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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전시에 소리 소문 없이 떨어뜨린 원자폭탄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⑧] 백남준의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1963)

등록|2013.09.02 16:14 수정|2013.09.02 16:14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백남준 전문가들 인터뷰에 이어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시대별로 소개한다. - 기자 말

▲ 백남준이 29살인 1961년 슈톡하우젠의 '오리기날레' 공연에 참가했을 때 모습.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백남준 이론가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플럭서스'와 1961년 '오리기날레' 공연 등에서 메타한 해프닝을 펼쳐 큰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이에 만족치 않고 "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싶다"며 전자매체를 활용한 실험예술을 꿈꾼다. '원(元)화랑'에서 1986년 열린 '백남준전' 도록엔 "난 당시 입시생처럼 전자공학과 물리학, TV관련 책자만 봤다"고 적혀 있다.

백남준은 60년대 초부터 전자음악을 소개한 쾰른서독방송(WDR)을 출입하면서 그런 경향을 보인다. 때론 베를린공대에서 강연도 들었고 위험천만한 1만5천 볼트 전기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TV를 악기처럼 예술의 도구로 상상한 것이다.

5·16 쿠데타 이후 재산몰수로 가계가 기울고 유학비가 안 와 백남준의 독일생활은 빈궁해졌다. 동경에서 가족과 함께 1년을 보냈기도 했다. 그런데 운 좋게 그때 미국인보다 트랜지스터 원리를 2년 앞서 발견한 전자공학자 '우치다 히데오'와 백남준과 함꼐 비디오합성기를 발명한 '슈야 아베'를 만나 전자아트에 도움을 받는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 선보일, 당시론 엄청나게 비싼 13대의 TV를 사기 위해 때로는 점심도 굶어가며 돈을 모았다. 이에 만족치 않고 돈을 더 벌기 위해 증권에도 투자, 2번은 실패했으나 1번은 오스트리아은행을 통해 큰 이득을 보기도 한다.

1992년 백남준은 김용옥과 인터뷰에서 유럽의 음악과 미술수준에 크게 실망했으나 고딕성당의 하늘을 찌를 듯한 공간처리와 외부에서 투과된 빛이 연출하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비디오아트가 바로 그런 광채에서 받는 영감을 기반으로 해서 착안했는지 모른다.

시공간을 넘어 음악이 미술이 되는 전시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쿠바TV를 보고 있는 백남준과 칼 오토 괴츠. 미국의 백남준 전문가 존 핸하르트 큐레이터는 비디오아트를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사진술의 발견과 버금가는 미술사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은 그가 31살이 되는 1963년 7년간 준비한 첫 개인전을 엥겔스의 고향인 소도시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3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었다. 이 갤러리는 원래 독일 아방가르드예술을 대표하는 건축가 예를링의 비상업적 사무실이었다.

그의 첫 전시제목이 <음악의 전시회-전자 텔레비전>인 건 음악전공자인 그이기에 자연스럽긴 해도 전시장에 피아노와 함께 TV를 등장시킨 건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간예술인 미술에 시간예술인 음악을 도입한 건 구석기에서 신석기로의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사건이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마침내 비디오아트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그의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데서 왔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리(sound)가 시각(sight)이 되는 '사운드아트'가 나온다. 기존의 시각중심을 넘어 오감이 총동원된 즐거운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실험예술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이런 개념은 다원예술과도 통한다.

백남준의 첫 전시서문은 그가 존경하는 피에르 빌헬름이 썼다. 첫 구절은 "이번 전시가 온 우주에 음악이 스미게 했다"는 시적 언어로 시작한다. 이는 서로 불협화음과 충동을 일으킬 것 같은 미술과 음악과 TV 등을 융합해 시공간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매체예술이 탄생된 것으로 본 것 같다.

