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전 KBS 사장이 무죄판결을 받은 작년 1월, 필자는 가족들에게 TV를 없애자고 말했다. 그리고 TV 수신료 납부 중단 신청을 했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공간에는 2,500원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연주 전 사장이 무죄라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언론 탄압이 시작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가 KBS 사장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감히 하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일어난 부작용 정도로 정연주 사건을 가볍게 보고 싶은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정연주 사장을 쫓아낸 것은 명백한 언론 탄압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쫓겨난 정연주 사장의 결백함이 입증되는 순간, 이제는 지상파에서 정보를 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정권 비판과 공정 보도라는 저널리즘을 포기한 KBS가 얼마 전 수신료를 인상하려던 뻔뻔한 모습을 볼 때 당시 판단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언론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촛불 집회에 대한 소식은 없고, '생활밀착형 뉴스'라는 명목으로 황당한 뉴스들만 보도된다. 지난 정권 때만 해도 민주주의, 세금, 복지에 관한 중요한 쟁점들을 뉴스 뒤쪽으로 배치해 지역 뉴스에서만 빠지게 하는 편집기법을 사용했다면, 최근에는 주요 언론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주요 사안을 아예 다루지 않고 있다. 대신 각종 사건, 사고, 날씨, 심지어 모기가 왜 없는지와 같은 생활 정보지에서나 다룰만한 내용을 8시나 9시 메인 뉴스에서 다루고 있다.
사실 우리의 선거권 행사에 장애가 있었다든지, 세금이 늘어난다든지 하는 사안이 진정한 생활 뉴스, 즉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뉴스다. 하지만 언론들은 이런 중요한 사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하는 보도는 없애고, 마치 이런 공방을 소모적인 낭비로만 비추고 있다. 주요 언론사들이 국민들에게 정치 혐오증을 유발하는 나쁜 보도만 하고 있다.
여름 내내 계속되고 있는 촛불 집회나 얼마 전 있었던 현대차 희망버스에 취재 나온 일부 언론사 기자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다. 이들은 보도를 위해 온 기자가 아니다. 만일의 사태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이다. 권력은 언론인들을 제대로 길들였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바흐라흐와 바라츠가 지적한 '무의사결정'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이들은 특정 계층의 문제를 아예 논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권력의 무서움에 대해 지적한다. 명시적인 권력 작용이 없다고 반드시 민주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권력자가 원하지 않는 문제는 언론의 영역에서 의제로 채택조차 되지 못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오마이TV가 노종면 전 YTN 기자와 했던 인터뷰의 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국정원 사태에 대해서) 지금 언론사들 일부러 입 닫고 있는 것 맞죠?"라는 질문에 노종면 전 기자는 "표현이 너무 부드러운데요. 입 닥치고 있는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한다. 저널리즘이 사라진 현 지상파들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후략)"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친일하던 관료, 독재정권에 기생하던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자신의 밥그릇만 챙겨주면 누구나 주인으로 섬긴다. 김남주 시인은 말한다. 이런 개들은 심지어 식인종이 와서 주인 노릇을 해도 성실하고 근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 같다고. 언론인이라면 지금과 같은 자발적 복종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차피 기자들은 지금 자신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에 먹칠하고 있다. 권력에 눈치 보느라 자신에게 부당한 기사를 요구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데스크 선배들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자신의 글과 보도에 대해 역사 앞에 책임지려면 싸워야 한다. 지상파 뉴스의 시청률과 신뢰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어찌 그게 윗사람들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열심히 싸우고 있는 언론인들이 아직 많이 있다. 언론인들에게 더 열심히 싸우라고 국민들이 채찍질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국민들은 지상파 뉴스들을 보지 말아야 한다. 김남주 시인의 표현을 빌려오면 지상파들은 개들만 가득하다. 그래서 개소리만 내고 있다. 이런 지상파 보지 말고 대안매체와 SNS 등을 통해서 정보를 접해야 한다. TV 속에서 공정보도는 사라졌지만, 우리가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면 지금도 충분히 정보를 습득하고 진실을 분별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접하기 힘든 세대들을 답답하다는 이유로 혹은 특정 신문만 본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함께해야 한다. 이건 세대 간의 소통이자, 정보사회에서의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주인인 국민들의 의무이다.
우리가 싸워서 이뤄야 할 목표지점은 멀리 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군부독재 시절보다 나아졌으니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김수영의 미발표 시 <김일성 만세>라는 작품에 보면 진정한 자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 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후략)"
우리는 권력자들이 허용한 만큼의 자유만 누리고 살아간다. 김수영이 시를 발표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당시보다 더 누리고 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권력자들이 허용한 자유는 언제든 다시 권력자들에 의해 철회될 수 있다. 개소리만 들리는 세상에서 진정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꿈꾼다.
