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나는 때때로 새가 되어 쓸쓸해요
그러나 비장애인 당신들이 더 쓸쓸할 수도 있겟습니다
"선생님! 보건소와 함께 하는 행사가 몇 일 몇 시에 어떻게 있을 예정이니 꼭 기억하세요!"
"우리 기관에 호의적인 어떤 분이 수고했다고 며칠 날 저녁에는 전체회식을 하게 해준대요! 꼭 함께 하셔야 해요."
이렇게 살갑게, 갑자기 오늘 이렇게, 구화로도 메모로도 업무일지에도 공지사항이 전해 온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느낌은 이러한 방식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전해받지 못한 공지사항들로 인해 서로가 심하게 불편한 상황을 겪은 직후다. 진작에 이렇게 좀 해주었다면 일 주일 사이 몇 번이나 바보새가 되어 벙어리 냉가슴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참고 지낸 내 탓도 크다.
10월이 되면서 재단 내의 전체 연수와 예술제, 페스티발, 축제 개막공연과 추억의 운동회와 콘서트 등이 쉴 새 없이 실행된다. 작게는 수백 명 많게는 1000명 이상이 밀집하는 행사다. 어떤 행사는 지역네트워크와 연계해서 하지만 소통이 잘 되어 마치 연예인 매니저가 된 느낌으로 분주하지만 보람차고 재미있다.
그러나 한 지붕 안의 식구 같은 나의 일터에서는 인사이동 이후 과도기여서 그런지 몇 달 내내 자주 외롭고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기관 내 다양한 행사를 맞아서 모두들 제 앞가림이 바쁘다 보니 소리의 세상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까지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어 깜박하고 잊기 때문이다.
가끔은 손짓소리 등의 수화 사용으로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가끔은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존재감이 없기도 하는 것이 청각장애인들이다.구령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교련시간에도 가만히 앉아야 했던 중학생 시절을 겪었다.
수화를 사용하지 않지만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회의 때는 내 옆에 앉은 직원이 누구든 중요한 공지사항은 필담을 통해 전달한다. 나의 장애를 모르는 새로운 신입직원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도대체 무엇하는 것일까 하고...
문서나 글이나 또는 원 포인트 원의 피드백으로 내게 내용이 전달되지 않으면 직장에서 가끔 날지 못하고 흙바닥에서 주춤거리는 앉은뱅이새가 된다. 직장에서 뿐이랴. 평생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십 번 수백 번 겪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울함도 더러 주는 주춤함의 상처는 늘 새롭게 느껴지고 점점 지쳐간다.
학교 다닐 때는 개교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등교를 했고 소풍날이 바뀌어 연기가 되었더라도 칠판에 변경된 날짜가 적히지 않는 한 모두 책가방을 들 때 나는 소풍가방을 들고 오기도 했다. 대학원의 졸업식에서도 공로상을 준다고 했음에도 글이나 문서로 전달된게 없어 졸업식도 못 갔다.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버이날 모두 셔츠를 입기로 했다가 한복으로 바뀌었을 때 난 혼자 하얀 셔츠를 입고 나갔다.
예년에 비해서 요즘에는 지역 네트워크 유관기관들에게서는 공지사항이 문자로 전달되어와서 편리한 점이 많다. 스팸도 더러 있지만 공지전달에는 문자 메시지의 역할이 참 크다. 내가 일하는 곳도 이렇게 문자 메시지나 메일로 중요한 행사에 대한 공지를 전달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최근 들어 나는 직장 내 행사에 공지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공동체 행사에 협조하지 않는 모양새가 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연수를 가는지 구체적으로 미리 전달되어 오지 않았다가 하루 전에야 산행이라는 것을 알고 호흡기와 신경기장애로 몇 시간의 산행은 못 따라간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모두 다 간다고 위에 보고했는데.... 왜 ?"라는 반응이 온다. 아무리 공동체의식이 강하다고 해도 함께 나란히 공동체행동을 못하면 마치 꾀를 부리는 것 같이 오해를 받기도 한다.
딸보다 나이 어린 직원들에게 내 장애의 특징을 일일이 설명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란 쉽지 않다. 참으로 당당하던 나는 가을을 타는 사추기 갱년기의 소심한 중년 여인이 되어 버렸다. 마치 사춘기때 보청기를 처음 했던 그 때의 소심함처럼....