다시 재현하기 힘든 전후 무후한 전시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전시포스터 1963. 에릭 안테르시 컬렉션.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년 봄)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첫 전시는 이처럼 뒤샹의 반미술과 쇤베르크의 반음악을 합친 것 같다. 당시로는 유례가 없고 상상하기 힘든 전시였다. 특히 흥미로운 건 갤러리입구의 정원과 현관, 화장실 욕조와 지하실까지도 복합적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작가만 아니라 포스터도 직접 제작하는 그래픽디자이너로 전시장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큐레이터로,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전시를 총괄하는 기획자로 또한 개념미술가로 그 몫도 다 했다.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큐레이터로서 백남준'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어나고 있단다.

그가 만든 포스터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로 쓰여 있는데 16개 주제가 나온다. 지상천국을 연상케 하는 '성인을 위한 유치원'(1), 관념주의를 경고한 '이데아의 물신세계'(2), 사물의 음향까지도 언급한 '소리 나는 오브제'(3), 선불교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선 수행을 위한 도구'(4), 토론 주제 같은 '비인과성과 원리로서 동시성'(15), 일상 속 축제를 강조하는 것 같은 '독일 바보학에 대한 연구'(16) 등이 그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포스터에서 대문자로 강조한 알파벳만 따오면 '추방(EXPEL)'이 되는데 그 뜻은 불분명하다. 냉전과 이념대결을 추방하자는 건지 아니면 서양미술을 추방한다는 뜻인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 경향신문 4월 27일자 4면에는 '사월혁명'을 기리는 '문화계 여러분이 보내온 글'과 조지훈, 정비석 등의 독재종식촉구와 희생학생 애도의 글과 안의섭(두꺼비)화백은 복간만화가 실려 있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특히 주목을 끄는 건 백남준의 첫 전시 전단지를 1960년 4월에 발행된 <경향신문> 위에 인쇄했다는 점이다. 1962년 10월 독일에선 나중에 무죄로 석방됐지만 <슈피겔지> 편집국장이 체포되는 언론탄압이 있었다. 이런 저런 사건과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하여간 1980년 이후 백남준과 지인이 된 전 문화행정가 천호선씨의 말에 의하면 첫 전시회를 기획할 때 한국에서 일어난 '사월혁명'으로 <경향신문> 폐간·복간 소식을 알게 되면서, 일본에 있던 형에게 복간호를 비롯한 경향신문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보내달라고 해서 거기에 일일이 낱장으로 인쇄해서 만들었단다.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해 폐간됐다가 4월 19일을 계기로 4월 27일 다시 복간된다. 백남준은 <경향신문> 1960년 4월 27일과 29일, 1961년 3월 13일자 위에 전단지를 만든다. 백남준은 세계미술계의 일대 혁명이 될 비디오아트와 고국의 민주화운동을 동일시하는 관점도 엿보인다.

이렇게 전단지 하나 만드는 방식도 기존의 방식을 교란시키고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 그 아이디어가 자신의 정치성이 들통 나지 않게 하고 그가 염두에 두었던 정치적 메타포와 의도가 뭔지를 후대에야 깨닫게 되는 고단수였다.

칭기즈칸의 기개로 도전한 전자아트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입구 소머리와 함께 백남준과 페터 브뢰츠만 등등 1963. 사진: 룰프 예를링. 백남준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에서 소개된 영상자료 중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남다른 명석함과 해박한 지식과 동서철학을 섭렵한 인물인 동시에 칭기즈칸의 기개와 몽골셔먼의 기질도 농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몽골유전자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몽골은 우리와 3천 년 전 헤어졌는데 그들은 아직도 우리 걸 보존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런 배경을 알았기 때문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내건 건, 백남준이 셔먼아티스트로서 한국의 터줏대감을 이곳에 모셔와 텃세부리는 서양인의 기를 꺾고 같이 놀자고 한 것인가. 백남준은 대감놀이를 이쪽 신을 저쪽 신으로 보내 의견을 나누고 저쪽 신을 이쪽으로 초대해 융숭히 대접한 후 돌려보내는 소통의 장본인으로 봤다.

하여간 소머리에서 냄새가 진동하자 전시가 시작되기 3일 전 독일경찰이 출동해 이를 제거하게 된다. 독일엔 두개골동물은 지하 1m에 묻어야 하는 법이 있단다.