정권이 바뀌면서 일어난 부작용 정도로 정연주 사건을 가볍게 보고 싶은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정연주 사장을 쫓아낸 것은 명백한 언론 탄압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쫓겨난 정연주 사장의 결백함이 입증되는 순간, 이제는 지상파에서 정보를 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정권 비판과 공정 보도라는 저널리즘을 포기한 KBS가 얼마 전 수신료를 인상하려던 뻔뻔한 모습을 볼 때 당시 판단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언론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촛불 집회에 대한 소식은 없고, '생활밀착형 뉴스'라는 명목으로 황당한 뉴스들만 보도된다. 지난 정권 때만 해도 민주주의, 세금, 복지에 관한 중요한 쟁점들을 뉴스 뒤쪽으로 배치해 지역 뉴스에서만 빠지게 하는 편집기법을 사용했다면, 최근에는 주요 언론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주요 사안을 아예 다루지 않고 있다. 대신 각종 사건, 사고, 날씨, 심지어 모기가 왜 없는지와 같은 생활 정보지에서나 다룰만한 내용을 8시나 9시 메인 뉴스에서 다루고 있다.
사실 우리의 선거권 행사에 장애가 있었다든지, 세금이 늘어난다든지 하는 사안이 진정한 생활 뉴스, 즉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뉴스다. 하지만 언론들은 이런 중요한 사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하는 보도는 없애고, 마치 이런 공방을 소모적인 낭비로만 비추고 있다. 주요 언론사들이 국민들에게 정치 혐오증을 유발하는 나쁜 보도만 하고 있다.
여름 내내 계속되고 있는 촛불 집회나 얼마 전 있었던 현대차 희망버스에 취재 나온 일부 언론사 기자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다. 이들은 보도를 위해 온 기자가 아니다. 만일의 사태만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이다. 권력은 언론인들을 제대로 길들였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바흐라흐와 바라츠가 지적한 '무의사결정'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이들은 특정 계층의 문제를 아예 논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권력의 무서움에 대해 지적한다. 명시적인 권력 작용이 없다고 반드시 민주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권력자가 원하지 않는 문제는 언론의 영역에서 의제로 채택조차 되지 못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오마이TV가 노종면 전 YTN 기자와 했던 인터뷰의 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국정원 사태에 대해서) 지금 언론사들 일부러 입 닫고 있는 것 맞죠?"라는 질문에 노종면 전 기자는 "표현이 너무 부드러운데요. 입 닥치고 있는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한다. 저널리즘이 사라진 현 지상파들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후략)"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친일하던 관료, 독재정권에 기생하던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자신의 밥그릇만 챙겨주면 누구나 주인으로 섬긴다. 김남주 시인은 말한다. 이런 개들은 심지어 식인종이 와서 주인 노릇을 해도 성실하고 근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 같다고. 언론인이라면 지금과 같은 자발적 복종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차피 기자들은 지금 자신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에 먹칠하고 있다. 권력에 눈치 보느라 자신에게 부당한 기사를 요구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데스크 선배들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자신의 글과 보도에 대해 역사 앞에 책임지려면 싸워야 한다. 지상파 뉴스의 시청률과 신뢰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어찌 그게 윗사람들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열심히 싸우고 있는 언론인들이 아직 많이 있다. 언론인들에게 더 열심히 싸우라고 국민들이 채찍질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국민들은 지상파 뉴스들을 보지 말아야 한다. 김남주 시인의 표현을 빌려오면 지상파들은 개들만 가득하다. 그래서 개소리만 내고 있다. 이런 지상파 보지 말고 대안매체와 SNS 등을 통해서 정보를 접해야 한다. TV 속에서 공정보도는 사라졌지만, 우리가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면 지금도 충분히 정보를 습득하고 진실을 분별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접하기 힘든 세대들을 답답하다는 이유로 혹은 특정 신문만 본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함께해야 한다. 이건 세대 간의 소통이자, 정보사회에서의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주인인 국민들의 의무이다.
우리가 싸워서 이뤄야 할 목표지점은 멀리 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군부독재 시절보다 나아졌으니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김수영의 미발표 시 <김일성 만세>라는 작품에 보면 진정한 자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 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후략)"
우리는 권력자들이 허용한 만큼의 자유만 누리고 살아간다. 김수영이 시를 발표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당시보다 더 누리고 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권력자들이 허용한 자유는 언제든 다시 권력자들에 의해 철회될 수 있다. 개소리만 들리는 세상에서 진정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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