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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콜로세움, 기독교 박해의 상징이었다?

[세계문명기행 V : 로마문명이야기⑥] 콜로세움 이야기(3)

등록|2013.09.25 11:03 수정|2013.09.25 11:03

▲ 콜로세움의 중앙 무대와 그 지하 모습, 지하실에는 각종 기계장치와 맹수 우리가 있었다. 교묘한 장치에 의해 경기 도중 맹수가 땅 속에서 솟구쳐 나오기도 했다. ⓒ 박찬운


이제 콜로세움을 좀 설명해 보자. 이것은 5만 명 이상의 관중이 들어갈 수 있는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큰 원형경기장이었다. 바닥면적이 2만4천제곱미터, 길이 189미터, 폭 156미터의 타원형 극장이다. 외벽의 높이는 48미터이고 외벽 둘레 545미터이다. 콜로세움의 중앙에는 타원형 무대가 있는데 길이 87미터, 폭 55미터이고 이것은 높이 5미터의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내부의 관람석은 가파르게 경사져 있어 관중은 중앙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잘 볼 수 있었다.

콜로세움의 수용 인원이 5만명이 넘는다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들어가고 나가고 했을까. 현대식 경기장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 비밀은 출입구의 수에 있었다. 무려 76개의 출입구가 있어(각각의 출입구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현재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23번부터 54번까지 문에는 그 번호가 아직도 보인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들어와도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도록 했다. 어떤 자료에는 화재가 나는 경우 관객이 콜로세움 밖으로 탈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는 상상이 안 간다. 만일 우리나라의 잠실 스타디움에서 대형 화재가 났다 하자. 혼비백산한 수만 명의 관중이 어떻게 그 화마에서 단 15분 만에 빠져나올 수 있을까. 현대의 각종 소방시설도 콜로세움의 시설과 비교하면 유치한 수준에 불과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콜로세움의 관중석은 철저히 로마 사회의 신분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남쪽과 북쪽의 가장자리에 있는 특별석은 중앙무대 전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황제 가족의 전용 특별석이었다. 그 옆으로 같은 층에는 원로원 귀족들이 앉을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용 의자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지금도 일부 좌석에는 원로원 귀족의 이름이 보인다. 아마도 귀족들에겐 지정석이 주어졌던 모양이다.

원로원석 위로는 원로원 귀족 아닌 귀족들이 앉았고, 그 뒤로 로마의 자유시민이 앉았다. 일반 시민석도 둘로 나뉘어졌는데 중앙무대에 좀 더 가까운 아래쪽은 부유 시민이, 그 위는 가난한 시민이 앉았다. 관람석의 맨 위는 가장 나쁜 자리인데 여기도 일군의 사람들이 앉았다. 바로 여자와 노예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신분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그 재미있는 경기를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난할수록 부자들이 열광하는 것에 대해 더 큰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콜로세움 중앙 무대 아래에는 지하실이 있는데 이것은 일련의 지하통로로 이루어진 것으로 공연에 쓰였던 야생 맹수와 기계장치가 보관되었던 곳이다. 조련사가 공연 중에 지하에서 맹수가 튀어나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관중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콜로세움 꼭대기에는 240개의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두꺼운 천을 달아 대낮 공연을 할 때 뜨거운 햇볕을 막았다고 한다.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이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로마식 돔 천정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제 상상해보자. 2천년 전 로마의 한가운데서 검투사들이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을 할 때 관중은 열광했을 것이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 아래 관중이 토해내는 뜨거운 열기가 하늘로 뿜어져 나갈 때 콜로세움의 하늘이 스르르 가려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천막이 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본 관중은 또다시 열광한다. 이것이 바로 2천년 전 콜로세움의 모습이다.

콜로세움은 로마를 여행하는 모든 관광객의 필수 코스다.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콜로세움을 보면 아직도 로마제국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난다. 그것이 수많은 노예들의 피와 땀의 산물일지언정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것은 틀림이 없다. 유네스코도 그것을 인정하여 198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구 상에 남아 있는 인류 문명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이것을 선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는다.

로마 기독교 박해의 상징?