오해를 받으면 혼자 쓸쓸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일이면 좀 괜찮아질까 하고 직장 뒷산 우회도로를 운전해 산허리를 구비구비 돌아간다. 강산에의 연어처럼만 반복해서 틀면서... 상당산성 호수가에 한참을 앉았다가 쓸데없는 감성은 호수에 풍덩 던져버리고 별빛과 달빛을 가득 아름답게 담아 흔들거리는 조각배의 아름다운 감성을 대신 가슴에 안고 하루를 마감한다.
하늘보다 컴퓨터를 더 많이 보면서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일사불란함이 요구되고 복지부동적인 성향의 기관으로 변화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기 위한 빠른 변화지만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안간힘을 쓰면서 하루 하루 해내간다. 그러나 해낸다는 내 의지와 상반되게 내 몸뚱이는 정직한 반응을 나타낸다. 신경장애로 오는 당연한 신경성 두통과 혈관장애다.
2000명 가까운 참석자들을 위한 준비에 전직원에게 새벽 6시에 오라는 공지가 세 번이나 하달되었다고 해도 나는 필담을 해주는 누군가에 따라서 그 공지는 제로 또는 10% 또는 80% 천지차이로 전달되어 온다. 나는 스물네살 인턴이 필담으로 전해주는 6시에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된 채 1초도 안 걸리게 쓰는 6시란 숫자를 단 한 번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위력을 발하는지 몰랐다.
약을 먹고 일어나니 이미 시계는 6시를 넘었고 나는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현장에 도착하니 8시였다. 부서장에게 인사를 한 후 해마다 하던 대로 나는 내 담당 장소를 찾아 이런저런 이벤트를 하다가 잠시 사무실에 와서 급한 일도 하면서 종일을 보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모두 다 6시에 왔는데 당신만 왜?" 이런 반문과 문책을 받았을 때는 많이 쓸쓸하다. 그래서 변명 아닌 변명으로 세 번이나 했다는 공지를 못 들었다고 했지만, 다시 내 옆의 동료들에게 너네들은 왜 제대로 안 전해주었는냐는 힐난이 돌아갔을 때는 참 민망하고 씁쓸했다.
중증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조용히 일반인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화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싶은 마음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서 남은 에너지를 정말 좋은 기운이 나오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은데 별로 아름답지 못한 순간들이 눈 앞에 떡 버티면 나는 뒤돌아 나오고 싶어지는 것을 애써 참는다.
중증장애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동참을 못해서 지적 당하고 문제가 되기 보다는,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라도 함께 해주어서 고맙다는 소리들에 자긍심을 느끼고 신나던 때도 많았다. 그러나 좋은 때는 항상 영원하지 않는다. 오르막 내리막의 산길처럼... 좋은 때를 그리워하고 다시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바보새라도 되지 않기를 소망하고 싶다.
시장 한 가운데 사람을 세워놓고 정작 자기는 무관심해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왜 무관심했느냐고 소리치거나, 다리에 상처입은 지체장애인을 두고 당신은 왜 백미터 달리기를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것일까?
그리고 생전 경험해보지 않은 장애를 만났을 때 일반인들은 당사자가 아닌 한 어떻게 도와야 하고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그것은 경험해 보거나 장애당사자가 요구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나만 쓸쓸한 것이 아니라 나를 쓸쓸하게 한 그들은 더 쓸쓸할 수도 있다.
의도적인 차별은 당연히 장애차별금지법에 의하여 절차를 밟고 항의를 받아야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그러한 것들은 개인의 감성 역량과 선택적인 사항이라 그냥 쓸쓸하다. 몇 번의 새가 되는 과정을 거치다가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온 중간 관리자나 상사 그리고 내 옆의 동료들에 내 장애에 대한 설명을 한다.
이제 좀 모두 나의 장애에 익숙하게 되어 새가 안 되나 싶으면 인사이동이라 모두 바뀐다. 다시 부지런히 다양한 모습의 바보새가 되고 때론 남모르게 속으로 삭히고 눈물을 훔친다. 장애 때문도 아니고 직장이나 사람 때문도 아니다. 그냥 쓸쓸함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못하는 소심한 나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해서...
이전의 여성장애인단체를 창립하고 몇 년간 운영하면서 인권활동을 할 때가 생각이 난다. 여성장애인 단어도 모르던 공무원들을 설득하고 지자체 문턱을 닳도록 넘으면서 간신히 일 년을 꾸려가는 예산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운영하는 예산이 좀 원활하게 나올 만하다 싶으면 담당 공무원이 바뀌어 삭감할 위기에 처해 다시 처음부터 부지런히 문턱을 넘어야 했다. 담당자를 설득하고 언쟁으로 번지다가 농성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여러 번 겪으면서 단체는 점점 자리 잡혀져가는 반면 나는 점점 지쳐갔던 기억이 난다.
