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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며 성실하게 살았던 남편 알고보니...

카지노 중독으로 빚 만 남긴 상속, 안 받을 수도 있다

등록|2013.10.13 11:41 수정|2013.10.13 11:43
며칠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예전에 내가 관계하던 단체의 회원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에 활동이 두드러진 편이 아닌 평범한 회원에 불과한 분이었기에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분은 통화하면서도 쭈뼛거리며 몹시 어려워했다. 그 분은 너무 오랜만에 갑작스럽게 전화를 드려 미안하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전화하는데가 어디냐고 물으니 집이라고... 어느 동이냐니까 또 다시 침묵. 이윽고 그 분은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4시 반, 근무하는 건물의 1층 할리스 커피숍에서 만났다. 만나보니 기억이 났다. 켐페인 활동이나 관계자 교육시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여자는 최근에 엄청난 일을 겪었다고 했다.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데, 주변에 상의 할 만 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단체 활동 당시 회원들에게 자상하게 여러 가지를 상담해주시던 모습이 떠올라 과장님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서 여자는 거듭 미안해 했다.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정이 딱하고 다급했다. 남편이 보름 전에 간암과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했는데, 핸드폰 가게를 하던 남편의 재산을 정리해보니 순수하게 빚만 3억이 넘더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모든 채무가 자기도 모르던 것이고, 그 빚의 대부분은 도박 빚이라는 것이다. 남편이 죽은 후 알게 된 남편의 또 다른 모습은 도박 중독자였다는 것이다. 성실하게 생활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남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남편의 또다른 모습, 도박 중독자

대기업 중견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4년 전에 명퇴하면서 지금의 가게를 차린 남편에게 이런저런 사채가 많은 것을 여자가 안 것은 남편이 죽기 직전이라고 했다. 병원에 있는 남편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안 채권자들이 현금보관증을 들고 병실을 찾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며칠에 걸쳐서 병원에 찾아 온 채권자들은 가게 주변 상인들과 전 직장 동료, 학교 동창 등 모두 10여 명이었다. 빚의 총액은 4억 2천만 원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남편의 자필로 된 차용증이나, 현금 보관증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는 억울했고, 분통이 터졌지만, 이미 혼수상태인 남편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고, 너무나도 분명한 남편의 필체였기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여자는 채무를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남편의 사업문제에 철저히 남편의 성역이었기에 부인할래야 부인할 아무런 근거조차 여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이 닥치고 보니 남편에 대해서, 남편의 사업에 대해서 여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차용증을 들이대는 사람들에게 다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당신들이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사람의 침대 옆에서 이럴 수는 없다고... 남편은 죽어도 내가 살아 있다고 악을 썼다. 그러는 여자는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가게가 입주한 건물주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가게 임대 보증금 1억 7천만 원이 살아 있을 것이고, 핸드폰회사에 납입한 개설 보증금도 5천만원이 본사 영업부 금고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남편 앞으로 생명보험도 들어 둔 것이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전세금도 있었기에 빚쟁이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었다.

얼마 후 남편은 죽었다. 성남에서 화장한 유해를 남편의 고향마을에서 가까운 양평 용문산 자락에 뿌렸다. 시댁쪽에서 주선한 이름 뿐인 수목장이었다. 남편이 남겨 두고 간 뒷자리가 너무도 어수선한 것을 병원에 드나 들던 시누이를 통해 시댁 식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시댁 누구도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매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로는 집에 시댁 식구들 누구 하나 다녀가는 사람이 없었다. 빈말이라도 어떠냐고 전화 조차 없었다. 돈 문제가 나올까 봐 그랬는지 모두 씻은 듯 발길을 끊었지만, 여자는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20년을 같이 산 사이였지만, 슬퍼하거나 남편의 죽음을 조용히 반추해 볼 여유는 없었다. 장례 후 여자는 가장 먼저 가게 종업원들과 건물주를 만났다. 그들로부터 전해들은 남편의 모습은 자기가 알고 있던 남편이 아니었다. 자기가 아는 남편은 당뇨 때문이기는 해도 술도 많이 안 마시고, 아파트 이웃끼리도 잘 지내는 사람이었다. 대인 마케팅을 중시하는 통신회사 특유의 영업 방침에 따라 본사 주최로 교육이나, 지방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출장이 많아 집을 많이 비우기는 했어도 집에 있을 때는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 줄 알던, 비교적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실한 남편의 모습은 남편의 가게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는 없었다.  남편이 죽은 후, 남편 가게의 종업원들과 건물주, 그리고 사업 상의 거래 관계가 있던 사람들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남편의 참 모습은 '카지노 도박 중독자'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도박 자금을 만들기 위해 사람만 만나면 돈 얘기였고, 돈을 빌리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사람이었다. 누구를 통해서든지, 누구에게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빌렸다고 한다.

