨. ⓒ 구영식
서울남부지검은 지난 2009년 2월(1차영장)과 3월(2차영장) 두 차례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선씨의 자택과 동생의 사무실 등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벌였다. 선씨가 SRM(광우병 위험물질)의 함유 가능성이 있어 폐기 명령을 받은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으로 둔갑시켜 시중에 유통 시켰고(축산물가공처리법 위반), 한 돈육 납품업체로부터 총 3억5000여만 원의 돈을 받았다는 혐의(배임수재)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검찰의 공소사실 목록에는 조세포탈 혐의가 없었다.
항소심 재판부도 "검사는 이 사건 1차영장 집행 당시까지 장수축협유통사업단 실질 운영 관련 피고인에 대한 조세범처벌법위반의 혐의와 관련하여 제보를 받거나 조사한 사실이 없었다"고 밝혔다.
문제는 검찰의 1차 압수수색이 위법 투성이었다는 점이다. 먼저 1차영장에 의해 압수된 조세포탈 증거가 1차 압수수색영장에 기재된 압수대상물이 아니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 1차영장에 의하여 압수된 조세포탈 증거는 이 사건 1차영장에 기재된 압수대상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차 압수수색영장에는 축산물가공처리법 위반과 배임수재, 사기 혐의가 기재돼 있는데 이와 전혀 다른 조세포탈 증거들까지 수집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선창규의 처남인) 김아무개로부터 '선창규 실질운영 법인관련 서류철'(장수축협중부유통사업단 계약서 등)을 임의로 제출받거나 새로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어야 하는데 검찰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검찰이 선씨의 조세포탈 증거들(선창규 실질운영 법인관련 서류철)을 수집하는 과정이 위법했다는 얘기다.
영장에 적시되지 않은 장소에서 압수수색 벌여
또한 검찰이 1차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한 장소는 최초 영장에 적시된 장소와 달랐다. 형사소송법 제114조에는 압수수색영장에 수색할 장소를 적시하도록 규정해 놓았는데 이는 "압수수색영장에 압수수색할 장소를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특정해야 함"(항소심 재판부)을 뜻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1차영장에 적시된 '미트백 사무실'과 지번만 같을 뿐인 ㈜무지개진생원, ㈜비에이티지, ㈜덕유산한우유통, ㈜농협브랜드유통 사무실에서 조세포탈 증거를 압수한 것은 헌법상 영장주의의 원칙 및 형사소송법에서 압수수색영장에 압수수색할 장소를 적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입법취지에 비추어 적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선창규 등이 검찰수사를 회피할 목적에서 실질적으로는 성남시 수내동에서 ㈜미트백을,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 ㈜무지개진생원을 각 운영하였음에도 고의적으로 ㈜미트백 및 ㈜무지개진생원의 각 사무실을 혼동케 하여 수사를 방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러한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찰이 돈육유통업체인 ㈜미트백과 ㈜무지개진생원 사무실의 소재지를 혼동해 영장을 집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끝으로 검찰은 압수목록을 교부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 제129조는 '압수한 경우에는 목록을 작성하여 소유자, 소지자, 보관자 기타 이에 준할 자에게 교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압수물 변경 등과 관련한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고, 피압수자들이 압수물을 돌려받을 권리(환부 청구권) 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다.
항소심 재판부는 "서울남부지검 수사관들은 이 사건 1차영장 집행 직후 피압수자들에게 상세목록을 교부하지 않았다"며 "(이는) 절차를 위배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피고인측 직원이 고객사랑마트 PC에서 직접 압수물제출확인서를 작성하였으므로 명칭만 다를 뿐이지 실질적인 내용은 압수물제출확인서가 압수목록의 의미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미트백 관련 서류 23BOX'와 같이 압수물이 포괄적으로 기재된 사실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라며 "압수목록 교부의 취지 등에 비추어 볼 때 검찰의 압수목록 교부서의 작성 및 교부를 압수목록의 교부로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 두 차례에 걸쳐 발부받은 압수수색영장. ⓒ 오마이뉴스
"검찰의 위법행위가 없었다면 탈세 증거 수집 불가능"
항소심 재판부는 이렇게 검찰 압수수색의 위법성을 자세하게 지적한 뒤 "1차영장에 의하여 압수된 조세포탈 증거의 압수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위반하여 행하여진 위법한 압수"라고 결론내렸다. "위반의 내용과 정도가 중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 증거가 1차영장 범죄사실과 관련이 없는 반면, 법관으로부터 새로 영장을 발부받아 당해 물건을 다시 압수하거나 당사로부터 압수물을 임의로 제출받는 등의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만연히 피고인을 조사함으로써 압수절차에서의 위법을 용이하게 회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위 증거에 대한 위와 같은 위법한 압수수색으로 인하여 적법절차와 영장주의에 의하여 보장되는 기본적 인권이 본질적으로 침해되었고, 이러한 위법행위가 없었다면 위 증거의 수집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을 토대로 항소심 재판부는 "위 증거의 압수는 적법절차의 실질적인 내용이 침해된 경우에 해당한다"며 "따라서 이 사건 1차영장에 의하여 압수된 조세포탈 증거는 형사소송법 제308조의 2에 의하여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의 2는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렇게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지난 2009년 4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에 세무조사를 의뢰했고, 서울지방국세청은 같은 해 7월 선씨 부부와 동생, 처남 등을 조세포탈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고발했다. 서울지방국세청이 적시한 선씨 부부의 추징액은 무려 82억여 원에 이르렀다. 검찰은 지난 2010년 1월 조세포탈 혐의로 이들을 기소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수사를 지휘하던 검사가 "광우병 우려 쇠고기 유통사실을 자백하면 세무조사를 의뢰하지 않겠다"며 플리바기닝(자백감형제도)을 제안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선씨가 끝까지 '광우병 우려 쇠고기 유통' 혐의를 인정하지 않자 검찰이 별건수사를 벌여 탈세 혐의를 추가했다는 것이 선씨의 주장이다(관련기사 : 검사의 거래 제안 거부하자 '120억 세금폭탄'?).
