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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공화국' 제2공화국,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55] <그 방을 생각하며>

등록|2013.09.23 18:08 수정|2013.09.23 18:08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殘滓)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1960. 10. 30)

선생님, 저는 혁명을 경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평소 제 성향으로 보건대, 하루하루를 격렬함 속에서 정신없이 보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4․19 혁명을 경험하신 선생님께서는 어떠셨는지요. 선생님께서는 4․19 직후에 써낸 많은 시편을 통해 혁명의 뜨거운 전진을 말씀하셨습니다. 혁명의 환희와 열정을 노래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혁명은 지지부진했습니다. 과거의 어두운 잔재가 사라질 기미는 쉽사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님께서는 극심한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셨지요. 바로 앞에서 본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오늘 보는 <그 방을 생각하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선생님께서는 이 작품이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밑그림[esquisee]'으로 해서 나온 작품이라고 자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선생님께서는 마냥 '피로감'만을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혁명의 상실감에 좌절하고 계신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5연 1행)어도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고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혁명에 대한 부푼 기대감을 접었으면서도, 기쁨과 정신적 풍성함에 빠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작품이 쓰인 날의 일기를 보았습니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보류하고 <그 방을 생각하며>를 <현대문학> 지에 보낸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러고는 한 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 "마음이 흐뭇하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이 작품을 쓰시면서 어떤 철학적 깨달음을 얻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머리에 떠올라 우리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순간과 같은 것 말입니다. 자기확립이 중요하며, 다시 뿌리를 펴는 작업을 시작하자는 선생님의 말씀(10월 29일 일기), '전체'와 '개인'과의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를 '사월' 이후에 얻은 '재산이라면 재산'으로 보는 선생님의 시선(10월 30일 일기)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들이겠지요.

문제는 현실의 속박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을 향하는 개인의 끈끈한 욕망일 것입니다. 일본 작가 미야모토 테루가 말했다지요. 혁명은 사소하지 않지만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고. 선생님이 이 시에서 얻은 깨달음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런지요. 한 개인인 선생님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통해 사소하지 않은 혁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자각과 같은 것 말입니다.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문학하는 사람은 하등의 단체를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위선 저만이라도 혼자 나가겠습니다. 한국문협뿐만 아니라 모든 단체에서 탈퇴할 결심입니다.(<김수영 전집 2 산문> 340쪽)

1960년 10월 19일, 선생님께서 한 지인에게 보낸 엽서의 한 토막입니다. 문학인이 문학인 단체에서 탈퇴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인을 향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문학인 단체를 사회적 압력의 피신처로 이용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한국문협을 선선히 탈퇴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압력이 경감된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그런 악질적인 것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때 시인협회마저 탈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1960년 후반의 상황이 선생님 말씀대로 펼쳐졌으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이승만 독재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암흑 상태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잠꼬대>(최초 제목은 <김일성만세>였음)를 쓰시면서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그 시에 대한 세상 사람의 오해나 문학지 게재 여부 등을 염려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선생님께서는 사회적 압력이 경감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혁명의 의의를 조금이라도 인정하고 싶은 마음에서이겠지요. 장면이 이끈 제2공화국이 '데모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도 조금은 달리 볼 수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와는 달리 많은 사람이 데모할 수 있는 자유를 맘껏 누림으로써, 적어도 광장의 민주주의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저는 문학인 단체를 탈퇴하겠다는 선생님의 결심으로부터 선생님 나름의 '사소한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싶습니다. "혁명은 안 되고…방만 바꾸어버"(1연 1행)려서 '그 방'을 생각하면 씁쓸하기만 하지만, 스스로에게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으니 '혁명'인 셈이지요. 선생님께서 씁쓸함 속에서도 이유 없는 기쁨과 풍성함을 느낀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으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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