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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지 10년, 이제야 말하는 이문구의 진짜 모습

[2013 전국투어 - 대전충청⑤] 조선의 마지막 '선비', 이문구를 추억하다

등록|2013.09.24 14:02 수정|2013.09.24 14:17
<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9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대전충청입니다. [편집자말]
노무현이 '승산 없어 보이던' 대통령선거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2002년. 노 전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던 2003년 2월 25일을 '다른 이유' 때문에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한 인터넷신문의 3년차 햇병아리 문학담당 기자. 낡은 취재수첩은 그해 2월 26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월28일 오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고 명천 이문구 영결식>.2월28일 오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고 명천 이문구 영결식>. ⓒ 홍성식


'어제, 핍박받고, 고통받아온 자들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 취임식. 바로 그날 밤 10시 40분. 조선의 마지막 선비가 세상을 뜨셨다. 한국문학의 왕이 '崩御(붕어)'했다. 명천 이문구(향년 62세)의 타계는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능수능란한 충청도 입말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장엄하고 우뚝한 문장의 산맥 하나를 온전히 홀로 만들어낸 사람. 한국어로 축조된 문학이 가닿을 수 있는 '스타일리시'의 한 절정을 보여준 작가.

이문구는 <매월당 김시습>과 산문집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를 통해 금도(襟度)를 지키는 조선 선비의 길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또한, 그는 독재자 박정희가 지배하던 어둠과 공포의 유신시대, 두려움을 떨쳐내고 문학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작가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이었다. 선비와 투사가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증명한 기개.

작품집 <관촌수필> <우리동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질박한 삶을 오직 이문구만이 구사할 수 있는 휘황한 문어체와 유장한 문장을 통해 빚어낸 한국문학의 깨질 수 없는 비석이다.

이에 반론을 제기할 작가와 평론가는 지난 시절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문구 소설어 사전>의 저자 민충환은 '그의 문체는 한국의 평단 전체가 달라붙어 연구해도 모자랄 풍요로운 언어의 숲'이라고 했을까?

이문구가 사라진 지 10년 하고도 몇 개월. 고저와 장단이 입에 붙은 노래처럼 매끄럽던 그의 문체와 어떤 빼어난 편집자의 교정과 교열도 필요로 하지 않던 완벽에 가까운 문장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 그 시간동안 한국문학은 옹색하고 졸렬해졌다. 어떤 소설가도 그를 대신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해 안타까움은 더한다.

터무니없이 조잡한 내 글재주로 이문구의 문학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동시대를 함께 살아낸 작가들에게 들었고, 직접 겪었던 '이문구에 관한' 이야기 두 개를 소개하는 것으로 아직도 그와 그의 소설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아쉬움과 슬픔에 동참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김동리와의 인연

이문구의 가족사는 참혹한 한국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문구의 부친은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는다. 그의 두 형 역시 같은 이유로 고향 인근 대천 바다에 수장됐다.

난리통에 아들과 손자 둘을 한꺼번에 잃은 상투머리 이문구의 조부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죽었다. 이문구의 역작 <장한몽>은 이데올로기가 야기한 전쟁 탓에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유년을 잃어버려야 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이처럼 무참하게 상실된 유년과 부재한 아버지에 관한 그리움을 이문구는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소설가 김동리를 통해 일정부분 위로받는다. 김동리는 학기말 시험 문제로 '이문구의 소설에 관해 논하시오'라는 문제를 낼만큼 '상처 많은 스무 살 청년 이문구'를 아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김동리는 유신을 두둔하던 대표적 우익작가 중 한 명. 불협화음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김동리와 이문구의 인연이 30년 가까이 지속되던 1980년대 후반. 한국문단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작가들과 '예술적 순수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 주장하는 이들로 갈려 이른바 '순수-참여 논쟁'이 뜨거웠다.

그즈음 펜클럽대회가 개최된다. '현실 참여'를 주장하던 작가단체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의해 이문구의 스승이자 '문학적 아버지'인 김동리가 참혹하리만치 비판을 받는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이문구가 발기인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이름을 바꾼 단체. 당연지사 이문구는 그 단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문구의 고민은 깊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정당성과 명분은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가졌다하더라도, 그 단체가 '아버지'를 거부한다면…. 이문구는 결국 자신이 주도해 만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를 탈퇴한다. 김동리를 향한 세상의 손가락질에 자신은 동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해 세상의 큰 흐름을 거스른 것'이란 비판이 비등했다. 그러나, 이문구는 어떤 힐난에도 의연했다. 누군가는 '소아(小我)를 위해 대의(大義)를 버렸다'고 말했지만, 소아와 대의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 쉽게 양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문구에게 있어 대의란 '아버지와 스승은 같다'는 것이었으며, '아무리 위대한 이데올로기도 인간을 제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2003년 이문구의 빈소를 찾기 위해 캐나다에서 18시간을 날아온 소설가 박상륭은 이문구를 "군자였고, 선비였으며, 대인이었다"고 회고했다. 40년 이상의 세월을 너나들이로 지내온 노작가가 왜 이런 평가를 했는지 유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이야기] <조선일보>가 주는 상을 받다

