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껍데기는 추리소설, 사실은 본격 심리소설?

[서평]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정근>

등록|2013.09.10 20:07 수정|2013.09.11 12:25

▲ <비정근> 책표지. ⓒ 살림

한 아이가 왕따를 당했다. 하지만 아이가 직접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아주 소심하기에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일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똑같은 폭력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그 수단이 될 수 있는 체육 비품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이는 소설 <비정근>에 나오는 '나가이'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면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은 왕따 이야기다. 하지만 작가가 왕따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패턴은 기사와는 좀 다르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처한 상황, 막막함, 처연함까지 눈앞에서 읽어내듯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

바로 이런 면 때문에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 내 위안 받는다. 아무 이유 없이 가해지는 폭력으로 상처받아도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싫고 복수하기도 싫지만 이대로는 살 수 없는, 그 처절한 그 순간을 누군가 정확하게 이해해주는 것을 옆에서 듣는다면 얼마나 위로를 받겠는가.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초등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살인사건 해결이라는 외피 안에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 보고 겪어봤을 여러 가지 사건들을 샅샅이 해부해 그 속에서 어떤 감정들이 오고 가는지 잘 그려내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하마구치라는 교사가 체육관에서 죽은 채 발견되고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의 가슴 아픈 사연을 엮어 보여주는 식이다. 이는 교사가 죽는 그 순간 '나가이'가 왕따 당한 설움을 체육 비품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풀고 있는 순간과 일치시켰기 가능한 것이다.

자칭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인 교사인 '나'는 아이들이 행동 하나하나에도 관심이 많으며 예리하다. 이런 성격 탓에 '나가이'가 왕따 당하는 장면을 하나둘 발견하면서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배드민턴의 셔틀콕 깃털을 포착해낸다.

이후 '나'는 왕따 피구를 통해 직접 '나가이'의 굴욕을 마주보며 확신을 갖는다. 반 전체가 두 팀으로 나뉘어 시합을 하고 있는데 한쪽 팀은 살아남은 아이가 나가이 후미히코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야마구치 다쿠야가 리더로 있는 상대 팀은 나가이에게 공을 던져 맞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들끼리만 공을 던지면서 나가이 후미히코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나가이 후미히코가 견디다 못해 일부러 맞아서라도 이 왕따 놀이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그들은 절대 그에게 던지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나가이 팀 리더 사이토 쓰요시는 그의 의도를 읽어내고 크게 화를 냈다.

"야, 나가이! 왜 가만히 서 있어? 일부러 공에 맞기만 해 봐. 죽을 줄 알아."

그 말에 놀라 나가이는 숨이 헐떡거리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웃어댔다.

사건이 있던 날, 비 때문에 다음 날 체육 수업에서 피구를 할 것을 예상했기에 공을 모조리 찢고자 했던 '나가이'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그가 하마구치 교사가 죽기 전 남긴 단서를 칠판에 옮겨놓는 작업을 했음을 알아내면서 사건도 해결된다.

기간제 교사인 주인공 '나'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폼 안 나고 오래 할 일도 아니며 더욱이 기간제 교사 따위 계약직과 같다. 필요 이상으로 다른 교사들과 친해져 봐야 소속감을 느낄 수도 없고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자신만의 책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정규직인 다른 선생님과는 다른 대접을 받으면서도 오래 할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학생 입장에서 그들의 상처를 끄집어내어 치료해주는 사람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학생들의 마음을 다시 돌려놓기 위해 그들이 제안한 일을 하려다 결국 목숨을 잃은 한 교사 이야기에 목이 메인 학생들에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저기, 얘들아. 인간이란 약한 존재야. 그리고 교사도 인간이고. 나도 약해. 너희들도 약해.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가면서 살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은 새로운 소재와 독특한 구성을 발굴해내는 데 재능이 있다는 점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인기 없는 사람을 투표하자는 잔인한 게임에서 시작된 자살 소동 사건이다. 가볍게 시작했을 이 투표로 인해 한 아이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뻔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춘기 시절 아이들에게 있어 누군가에게 소외받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잘 보여준다. 어른이 되어 보았을 땐 별거 아닌 일이 아이들에게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일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심지어 진짜 인기가 없는 애한테 "너 인기 없어." 라고 말하면 얼마나 힘들 지 아는 아이들로서 장난의 대상으로 인기가 있는 아이를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아주 절망적이지는 않구나…. 라는 안도감 역시 주는 에피소드였다.

사춘기 시절에 으레 해봤을 고민이나 아픔들을 담담하게 잘 그려내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나는 이미 잃어버렸거나 잊고 싶었던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잘 받지 않는 단단함에 비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소하다는 이유로 놓쳐가고 있는 지에 대한 각성 또한 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뜻 깊다.
덧붙이는 글 <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씀 | 김소영 옮김 | 살림 | 2013.07. | 1만3000원)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