전 직장에서 구조조정된 것도 회사 방침에 의한 명예퇴직이 아니라 카지노에 출입하다가 들통났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 사실을 집에서만 모른다는 것까지 주변에서는 알고 있었다. 남편은 핸드폰 사업을 온통  종업원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가게에는 오전에만 잠깐 들렀다고 한다. 평소에는 시내 호텔 카지노에서 살았고, 한 달에 서너번은 정선 카지노에 갔다고 했다. 통신회사 특유의 마케팅을 중시하는 영업 방침에 따른 지방 세미나가 아니라 '정선카지노 도박 출장'이었던 것이다.

충격적인 일은 계속 이어졌다. 가게가 입주한 건물 관리사무실에서 건물주를 만났다. 그가 밀어 놓는 갈색 서류봉투를 여자가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자료를 뒤적여보니 임대 계약서외에 세장의 차용증과 몇 장의 은행관계서류가 들어 있었다. 서류를 확인하면서 건물주의 설명을 들었다. 그 세계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남편은 타인이었다. 남편은 1억 7천만 원의 가게 임대 보증금에서 세 차레에 걸쳐 총액 7천만 원을 주인에게서 현금으로 찾아갔고, 거래 은행에서 임대 계약서를 담보로 9500만 원을 대출 받으므로써 정말 기막히게도 가게보증금 1억 7천을 정산할 것도 없었다.

당일 건물주가 나타나지 않아 보증금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제 보니 건물주는 남편의 살고 죽음과 상관없이 아쉬울 것이 없었기에 아사리 굿판에 끼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를 넘어 허탈했다.

종업원들과 같이 본사를 방문했다. 본사 보증금 5천만원은 다행히 살아 있었다. 본사 사무실을  나오면서 근처 커피 숍에서 차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들을 것을 듣고,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했다. 보증금에 손대면 대리점 계약이 취소되기 때문에 손대지 못한 것 같다고 종업원이 말했다. 자기들이 모신 사장이라고 종업원들은 남편에 대하여 막말은 하지 않았다. 그 간 사장님의 행적과 가게에 찾아 온 채권자들과 대화, 서류 등으로 보아 대부분의 사채가 사실일 것이라고 했다. 종업원들의 입을 막으려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월급은 제때 지급되었고, 가게 운영비 통장에 잔고는 140만 원 정도가 남아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채무 원인의 여하를 막론하고 아내의 도리로 남편의 빚을 갚을 생각이었다. 좀 모자라면 사는 집을 좀 더 줄이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여자는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남편은 갔어도 두 아이와 자기는 살아야 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정리한다고 해도 갚을 수 없는 액수였고, 언제 또 누가 새로운 차용증을 들고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살기는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내가 살 수 있을까? 여자가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말을 마친 여자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마셨다. 시간이 꽤 흘렀다. 말을 하는 동안 여자는 담담했으나 조금 지쳐 보였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장례 후 보름 어간의 시간이 여자를 무척 변하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말을 들었지만,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침묵 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여자였다.

"과장님! 빚이 많을 때는 상속을 안 받을 수도 있다면서요. 회사에서 들었어요."
"회사요? 남편회사?"
"아니요. 내가 다니는..."
"직장 다니셨던가요? 무슨 회산데요?"

여자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과장님! 대한민국에서 40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설거지하고 보험 설계사 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00단체 출신인데 노래방 도우미 나갈 수는 없잖아요. 보험 일 시작한지 한 2년 남짓 됐어요. 불경기라 핸드폰이 안 팔린다며 집에 생활비 들여다 주다 말다 한지가 그 정도 됐거든요"
"그래요?"

여자는 나를 만나기 전에 나름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이런 경우는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민법의 '상속편'은 사실 그리 복잡한 구성은 아니다.

"제대로 아셨네요. 민법에 보면 채무가 상속 재산보다 많거나, 가족도 모르던 망자의 채무가 있을 경우에는 상속받는 것을 아예 포기하거나, 상속받은 받은 만큼만 갚겠다는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게 되어있어요. 자. 지금부터 잘 들어 보세요"

《민법 제1000조 이하, 상속에 관한 규정.》
제1005조 상속인은 상속이 개시된 때로부터 피상속인의 재산에 관한 포괄적 권리 의무를 승계한다.
제1019조 (상속인의 권리)
- 상속인은 상속 개시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 이내에 단순 승인이나 한정 승인 또는 포기를 할 수 있다.
- 상속인은 승인 또는 포기를 하기 전에 상속 재산을 조사할 수 있다.
- 상속인은 상속 채무가 상속 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없이 상속 개시 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 이내에 알지 못하고 단순 승인을 한 경우에,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3월 이내에 한정 승인을 할 수 있다.
제1028조 (한정 승인) 상속인은 상속으로 인하여 취득할 재산의 한도 내에서 피 상속인의 채무와 유증을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속을 승인할 수 있다.
제1042조 (절차)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할 때에는 기간 내에 가정법원에 포기의 신고를 하여야 한다.