▲ 발행이 취소된 실천문학의 이문구 발행인이 정종진 문공부 신문과장에게 발행 목적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1985.8.22 ⓒ 연합뉴스


2000년은 언필칭 '안티 조선일보 운동'이 본격화된 해다. 그해 가을. 이문구는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로 조선일보사가 주관한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수상자가 결정되기 전부터 조선일보가 내세운 '종신 심사위원 제도'는 문단 내외부의 거친 비난을 받았고, 황석영은 "내 작품이 동인문학상 수상 후보로 언급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안티조선' 운동까지 맞물려 '동인문학상'은 이미 단순한 문학상을 넘어 누구도 쉽게 만질 수 없는 한국문화계의 '뜨거운 감자'로 익어가고 있었다. 이 '뜨겁고 위험한 감자(상)'를 이문구가 조용히 집어 들었다. 이문구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이 눈에 띄게 늘었다.

'죽은 친구(조태일 시인)의 제자'라는 인연까지 들먹여가며 기자 초년병이던 내가 이문구를 인터뷰했다. 제목은 '조선일보가 준 상을 왜 받았냐고?'.

예상했던 대로 인터넷이 뜨거운 기름에 살아있는 생선을 던져넣은 듯 난리가 났다. 1만여 명 이상이 기사를 읽었고, 이와 관련된 100여 개의 네티즌 의견이 그 아래로 줄줄이 달렸다. 기사가 누군가에 의해 문예지 <창작과비평> 온라인게시판으로 옮겨졌고, 창작과비평 게시판에선 이문구와 동인문학상에 관한 논쟁이 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됐다.

기사가 나가고 며칠 후엔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젊은 문학평론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일간지에 칼럼을 실어 이문구의 동인문학상 수상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거기엔 내 기사의 몇몇 대목이 인용되고 있었다. 난감했다. 이문구는 내가 존경했던 조태일 시인의 둘도 없는 문우. 돌아가신 스승 볼 면목이 없었다.

그 기사를 쓴 후엔 작가들과의 통화도 어려웠다. 겨우 전화가 연결된 문인들은 "이문구 선생의 동인문학상 수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거죠"라는 말부터 꺼냈다. 인간적 도리와 상반된 정치적 입장 사이에서 힘겨워하던 문인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한국형 촌극'의 상연 기간이 길었다.

그런데 놀라웠다. 그 같은 '난리 아닌 난리'가 났음에도 괴발개발 쓴 기사의 가장 큰 피해자인 이문구는 그 일에 관해 일언반구가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문구는 인터넷 사용에 서툰 사람임을. 그러나, 그가 귀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앞 다퉈 전해줬을 인터넷에서의 걸러지지 않은 막된 욕설과 비이성적인 힐난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인데. 

이문구가 마치 남의 일처럼 그 기사에 관해 잠시잠깐 언급한 것은 이른바 '2000년 가을 동인문학상 파동'의 잡음이 수면 아래로 온전히 가라앉은 겨울, 마포강변의 목로에서였다. 그날 그 자리엔 이문구와 50대 시인 하나, 내가 동석했다. 시인이 말했다.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네 기사를 보면 인터뷰 상대에 대한 애정이 읽혀."

면구한 탓에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나는 이미 취했음에도 스스로 빈 잔을 채우려 술병을 들었다. 그때 이문구가 작은 음성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런데 나는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요."

10년 전 바람 차가웠던 2월. 이문구의 유언이 기억난다.

"내 이름을 운운하는 문학상을 만들지 말고, 문학비도 세우지 말라."

그랬다. 죽은 자를 기리는 문학상과 문학비가 없었기에, 이문구는 그를 그리워하는 독자들 가슴 안에서 매일같이 부활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세계와 인간의 진실에 육박해 들어가는 '진짜 작가'가 보기 힘들어진 2013년 가을 한국문단. 결핍이 주는 서러움 때문일까. 고향 땅 충청남도 보령 관촌의 소나무숲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고 있을 이문구가 아프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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