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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제 결혼해요" "덩말?"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81) #21. 아메리칸 드림(2) ④

등록|2013.11.12 18:39 수정|2013.11.12 20:08

▲ LA 거리(2004. 1. 31.). ⓒ 박도


이민생활

1977년 8월부터 미국 엘에이에서 준기의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준기의 취업조건은 취업이민 스폰서 역할을 해준 엘에이의 한 병원에 의무적으로 3년을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그것도 방사선기사가 아닌 방사선기사의 조수직이었다.

준기는 그 병원에서 주로 허드렛일을 했다. 병원에서 가장 힘든 일이거나 더러운 일, 자질구레한 일 등은 모두 준기의 몫이었다. 카트로 엑스레이 찍을 환자 나르는 일, 병원 각과로 엑스레이 필름 나르는 일, 방사선실 청소, 아이들을 엑스레이로 검진할 때 그들을 달래고 붙잡는 일 등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준기의 주급도 미국인보다 훨씬 적었다. 그가 일하는 시간도 주로 밤 아니면 새벽이었다. 그 무렵 준기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에게는 그야말로 꿈이었다. 준기는 초기 이민생활이 외롭고 너무 힘들어 어느 하루 태평양 연안 샌타모니카 해변으로 가서 고국 쪽을 바라보며 속눈물을 흘린 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내레 요기서 반다시 성공하여 아바지 오마니를 만나러 갈 거야.'

준기의 미국이민 생활은 시계바늘처럼 늘 팍팍했다. 준기는 미국 이민생활에서 인천 황재웅 원장이 일깨워 주던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더욱 뼈저리게 가슴에 닿았다. 그래서 준기는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도 엘에이의 한 초급대학에 입학하여 무섭게 공부했다. 그러자 모든 잡념도 다 달아났다.

준기는 미국에 오면 최순희를 자주 만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일 년에 두어 차례, 그것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휴가, 그리고 여름휴가 때 이삼일 정도 만날 수 있었다.

그나마 때로는 상대의 사정으로 휴가를 건너뛰기도 했다. 엘에이에서 시카고까지는 비행기로도 네 시간 거리라 항공료도 만만치 않았다. 이민 초기에는 매번 미국생활에 익숙하고 주머니 형편이 나은 순희가 엘에이로 날아왔다. 그때마다 두 사람은 영혼과 몸이 함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만남은 늘 짧고도 아쉬웠다.

▲ 추위에 잔뜩 움츠린 중국군 포로(함흥, 1950. 12. 15.). ⓒ NARA, 눈빛출판사


정식 방사선기사가 되다

준기는 1980년 8월 말로 취업이민 스폰서였던 병원과 3년간 의무 근무기간이 끝났다. 그 무렵 준기는 초급대학도 졸업했다. 준기는 더 이상 병원에서 방사선기사 조수직으로 허드렛일을 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준기는 이를 악물고 정식 미국방사선기사 자격증 취득에 도전하여 마침내 이듬해 여름에는 그 자격증을 땄다.

준기는 마침 엘에이의 다른 큰 병원에서 방사선기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다. 그러자 그 병원에서 정식 방사선기사로 채용해 주었다. 준기는 이민생활 4년 만에 비로소 자기 전공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자 주급도 껑충 올랐다. 준기는 그때부터 엘에이 근교에다 자그마한 아파트도 얻었고, 저축액도 다소 늘릴 수도, 딸에게 학비도 보내줄 수 있었다. 그제야 주말이면 엘에이 근교에 관광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준기와 순희는 서로 번갈아 상대지역을 방문했다. 준기가 크리스마스휴가 때 시카고를 찾아가면, 다음 해 여름휴가 때는 순희가 엘에이로 찾아왔다. 두 사람이 만날 때는 주로 준기가 요리를 했다. 순희는 매번 준기의 요리 솜씨에 감탄했다. 준기는 구미가축병원 조수시절부터 자취생활을 했기에 요리가 손에 익었다. 그뿐 아니라 준기에게 요리는 하나의 취미생활이었다.

1981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준기가 시카고로 가자 마침 순희 아들 존이 여자 친구 수잔(Susan)을 집으로 데려와 자연스럽게 네 사람이 처음 만났다. 그때 준기의 요리로 네 사람은 크리스마스 휴가를 매우 푸짐하고 즐겁게 보냈다.

"당신 솜씨는 베리 굿이에요. 존도, 수잔도 당신 요리 솜씨에 매우 감탄했어요."
"기래요. 내레 이참에 아주 요리사로 전업할까요?"
"그거 굿 아이디어예요. 우리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사람은 자기 탤런트(재능)대로 살아야 성공할 수 있어요."

▲ 한국의 소녀들이 미군 방문 환영의 뜻으로 춤을 춰 보이고 있다(1953. 12.23.). ⓒ NARA, 눈빛출판사


교통사고

1982년 여름휴가 때에는 순희가 엘에이로 오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런데 약속 날짜가 이틀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고,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준기는 불안한 나머지 다음날 곧장 시카고로 날아갔다.

▲ 피난민촌 어린이들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있다(문산,1952. 11. 22.). ⓒ NARA, 눈빛출판사

천만뜻밖에도 순희는 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 닷새 전, 순희는 아침 출근길에 짙은 안개로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골절상을 입고 있었다.

"와 연락하디 않았디요?"

"걱정할 것 같아…."
"매우 섭섭합네다. 기건 나를 가족으로 생각디 않은 거야요."
"죄송해요. 내 생각이 짧았어요."
"앞으로는 기러디 마시라요."

준기는 순희를 퇴원시킨 뒤 집에서 치료했다. 오랫동안 외과의사 조수로 일해 온 준기가 아닌가. 준기는 온갖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순희는 준기의 간호와 물리치료를 받자 몰라보게 좋아졌다. 일주일이 지났다.

"당신이 해준 밥을 먹고, 당신의 마사지와 물리치료를 받으니까 매우 행복해요. 내 골절상이 다 낫거든 우리 이제 결혼해요."
"뭬라구?"

준기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우리 이제 결혼하자구요."
"덩말?"

그 말에 준기는 아이처럼 두 손을 치켜들며 펄쩍 뛰었다.

▲ 죽창으로 무장한 마을 청년단원들(1950. 11.). ⓒ 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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