기러기 리더십처럼 뒤로 빠져야 한다는 자각 아래 나는 13년간의 대표생활을 조용히 접었다. 그러나 지친 날개와 영혼이 잠시 숨통을 트이고자 새롭게 자리를 잡은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세상은 어디서나 그런 모양인 것일까? 익숙해질 만하면 바뀌어야 하고 부딪쳐야 하는 것이 자연의 현상인 것일까?
한때 내가 운영하던 학원에서도 일반인들이 공부하다가 장애인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니 피곤하다고 등 돌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렵다는 극단적인 말도 하였지만 물과 유화기름이 섞인 물감을 이렇게 저렇게 섞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때로는 멋진 조화의 마블링 미술작품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때로는 다시 날기 겁나고 무거워서 못 일어날 정도로 날개가 지치고 다칠 때가 있다. 그러면 하늘을 바라보며 머나먼 길을 홀홀히 또는 무리 지어 석양을 등지고 아름답게 날아가는 새들을 본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홀홀히 나는 새들처럼 나도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할 때가 된 것일까?
하지만 당분간은 소통에 노력하는 마음으로 살갑게 전달하는 관심에 나도 마땅히 부응해야 할 것 같으니 떠난다는 생각은 접어야 할 것 같다. 오래된 항아리들 안에서 약된장이 잘 숙성되는 것처럼.... 직장 동료 중 누군가 한 사람은 나와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각장애인을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선수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여성장애인단체를 운영할 때 우연히 만난 비장애인자원봉사자가 진짜 장애인의 소통에 힘쓰는 비영리 활동가나 전문가가 된 것처럼... 때로는 참 많이 쓸쓸한 청각장애인의 직장생활이지만 잘 견디면 평생 남는 게 있다.
사람마다 그 남는 것들의 모양새가 유형 무형으로 다를 것이지만... 쓸쓸함이 주는 소중한 것들이 이 가을에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 많이 지친 내 영혼에 크레용 색깔을 입히기를 소망한다.
"우리 기관에 호의적인 어떤 분이 수고했다고 며칠 날 저녁에는 전체회식을 하게 해준대요! 꼭 함께 하셔야 해요."
이렇게 살갑게, 갑자기 오늘 이렇게, 구화로도 메모로도 업무일지에도 공지사항이 전해 온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느낌은 이러한 방식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전해받지 못한 공지사항들로 인해 서로가 심하게 불편한 상황을 겪은 직후다. 진작에 이렇게 좀 해주었다면 일 주일 사이 몇 번이나 바보새가 되어 벙어리 냉가슴이 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참고 지낸 내 탓도 크다.
10월이 되면서 재단 내의 전체 연수와 예술제, 페스티발, 축제 개막공연과 추억의 운동회와 콘서트 등이 쉴 새 없이 실행된다. 작게는 수백 명 많게는 1000명 이상이 밀집하는 행사다. 어떤 행사는 지역네트워크와 연계해서 하지만 소통이 잘 되어 마치 연예인 매니저가 된 느낌으로 분주하지만 보람차고 재미있다.
▲ 실버아코디언과 우쿨렐레반들의 리허설악기 하나 하나 사람 하나 하나 모아서 만든 실버음악단의 개막초청공연 ⓒ 이영미
그러나 한 지붕 안의 식구 같은 나의 일터에서는 인사이동 이후 과도기여서 그런지 몇 달 내내 자주 외롭고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기관 내 다양한 행사를 맞아서 모두들 제 앞가림이 바쁘다 보니 소리의 세상에서 떨어져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까지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어 깜박하고 잊기 때문이다.
가끔은 손짓소리 등의 수화 사용으로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가끔은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존재감이 없기도 하는 것이 청각장애인들이다.구령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교련시간에도 가만히 앉아야 했던 중학생 시절을 겪었다.
수화를 사용하지 않지만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회의 때는 내 옆에 앉은 직원이 누구든 중요한 공지사항은 필담을 통해 전달한다. 나의 장애를 모르는 새로운 신입직원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도대체 무엇하는 것일까 하고...