1963년 세계예술계에 투하한 원자폭탄(?)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요셉 보이스가 백남준 첫 전시 개막식에 나타나 도끼로 부순 피아노 1963.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그의 첫 전시에는 각기 다른 4대의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그 모양새가 각각이다. 피아노에 브래지어를 입혀 여자로 의인화시켜 웃음이 터트리게도 하고, 또는 작동하는 전구, 깡통, 자물쇠, 암소뿔, 철조망, 전화기, 괘종시계, 헤어드라이기 등을 붙여 놓아 관객을 얼떨떨하게도 한다. 피아노도 대화가 가능한 생명체로 본 모양이다.

백남준의 친구인 요셉 보이스는 전시 개막 1시간 뒤 나타나 그 피아노 중 한 대를 마치 어떤 표적물을 정확하게 강타하듯 그렇게 박살을 냈다. 보이스는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리라.

이 괴상한 전시를 서구백인중심의 헤게모니를 흔드는 '빅뱅'이나 세계미술계에 소리 소문 없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물론 그 방식은 비폭력적이다. 백남준의 이런 저런 의도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완전범죄' 같다. 백남준도 "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아트는 5차원 사기다"라는 하지 않았던가.

피아노를 대신할 악기로 도입한 TV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젤라틴 액에 바리타를 혼합해 코팅한 종이)인화흑백사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60년 전 TV라는 캔버스에 가는 수평, 수직의 선묘를 그림으로써 그의 예술혁명은 시작된다. 요즘 모니터에 글씨를 쓰면 입력이 되는 방식의 유래가 된다.

TV전시가 어떻게 비디오아트의 기원이 되냐는 사람도 있지만 모니터로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1963년을 비디오아트의 시발점이라 해도 좋으리라. 비디오아트라고 해서 꼭 비디오를 사용한 시점으로 잡는 건 지나치게 매체 중심적 사고다.

백남준의 유명한 말 "TV는 평생 동안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에서 TV아트가 창안된 이유를 짐작케 한다. 이렇듯 백남준은 TV가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내부회로를 해체시켜 대수술을 가한다. 또 백남준이 TV를 주목한 건 이 매체가 예술품으로 계속 진화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첨단하이테크를 활용한 백남준이 첫 전시에서 '참여TV'를 등장시킨 건 사람을 지배하에 두는 독재형 TV가 아니라 민주형 매체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관객의 참여와 소통은 그의 예술에서 더 중요해진다.

인류의 영원한 질병인 우상숭배의 파괴자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욕조의 마네킹 바리타지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히치콕의 소름끼치는 공포영화 '사이코'나 아르토의 '잔혹극'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연상된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오래된 질병"이라고 했는데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를 부순 것도 그렇고, 위에서 보듯 서양뮤즈가 욕조 속에서 양 팔다리가 잘린 채 있는 장면도 그렇고, 이런 이미지는 서양미술숭배에 대한 파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이 세상에 버려야 할 편견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많은가.

19세기 과학혁명으로 유럽이 산업화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원 확보와 인력이 필요해지자 식민개척과 제국주의에로 박차를 가한다. 거기서 얻은 이득으로 호사와 권력을 누릴 때 랭보는 그들을 향해 야만의 문화라고 선포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백남준의 포스터에 적힌 '추방'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는 바로 그렇다.

동서를 넘어 랭보와 백남준은 시대의 우상파괴자라는 면에서 같다. 서구문명을 비판하는데 서구인이 아닌 동양인이 시도한 건 드문 일이지만 백남준은 서구인의 성상인 피아노 등을 부수고, 서구적 가치를 뒤흔들고 서구문명을 희화시키면서 'TV아트'라는 새로운 예술로 이원론에 갇힌 그들의 난제를 풀어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관객에 초점을 둔 문화민주주의자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음반꼬치 1963. 바리타지 인화흑백사진. 백남준아트센터(2012)에서 열린 헤르조겐라트 박사강연 때 찍은 사진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첫 전시에서 가장 백남준다운 작품 중 하나는 '랜덤 액세스(음악)'다. 막대꼬치에 꽂혀 있는 레코드를 관객이 즉석에서 마음대로 골라 변형해 작곡할 수 있는 방식이다. 관객이 전시의 주인임을 선포한 것으로 이 말은 롤랑 바르트가 1968년 <저자의 죽음>에서 한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그는 이렇게 작가중심의 수직적 전시에서 관객중심의 수평적 전시로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래서 마침내 '대중예술가'시대, '문화민주주의'시대를 연 셈이다. '랜덤액세스'란 이처럼 작가가 정한 어떤 규칙이나 각본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과 비위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된다.

