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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안방 도청'은 초보 정보요원의 현장 실습쯤 될까

등록|2013.09.11 11:15 수정|2013.09.11 11:16
요 며칠 어떤 사진 한 장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의 남소연 기자가 '오마이포토'에 찍어 올린, '화분도 내놓아야 하는 슬픈 현실'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그 '슬픈 현실'의 '피해자'인 화분 다섯 개다. 이들 주인공은 중년의 한 여인을 배경으로 중앙에 느런히 선 채 전경화해 있다. 맨 왼쪽의 와인색 화분은 수양매(垂楊梅)가 심긴 우리집 화분과 똑같이 생긴 놈이다. 그래서 더 머리에 남았을까.

화분 주인은 국회 법사위원장인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다. 며칠 전 박 의원은 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위원장실 안에 있던 화분을 모두 복도에 내놓았다. 도청 가능성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난히 덩치가 큰 예의 와인색 화분이 의심스럽다(?!) 그 속이라면 어지간한 도청 장치는 발견하기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날 박 의원은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참 슬펐다. 요즘 야당의원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

국회의원이 '국개의원'으로 조롱받는 일은 예사다. 그래도 그들은 엄연히 민의의 대변자다.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다. 살아 움직이는 헌법 기관이기도 하다. 그런 국회의원들 중의 일부가 도청 가능성 때문에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 안에 화분 하나 제대로 놓지 못한다?

도청과 감시 테크놀로지는 빅 브라더가 경외할 정도로 나날이 발달하고 있다. 도청과 감시의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도 많아졌다. 그들을, 1988년 어느 날 생방송 중인 MBC 뉴스데스크 스튜디오에 들어와 "내 귀엔 도청장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고 외친 한 남자의 후손들로 보아도 될까. 도청과 감시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건 분명하다. 허나 지금은 통제와 감시가 일상적이었던 과거의 군사독재시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박 의원의 하소연이 괜한 엄살처럼 들렸다. '요즘 야당의원들' 운운하는 대목이 특히 그런 심증을 굳게 했다. 그는 트위터의 글 마지막에서 "이것이 국민행복시대인가?"라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이쯤되면 야당 말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박근혜 정부를 향한 정치 공세쯤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다른 몇몇 야당의원들도 화분을 모두 바깥으로 내놨다지 않은가. 그들 모두가 탄압받는 야당 의원임을 보여주기 위해 '모의'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저 한 순간의 엄살로만 보고 넘기기에는 꺼림칙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군사독재시대의 어두운 유산을 보여주는 일련의 징후적인 사건들이 매일같이 터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예의 사진속 박 의원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서늘한 불길함을 느끼는 이가 나만이 아닐 것 같다.

고색창연한 내란죄가 삼십여 년 만에 부활하여 현직 의원을 집어삼키고 있다.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하는 30대 저술가는 학생으로부터 "반자본주의 및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며 국가정보기관에 신고를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무려' 트위터 '농담' 한 마디에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 법정까지 서게 된 20대 청년도 있다. 실내 행사를 불허한 대학 당국에 의해 야외에서 강연을 하게 된 전직 경찰대 교수의 사례는 또 어떠한가.

보수 우익 성향의 필자들이 참여한 역사 교과서는 수많은 오류와 부실 혐의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의 검정심사를 거뜬히 통과했다. 영화 상영 중단을 요구한 적도 없는 보수단체를 들먹이며 한 영화의 상영 중단을 결정한 거대 복합상영관도 생겨났다. 그 덕분에 우리들 머릿속 어휘사전에는 폭압적인 일제 강점기의 야만을 보여주는 '임검석'(일제시대 영화 검열을 나온 순사들의 위해 마련된 좌석)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었다.

어느샌가 우리는 행동에 옮기지 않은 어떤 말과 생각, 심지어 '농담' 한 마디조차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민족과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저주가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해외토픽감에나 어울릴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정색한 표정으로 달려와 우리 뒤통수를 내려치고 있다.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중앙정보부(중정)는 국정원의 1970년대식 버전이다. 중정은 당대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그만큼 견제하거나 관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를 위해 감시와 통제, 도청 등은 그들의 최우선적인 업무들 중 하나였다.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이었던 고상만 선생의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2012) 한 토막을 보자.

장준하를 감시한 중정의 이른바 '행적 일지'는 정말 놀라웠다. 그야말로 장준하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기록했다. 누구와 몇 시에 어디서 어떤 내용으로 만났고 집에 출입한 이들은 누구인지가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장준하의 안방에서 가족들이 나눈 대화마저도 모두 적혀 있었다. 어떤 방법이었기에 이렇게 철저하게 감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무섭고 두려울 지경이었다. (268쪽)

그로부터 40여 년이 흘렀다. 중정과 안기부를 뒤이은 국정원이 가진 기술은 중정 시대의 요원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첨단을 자랑할 것이다. 안방 대화 도청은 초보 정보요원들의 현장 실습쯤 되지 않을까.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정신 약물을 이용해 머릿속 생각까지 뜯어내 조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는 1만여 명의 정예 정보요원과 1조 원 가까운 돈도 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과 생각을 스스로 검열하고 통제해야 살아야 하는가.

문제의 근원에 국정원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게 정녕 심각한 문제다. 국정원은 있지만 그들의 '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김직원'과 '이국장'으로만 존재한다. 어떤 문제의 현장에서는 기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도, 티비 화면과 신문 사진 속에서는 음영 처리된 흐릿된 이미지로 처리된다. 있으면서도 없는 익명적인 대상들로 국민들의 머리에 각인된다. 그들이 두렵고, 우리가 스스로를 검열·통제하거나 조심하는 게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화분을 내놓은 박영선 의원처럼, 그렇게 스스로 조심하고 알아서 살피는 게 과연 올바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 2012)의 마지막 장에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는 표제를 붙여 놓았다. 그렇다. 우리는 반항해야 한다. 반항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우리는 벌거벗은 인간, 곧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물실의 화분 도청을 의심하는 박영선 의원은 수사기관에 즉각 수사를 의뢰하라. 국회의원들이 정체 불명의 도청 때문에 자신의 사무실에 화분을 놓을 수 없게 된 상황이야말로 심각한 국기 문란 사태 아닌가. 정치공학적인 하소연이나 엄살이 아니라면 당장 사무실 화분 도청 '사태'를 경찰이나 검찰에 알리라. 지금 보이지 않는 감시와 통제의 공포에 떠는 수많은 이들이 숨을 죽인 채 바라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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