문서나 글이나 또는 원 포인트 원의 피드백으로 내게 내용이 전달되지 않으면 직장에서 가끔 날지 못하고 흙바닥에서 주춤거리는 앉은뱅이새가 된다. 직장에서 뿐이랴. 평생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십 번 수백 번 겪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울함도 더러 주는 주춤함의 상처는 늘 새롭게 느껴지고 점점 지쳐간다.
학교 다닐 때는 개교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등교를 했고 소풍날이 바뀌어 연기가 되었더라도 칠판에 변경된 날짜가 적히지 않는 한 모두 책가방을 들 때 나는 소풍가방을 들고 오기도 했다. 대학원의 졸업식에서도 공로상을 준다고 했음에도 글이나 문서로 전달된게 없어 졸업식도 못 갔다.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어버이날 모두 셔츠를 입기로 했다가 한복으로 바뀌었을 때 난 혼자 하얀 셔츠를 입고 나갔다.
예년에 비해서 요즘에는 지역 네트워크 유관기관들에게서는 공지사항이 문자로 전달되어와서 편리한 점이 많다. 스팸도 더러 있지만 공지전달에는 문자 메시지의 역할이 참 크다. 내가 일하는 곳도 이렇게 문자 메시지나 메일로 중요한 행사에 대한 공지를 전달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최근 들어 나는 직장 내 행사에 공지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공동체 행사에 협조하지 않는 모양새가 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연수를 가는지 구체적으로 미리 전달되어 오지 않았다가 하루 전에야 산행이라는 것을 알고 호흡기와 신경기장애로 몇 시간의 산행은 못 따라간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모두 다 간다고 위에 보고했는데.... 왜 ?"라는 반응이 온다. 아무리 공동체의식이 강하다고 해도 함께 나란히 공동체행동을 못하면 마치 꾀를 부리는 것 같이 오해를 받기도 한다.
딸보다 나이 어린 직원들에게 내 장애의 특징을 일일이 설명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란 쉽지 않다. 참으로 당당하던 나는 가을을 타는 사추기 갱년기의 소심한 중년 여인이 되어 버렸다. 마치 사춘기때 보청기를 처음 했던 그 때의 소심함처럼....
오해를 받으면 혼자 쓸쓸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일이면 좀 괜찮아질까 하고 직장 뒷산 우회도로를 운전해 산허리를 구비구비 돌아간다. 강산에의 연어처럼만 반복해서 틀면서... 상당산성 호수가에 한참을 앉았다가 쓸데없는 감성은 호수에 풍덩 던져버리고 별빛과 달빛을 가득 아름답게 담아 흔들거리는 조각배의 아름다운 감성을 대신 가슴에 안고 하루를 마감한다.
하늘보다 컴퓨터를 더 많이 보면서 정신없이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일사불란함이 요구되고 복지부동적인 성향의 기관으로 변화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기 위한 빠른 변화지만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안간힘을 쓰면서 하루 하루 해내간다. 그러나 해낸다는 내 의지와 상반되게 내 몸뚱이는 정직한 반응을 나타낸다. 신경장애로 오는 당연한 신경성 두통과 혈관장애다.
2000명 가까운 참석자들을 위한 준비에 전직원에게 새벽 6시에 오라는 공지가 세 번이나 하달되었다고 해도 나는 필담을 해주는 누군가에 따라서 그 공지는 제로 또는 10% 또는 80% 천지차이로 전달되어 온다. 나는 스물네살 인턴이 필담으로 전해주는 6시에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된 채 1초도 안 걸리게 쓰는 6시란 숫자를 단 한 번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위력을 발하는지 몰랐다.
약을 먹고 일어나니 이미 시계는 6시를 넘었고 나는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현장에 도착하니 8시였다. 부서장에게 인사를 한 후 해마다 하던 대로 나는 내 담당 장소를 찾아 이런저런 이벤트를 하다가 잠시 사무실에 와서 급한 일도 하면서 종일을 보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모두 다 6시에 왔는데 당신만 왜?" 이런 반문과 문책을 받았을 때는 많이 쓸쓸하다. 그래서 변명 아닌 변명으로 세 번이나 했다는 공지를 못 들었다고 했지만, 다시 내 옆의 동료들에게 너네들은 왜 제대로 안 전해주었는냐는 힐난이 돌아갔을 때는 참 민망하고 씁쓸했다.
중증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조용히 일반인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화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싶은 마음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서 남은 에너지를 정말 좋은 기운이 나오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은데 별로 아름답지 못한 순간들이 눈 앞에 떡 버티면 나는 뒤돌아 나오고 싶어지는 것을 애써 참는다.