백남준은 이렇듯 작가지만 관객에 초점을 두고 그들과 함께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예술을 추구했고, 이게 결국 60년대엔 <참여TV>로, 70년대엔 신디사이저로 편집한 <비디오아트>로, 80년대엔 생중계한 <위성아트>로 진화된다.

현대예술의 매체확장과 지평 넓히기

▲ 백남준 I '음악의 전시_전자 텔레비전' 입으로 듣는 음악퍼포먼스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위 작품은 모조페니스를 입에 물고 바늘을 레코드에 얹고 고막의 진동을 속귀로 전달받는 관객참여형 작품으로 성(性)을 소재한 점도 흥미롭다. 백남준아트센터 아카이브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드디어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백남준이 발명한 TV회화는 그 어떤 기존회화과 비교가 안 되게 표현력이 풍부하다. "다빈치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라고 한 백남준 말이 이를 반증한다.

현대서양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오브제아트를 백남준은 피아노 등에까지 확대하고 그 범위를 넓혀나간다. 또한 침묵이나 제거할 수 없는 잡음인 '화이트 노이즈'까지도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백남준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백남준 자료집)>을 낸 저자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비디오아트가 앞으로 큰 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뒤샹은 비디오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걸 다 이루었다. 그는 입구는 크게 만들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었다. 그 작은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이라며 자신이 창안한 예술의 독자성을 명쾌하게 풀이했다.

▲ 2013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공식초청을 받은 <백남준의 주파수로: 스코틀랜드 외전>전 오프닝행사에서 연설하는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 백남준아트센터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공식초청전시 <백남준의 주파수로:스코틀랜드 외전>이 현지 시각 8월 8일 오후6시 에든버러대학 탤봇라이스 갤러리에서 막을 올렸다. 영국과 인연이 적은 백남준은 1963년 스코틀랜드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는데, 이번 전시는 이 전시의 5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날 전시 개막식에는 조나단 밀스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총감독, 티모시 오시어 에든버러대학 총장, 팻 피셔 탤봇라이스갤러리 관장, 박만우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사이먼 그룸 스코틀랜드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400여명이 참석했고, BBC의 예술 전문 온라인 매체인 <더스페이스>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조나단 밀스 총감독은 "2013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을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백남준 전시에서 예술사의 표준이 되고 예술창작의 기초개념을 제공해주는 레퍼런스를 만나게 되며, 이 전시를 통해 페스티벌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예술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고 말했고 또한 티모시 오시어 에든버러대학 총장은 "TV와 전기를 발명한 에든버러대학에서 TV를 예술로 처음 활용한 백남준의 전시를 열게 된 것은 매우 의미 깊다"고 언급했다(백남준아트센터 보도자료 참고).

직접 이번 행사에 참가하고 있는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는 <한겨레> 기고문에서 백남준 전을 이번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로 주저 없이 꼽는 관객도 봤다고 적었다. 또한 <인디펜던트>지 비평가 찰스 다웬트는 "백남준의 로봇 조각에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봤다"고 평가했고, 리버풀 미디어아트센터 디렉터인 마이크 스텁스는 "대형 회고전보다 훨씬 촘촘하게 느껴지는 흥미로운 전시"라고 기술했단다.


덧붙이는 글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 공식초청전시 <백남준의 주파수로: 스코틀랜드 외전>
관련 홈페이지 : http://www.eif.co.uk/paik
관련 유튜브 http://www.youtube.com/watch?v=_WqdVVXTX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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