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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놀자'고 만든 마을, 진짜 있었구나

[서평] 가족·이웃·지구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이야기 <마을의 귀환>

등록|2013.09.14 14:38 수정|2013.09.14 14:38

▲ <마을의 귀환>(오마이북) 책 표지 ⓒ 오마이북

누구나 마음 속에 '언젠가 난 이것을 할 거야'에 관한 목록이 있을 것이다. 감춰둔 꿈 또는 미래의 계획. 현실이 구질구질할 때, 견디기 힘들 때, 혼자서 은밀하게 꺼내보고 위안을 받는 그런 계획 말이다.

내 경우에는 '귀농'이 그중 하나였다. 언젠가 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곳에서 벗어나 시골에 가야지. 작은 집에 살면서 농사를 조금씩 짓고, 개와 고양이와 닭을 키우면서 살아야지. 그런데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대체 언제? 내 배우자가 될 사람은 그것을 원할까. 심지어 나는 정말로 그걸 원하는 게 맞을까.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싶은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이번 여름휴가 때, 남자친구와 함께 경남 하동 '최참판 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한옥 체험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를 재현해놓은 초가집들 중 '김훈장 댁' 문간방을 배정받았다. 그날은 종일 날씨가 흐렸고, 오후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밤이 되자 아귀가 안 맞아 꽉 닫히지 않는 문틈으로 온갖 벌레들이 날아들었다. 바닥에 꺼내놨던 티셔츠를 입자 목 언저리에서 뭔가 툭 떨어졌는데, 가운뎃손가락만한 도마뱀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밤에 화장실을 가려고 마루에 나왔을 때였다. 우리가 먹고 방문 앞에 내놓은 치킨 봉지를 고양이가 다 찢어발겨 놓았는데, 그 뼈에 두툼한 지네들이 붙어 있었다.

밤새 뒤척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짐을 꾸려 김훈장 댁을 떠나면서, 남자친구는 내게 "이래도 귀농이 네 꿈이라고 말할 테냐", "네가 언젠가 귀의할 농촌은 벌레가 없는 곳이냐", "적어도 그 벌레를 잡아줄 사람은 내가 아닐 것"이라고 다그쳤다. 사실 여행이고 뭐고, 깨끗하고 벌레 없는 서울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자연스러운' 풍경에서 굉장히 거리가 먼, 멸균 상태의 인위적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당장 실행'하는 용감한 사람들 이야기

▲ 삼각산 재미난 마을의 꿈꾸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김태균 어린이. 지난해 8월 7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재미난 카페 유리벽에 친형이 만든 작품이 걸려있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 유성호


'언젠가 난 이것을 할 거야'라는 말. 거기에 담긴 긍정성과 부정성, 현실 도피적 성격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책 <마을의 귀환>(오마이북)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내게 이 책은 미래의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바로 당장, 자신의 꿈을 현실에 펼쳐놓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혼자서 은밀히 꺼내 위안받는 몽상이 아니라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책 속에 있었다.

<마을의 귀환>에는 서울 각지의 다양한 마을공동체 17곳, 영국의 마을공동체 9곳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2012년 8월부터 2013년 4월까지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특별기획 '마을의 귀환'을 재구성하고 보완해서 묶은 것이다. 책 속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모였을까. 무엇을 원했기에 이 거대하고 바쁜 도시에서 수고롭게 '마을'을 만들겠다고 나선 걸까. 책을 읽어나가면서 궁금증이 하나둘씩 풀렸다. 총 26곳의 마을은 저마다 구체적이고 생생한 전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주거, 새로운 형태의 경제·육아·예술 등등.

강북구에 있는 '삼각산 재미난 마을' 편에는 밴드를 결성해 늦은 밤 모여 연습하는 다섯 명의 중년이 등장한다. '언젠가'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들이 그 막연한 꿈을 현실로 옮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들은 돌봄 공동체 '꿈꾸는 어린이집'에서 학부모로 만났다.

'아이들은 무조건 재밌게 놀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한 그들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졸업할 나이가 되자 '재미난 학교'라는 대안 초등교육기관을 세웠다. 육아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 생각을 구체적인 행위로 변모시켰고,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 "옆집 엄마가 뭘 잘하는지, 아이들이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는지 속속들이 잘" 아는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한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마을에서 살지 않았다면 아이들한테 '올인' 하는 삶을 살았을 거예요. 공부만 하라고 다그치고…, 아마 제 삶은 없었겠죠. 지금처럼 남편과 함께 인생이나 사회를 논할 수 있었을까요? 그저 아이 공부시키고 학원 보내는 일만 얘기했겠죠."(본문 중에서)

내 아이부터 시작해 지구까지 생각하는 마을

▲ 영국 런던 핀스버리 공원(Finsbury Park) 트랜지션 타운의 매니저인 조(Jo)가 회원들이 가꾸고 있는 텃밭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커뮤니티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식물이름 교육, 목재 재활용, 텃밭 가꾸기 등의 활동을 통해 관계맺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육아나 취미 같은 '일상 밀착형 바람'들은 비교적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을 듯하다. 그것 말고, 조금 더 큰 차원에 속해 있는 '정의', '가치관' 같은 것들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마을도 있을까. 동작구 '성대골 마을'과 영국의 '리메이커리' 그룹, '트랜지션 핀스베리 파크'의 사례는 작은 마을이 지구 온난화를 막고 에너지 자립으로 가는 거대한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대골 마을 역시 육아 고민을 함께 나누는 엄마들의 모임에서 출발했다. 이 용감한 엄마들은 직접 모금 활동에 나서 모은 돈으로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고, 성대골 마을학교까지 만들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보고 충격을 받은 엄마들은 환경단체에 의뢰해 원전과 에너지 관련 특강을 듣고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배움은 '성대골 절전소'라는 에너지 절약 기획으로 구체적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 기획은 또한 적정 기술에 대한 관심·탈핵학교·성대골 에너지 축제로 이어졌고, 지금 성대골은 한국 최초의 에너지 자립 마을을 꿈꾸고 있다. 자기 집 아이들의 미래를 고민하는 엄마들의 마음이 확장·증폭되면서 지구의 미래를 고민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런던 '리메이커리'는 한국의 성대골과 비슷한 점이 많다. '리메이커리'는 기후 변화에 대비하고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에너지 자립 마을 운동을 하는 단체로, 지역의 자원을 재활용하고 숨은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주민들과 함께 지역에 있는 더럽고 방치된 공간을 다시 꾸미고 관리한다.

'트랜지션 핀스베리 파크' 역시 기후 변화에 관심과 우려를 가진 사람들의 활동 거점이다. 몇몇 사람이 나서서 지역 주민들을 모아 에너지 축제를 여는 등 마을의 에너지 자원을 올바로 쓰고 재활용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핀스베리 파크 매니저 조는 이렇게 말한다.

"기후 변화를 인정하는 일은 친구의 죽음을 인정하는 과정과 비슷해요. 처음에는 부인하면서 친구가 없어진 사실에 혼란을 느끼지만, 결국 이를 받아들이고 슬퍼하죠. 사람들은 기후 변화라는 현실에 슬퍼하고 무기력함을 느끼잖아요. 하지만 그들이 무기력함을 이겨내고 작은 행동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울 수 있지 않을까요?"(본문 중에서)

'언젠가'라고 말하지 말고 '지금 바로'

무기력함을 이겨내고 작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 어렵지만 다른 사람과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함께하는' 것.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한 단계 한 단계 과정을 밟는 것. 무엇보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이것이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마을 만들기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해 자꾸 질문을 던지게 됐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것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여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무엇을 꿈꾸고 어떤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며, 일단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능성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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