중증장애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 동참을 못해서 지적 당하고 문제가 되기 보다는, 장애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라도 함께 해주어서 고맙다는 소리들에 자긍심을 느끼고 신나던 때도 많았다. 그러나 좋은 때는 항상 영원하지 않는다. 오르막 내리막의 산길처럼... 좋은 때를 그리워하고 다시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바보새라도 되지 않기를 소망하고 싶다.
시장 한 가운데 사람을 세워놓고 정작 자기는 무관심해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왜 무관심했느냐고 소리치거나, 다리에 상처입은 지체장애인을 두고 당신은 왜 백미터 달리기를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것일까?
그리고 생전 경험해보지 않은 장애를 만났을 때 일반인들은 당사자가 아닌 한 어떻게 도와야 하고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그것은 경험해 보거나 장애당사자가 요구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나만 쓸쓸한 것이 아니라 나를 쓸쓸하게 한 그들은 더 쓸쓸할 수도 있다.
의도적인 차별은 당연히 장애차별금지법에 의하여 절차를 밟고 항의를 받아야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그러한 것들은 개인의 감성 역량과 선택적인 사항이라 그냥 쓸쓸하다. 몇 번의 새가 되는 과정을 거치다가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온 중간 관리자나 상사 그리고 내 옆의 동료들에 내 장애에 대한 설명을 한다.
이제 좀 모두 나의 장애에 익숙하게 되어 새가 안 되나 싶으면 인사이동이라 모두 바뀐다. 다시 부지런히 다양한 모습의 바보새가 되고 때론 남모르게 속으로 삭히고 눈물을 훔친다. 장애 때문도 아니고 직장이나 사람 때문도 아니다. 그냥 쓸쓸함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못하는 소심한 나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해서...
이전의 여성장애인단체를 창립하고 몇 년간 운영하면서 인권활동을 할 때가 생각이 난다. 여성장애인 단어도 모르던 공무원들을 설득하고 지자체 문턱을 닳도록 넘으면서 간신히 일 년을 꾸려가는 예산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운영하는 예산이 좀 원활하게 나올 만하다 싶으면 담당 공무원이 바뀌어 삭감할 위기에 처해 다시 처음부터 부지런히 문턱을 넘어야 했다. 담당자를 설득하고 언쟁으로 번지다가 농성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여러 번 겪으면서 단체는 점점 자리 잡혀져가는 반면 나는 점점 지쳐갔던 기억이 난다.
기러기 리더십처럼 뒤로 빠져야 한다는 자각 아래 나는 13년간의 대표생활을 조용히 접었다. 그러나 지친 날개와 영혼이 잠시 숨통을 트이고자 새롭게 자리를 잡은 이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세상은 어디서나 그런 모양인 것일까? 익숙해질 만하면 바뀌어야 하고 부딪쳐야 하는 것이 자연의 현상인 것일까?
한때 내가 운영하던 학원에서도 일반인들이 공부하다가 장애인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니 피곤하다고 등 돌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렵다는 극단적인 말도 하였지만 물과 유화기름이 섞인 물감을 이렇게 저렇게 섞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때로는 멋진 조화의 마블링 미술작품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때로는 다시 날기 겁나고 무거워서 못 일어날 정도로 날개가 지치고 다칠 때가 있다. 그러면 하늘을 바라보며 머나먼 길을 홀홀히 또는 무리 지어 석양을 등지고 아름답게 날아가는 새들을 본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홀홀히 나는 새들처럼 나도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할 때가 된 것일까?
하지만 당분간은 소통에 노력하는 마음으로 살갑게 전달하는 관심에 나도 마땅히 부응해야 할 것 같으니 떠난다는 생각은 접어야 할 것 같다. 오래된 항아리들 안에서 약된장이 잘 숙성되는 것처럼.... 직장 동료 중 누군가 한 사람은 나와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각장애인을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선수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여성장애인단체를 운영할 때 우연히 만난 비장애인자원봉사자가 진짜 장애인의 소통에 힘쓰는 비영리 활동가나 전문가가 된 것처럼... 때로는 참 많이 쓸쓸한 청각장애인의 직장생활이지만 잘 견디면 평생 남는 게 있다.
사람마다 그 남는 것들의 모양새가 유형 무형으로 다를 것이지만... 쓸쓸함이 주는 소중한 것들이 이 가을에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 많이 지친 내 영혼에 크레용 색깔을 입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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