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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채동욱 부인 가상글'이 남긴 것

등록|2013.10.08 13:35 수정|2013.10.08 15:09

▲ 지난 10월 3일 오후 '채동욱 부인 글' 이라는 가상의 글을 올려 논란의 진원지가 됐던 당사자가 10월 5일 밤 채 전 총장측에 사과하며 올린 글 ⓒ 인터넷 캡쳐


지난 5일 오후, 기자의 휴대전화에 SNS 카카오톡으로 잇따라 '긴급'이라며 소식이 날아들었다. 보낸 이는 지역에서 지도층 인사쯤 되는 사람들인데, 한 사람은 '특종'이라며 카톡을 보내왔다.

'채동욱 부인 호소문'이라는 이 글은, 국민에게 간곡히 호소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채 전 검찰총장 부인이 '자신은 이미 혼외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이제라도 채 종창과 임 여인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야당은 정치공세를 그만두라'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지역에서 알 만한 분이 '특종'이라며 보내온 글이기에 심각하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이 글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처음 이 글을 퍼나른 이가 소감으로 "꼭 읽어보세요, 참으로 훌륭한 글입니다, 이 글을 쓰신 채동욱 전 총장의 부인께 참으로 존경을 표합니다"라고 친절히 설명까지 했던 터라, 진짜 채 전 총장 부인이 쓴 글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토록 했다.

하지만 글을 읽어 내려가다보니 그 풍기는 뉘앙스가 뭔가 민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그 사실 여부를 알아보고자 했다. 기사를 작성하기로 마음 먹고 자판을 두드리다 다시 검색을 해보니 이미 일부 언론에서 '채동욱 부인 글'이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기사는 채 전 총장 변호인이 "사실무근이며 법적 조치 하겠다"는 반론을 실었다. 하지만 기사에는 이 글의 출처와 그 글이 채 전 총장 부인인 쓴 글이 맞는지 여부는 나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채동욱 부인글은 마치 사실이지만 전 총장 측은 이를 부인한다는 식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이 글의 출처는 보수 인물 지만원 교수가 운영하는 <시스템클럽> 자유게시판에 10월 3일 오후 4시 38분 올려진 글로, 최성령이라는 사람이 작성한 '가상의 글'이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기사를 작성해 <오마이뉴스>에 송고했다. 기사가 출고된 시간은 10월 5일 오후 6시 5분이었다(관련기사: '채동욱 부인 글' 논란... 가짜로 밝혀져).

자칫하면 진실공방으로 번질 뻔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후 언론에는 '가상글'이라는 단어가 붙어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종편에서도 '가상글'을 전제로 6일부터 보도되기 시작했다.

국가 기관이 작성한 댓글이 여론을 왜곡하는 세상

채동욱 부인 글이라고 떠도는 이 글의 출처와 사실 여부를 파악해 기사를 쓰려고 마음 먹은 것은 근래 이와 유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기자에게까지 메일이나 카카오톡으로 전해 온 내용은 이번 가상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올해 6월에는 '정몽헌의 죽음'이라는 글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글이 SNS로 퍼졌고, 지난해 여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에 관련한 글이 역시 널리 퍼지면서 기자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관련기사: '빨갱이' 보다 무서운 전라도? 왜 이렇게 됐나).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나 SNS로 이같은 내용을 접하거나 전달받은 사람들이 그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앞서 그냥 사실인양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자에게 소식을 전해 준 이들도 당시에는 모두 이런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흘러가는 루머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지난해 대선에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댓글로 전파한 내용들이 왜곡됐다는 게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밝혀지고 있지 않은가. 국가 기관에서까지 이같은 여론 왜곡에 나섰다면 이같은 일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진행되어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지난 5일 <오마이뉴스> 보도 후 채동욱 부인 가상글을 쓴 당사자가 사과의 글을 올리면서 이번 사건은 마무리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가상글이 진짜 글로 둔갑돼 전파되는 세상, 또한 그것을 사실인양 믿고 주변에 알리는 풍토가 두려움마저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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