▲ 장 레온 제롬 <기독교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 ⓒ 위키피디아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롬이 그린 <기독교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라는 그림을 보면 원형경기장 내에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기도를 한다. 그리고 한편에는 밀림의 왕자 사자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기도가 끝나면 사자 밥이 된다는 이야기다. 과연 이런 장면들이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많이 있었을까. 적어도 그러한 일들이 콜로세움에서 공식적으로 있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연성은 있다.

차제에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에 대하여 잠시 말해보자.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은 기독교 쪽의 입장과 사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의 공식 입장은 수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한다. 네로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초기 기독교에서 대표적이며 철인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기 250년 데키우스 황제는 박해허가장이라는 것을 발부하여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 바로 이 사람이 기도교인 박해로 유명한 데키우스 황제(위키피디아 공개 사진). ⓒ Mary Harrsch


하지만 많은 사가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매우 신중한 견해를 내놓는다. 박해는 인정하지만 그 정도(순교자 수)에 있어서는 기독교 쪽에서 주장하는 만큼 많지 않으며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제국 입장에서는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의 입장이면서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에서 취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로마는 대체로 종교에서 포용정책을 취했다. 속주의 다양한 종교를 금지하기보다는 묵인하였다. 그것이 로마제국이 만들어져 수백 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만일 로마가 유피테르(주피터)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인의 신앙과 황제숭배사상을 절대화하여 속주민의 신앙을 억압했더라면 로마의 제국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집트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동방의 미트라 및 조로아스터교 나아가 유대교가 모두 로마에서 성행할 수 있었다.

로마(서로마)의 쇠망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종교적 원인도 한몫했을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에 어느 시기부터 유일 신앙을 받드는 종교가 들어와 다른 종교는 모두 사탄의 종교라고 주장한다면 마찰이 없을 수가 없다. 더욱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한 로마사회에 그것을 부인하는 세력이 성장한다면 로마의 지배세력이 그것을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번은 로마쇠망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관습과 교육의 신성한 유대를 끊어 놓았고, 국가의 종교 제도를 침범했으며 선조들이 진리로서 믿고 신성한 것으로 숭배해 온 것들을 건방지게도 멸시했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가정과 도시와 지역의 미신들을 모두 멸시하며 거부했다. 그리스도 교인 전체가 뭉쳐서 로마의 신들, 제국의 신들, 인류의 신들과의 그 어떤 친교도 거부한 것이다." (<로마쇠망사1>, 민음사, 626쪽)

예수가 사형을 당한 것은 이런 문제가 일어나기 전이기는 하지만 그 맥락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당시 퍼뜨린 사상은 당시 로마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로마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로마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 사후 예수의 말씀을 절대화하는 사람들, 곧 기독교인들이 제국 곳곳에서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제국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마의 정신세계를 담당했던 다신교는 기독교와의 경쟁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유약한 것이었다. 다신교는 그 종교이론에 있어 매우 잡다하며 느슨하고 모호했다. 이 부분에 대해 기번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온갖 미신적인 공상들을 제멋대로 받아들였다. 또한 살아가면서 처하는 우발적인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신앙심의 깊이는 물론이고 신앙의 대상까지도 결정했다. 수많은 신들 가운데서 숭배 대상을 연달아 바꾸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신에게도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하고 생생한 열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로마쇠망사1>, 민음사, 602쪽)

결국 로마는 멸망에 앞서 제국 곳곳에서 종교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초기에는 황제의 물리력이 기독교인을 압도했지만 그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를 지배한 다신 신앙은 유일 신앙으로 똘똘 뭉친 기독교인들의 열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 로마의 지도층마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니 로마제국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로마제국을 지탱한 로마의 정신적 기초가 흔들리면서 로마는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나는 로마 지배계층이 기독교인을 박해한 근본적인 동인을 발견한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도 로마의 종교관은 대단히 중요한 가치였다. 로마의 종교는 로마를 지탱하는 정신적 기초였다. 그러니 그것이 밑바닥부터 망가지고 있을 때 로마의 지배계층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의 또 다른 대작이 <로마사 논고>인데, 그는 이 책에서 로마는 종교를 기초로 국가를 확립했고, 신에 대한 외경이 로마만큼 강한 나라가 없었다고 기술했다. 이런 국가에서 확립된 종교관에 대한 경멸은 국가의 파멸을 가져온다고도 생각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기원 후 313년까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 전역에서 박해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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