항소심 재판부, 탈세 주요증거 USB 착각 논란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의 압수수색이 위법하게 진행돼 조세포탈 증거들이 증거로서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도 1심과 똑같이 선씨의 조세포탈 혐의를 인정했다. 이렇게 모순된 판단 뒤에는 압수수색에서 압수한 USB가 있다.
항소심 판결문에 따르면, 검찰은 지난 2009년 2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소재 사무실에서 고객사랑마트와 미트백의 매입·매출 등 전산자료를 자신들이 가져간 USB 1개에 저장해 압수목록에 올렸다. 이를 3개월 뒤인 5월에 선씨의 동생에게 돌려주었고, 선씨의 동생이 당시 세무조사를 벌이던 서울지방국세청에 이를 제공했다. 서울지방국세청이 이렇게 제공받은 USB에서 선씨의 처남인 김아무개씨가 작성한 영업실적표를 발견했다는 것이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다.
영업실적표는 선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했던 '장수축협유통사업단'의 연도별 매출액과 비용(인건비, 임차료 등)이 정리돼 있는 자료다. 선씨 부부에게 추징된 82억여 원은 이 자료를 근거로 계산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러한 영업실적표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1심과 같이 선씨의 조세포탈 혐의를 유지했다. 영업실적표가 조세포탈 혐의를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였던 것이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가 선씨의 조세포탈 혐의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주요 증거(USB)를 헛갈려서 판단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오마이뉴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검찰은 지난 2009년 2월 1차 압수수색에서 최소한 두 가지 USB를 압수했다. 하나는 지난 2009년 2월 1차 압수수색 당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 사무실에서 압수한 USB다(개포동 USB). 개포동 USB는 선씨의 동생이 운영하는 수퍼마켓(고객사랑마트)의 매입·매출자료를 검찰에서 저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경기 성남시 수내동 소재 사무실에서 압수한 USB다(수내동 USB). 수내동 USB는 선씨의 처남이 압수수색 장소에서 가지고 있다가 검찰에 압수당한 것이다.
문제는 선씨의 조세포탈 혐의를 뒷받침하는 핵심증거인 영업실적표는 수내동 USB에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검찰은 지난 2009년 4월 세무조사를 의뢰할 때 수내동 USB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에 전달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개포동 USB에 영업실적표가 들어 있다고 판단했다.
수내동 USB는 압수목록에도 올리지 않아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인 반면 개포동 USB는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다. 그래서 항소심 재판부는 조세포탈의 핵심증거인 영업실적표가 개포동 USB에 들어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이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며 증거능력을 인정해 조세포탈 혐의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 지난 2009년 2월 다수의 언론들이 검찰발로 "광우병 우려 미국산 쇠고기가 유통됐다"고 보도했다. ⓒ SBS 홈페이지
"명백한 청부수사... 수사검사들 책임 반드시 묻겠다"
하지만 선씨는 "검찰은 항소심 재판부가 위법하게 수집됐다고 판단한 수내동 USB를 근거로 세무조사를 의뢰했고 나중에 국세청이 고발하자 조세포탈 혐의로 저를 기소했다"며 "항소심 재판부가 위법한 수내동 USB와 적법한 개포동 USB를 왜 헛갈렸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선씨는 "개포동 USB에는 동생이 운영하는 고객사랑마트 등과 관련한 자료만 있었다"며 "개포동 USB에 들어있는 그 자료들 때문에 동생이 약 2억 원의 세금을 추징당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개포동 USB를 압수목록에 올렸을 당시 현장에 있었던 고객사랑마트의 점장도 지난 1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검찰이 메인PC를 가져간다고 해서 '그것이 없으면 영업을 못한다'고 하자 검찰이 자신들의 USB에다 전산자료를 담아갔다"며 "당연히 이 USB에는 장수축협유통사업단의 영업실적표는 없었다"고 전했다.
선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씨의 조세포탈 혐의와 관련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에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후 진행될 대법원의 상고심 결과가 주목되는 이유다.
한편 선씨는1·2심에 이어 대법원의 상고심에서도 광우병 우려 미국산 쇠고기 유통과 금품수수 등 배임수재 혐의가 무죄로 확정될 경우 당시 수사검사들을 피의사실 공표로 형사고소하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예정이다. 그는 "이번 사건은 청부수사가 명백하다"며 "법에서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당시 수사검사들의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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