"상속은 단순 승인과 포기, 그리고 한정 승인 세 종류이고, 위와 같은 개념과 절차로 이루어져요. 주로 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포기와 한정 승인인데... 지금 상황이..."

어느 법이나 다 그렇듯이 법조문 상으로만 보면 단순 명료하게 되어있지만, 실제 적용은 다르다. 그 중에서도 상속법 관계는 민법의 다른 조항, 증여나 양도 등에 비해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재산의 종류와 성격, 명의가 누구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 경우의 수가 많다.

우선, 이들 가족의 재산이 얼마나, 어떻게 되는지 그 구성을 좀 알아야 하는데,

"아파트 전세금이 있어요. 월세 끼고 2억5천에 50이예요. 원래는 3억 2천 전세였는데, 암 발견하고 나서 계약서를 다시 썼어요. 전세 줄인 돈 7천에서 그 동안 이런저런 약값에다 병원비 많이 들어갔어요. 그리고 예전부터 있던 것들 좀 정리하구 지금 남은 것이 천오백정도, 이게 다예요."

아까 생명보험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났다.

"보험 쪽은 어때요?"

여자의 얼굴이 좀 펴진다.

"아, 보험은 탈 수 있을 거 같아요. 보험 일 시작할 때 남편이랑 아이들 앞으로 꽤 들었거든요. 급여팀에 알아보니까 마침 일반 신청 건으로 들어 온 저 같은 경우가 있더라구요. 담당자말이 생명보험금은 걱정하지 말라구...그러더라구요."
"맞아요. 판례를 보면 생명보험금은 피 상속인으로부터 받는 상속재산이 아니라 상속인의 고유 재산으로 본다고 되어 있어요. 그 돈으로는 빚을 안 갚아도 된다는 뜻이지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아파트 계약서 말인데요. 제 명의에요. 계약서 다시 쓸 때 제 이름으로 바꿨거든요. 왠일인지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어요."
"그래요? 아파트 명의가 망자 앞으로 되어있지 않다면 이야기는 끝났어요."

상속은 피 상속인 명의로 된 재산이 그 대상이다. 이 말은, 죽기 전에 증여나 양도가 이루어졌다면, 상속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전세 입주자 명의를 부인 앞으로 돌려 놨다는 것은 남편이 자기 사망 후 빚쟁이들이 몰려오는 상황을 예견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남자는 죽어가면서 가족에 대한 마지막 속죄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랬을 수도 있어요. 아니 그랬을 거예요. 사실, 암 보험금이 나오기 때문에 굳이 그 때 급하게 전세금을 헐어 낼 필요는 없었거든요. 전세를 줄이자고, 그러면서 계약서를 제 명의로 다시 쓰자고 애 아빠가 고집을 피우기에 좀 이상하긴 했어요. 그 땐 그저 자기 병이 회복할 가망이 없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도박에 빠지긴 했어도 죽음을 앞두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 남자의 심정, 이해할 것도 같고 못할 것도 같다. 그런 정신이라면 도박에서 충분히 빠져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정리해봅시다. 아파트 보증금, 생명 보험금 둘 다 지킬 수 있어요. 자동차는 어때요? 그깟 중고차 공매 넘어가게 놔 두자구요. 남편 명의로 된 게 그밖에 뭐가 또 있나요? 없죠? 그렇다면 큰 거 뺏길 건 별로 없을 것 같네요. 상속 포기서를 냅시다. 잃는 건 본사 보증금하고 운영비 통장 정도예요. 나머진 뺏기지 않아요."
"정말요?"

눈이 동그래지며 여자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떨군다. 그렇게 시간이 좀 흘렀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장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올께요."

목소리가 이상했다. 여자가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갔다.

상속포기 신청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하진 않다. 가정법원이 없는 곳에서는 일반법원에 신청하지만, 서울에서는 가정 법원에 신청하면 된다. 준비 서류는 망자의 사망확인서 등 기본 증명서, 청구인의 가족관계증명서, 인감증명서와 도장, 주민등록초본, 재산 목록과 가족 관계가 기록된 가계도를 첨부하면 된다. 이런 경우에는 부인과 자녀 중 1인은 상속 포기를 신청하고, 자녀 한 명은 한정 상속을 신청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채권자들은 2순위, 3순위자를 찾아 가게 되어 있다. 시댁 쪽에서 연락을 끊은 걸로 보아 역시 빚 때문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며느리 입장에서 일부러 시댁을 골탕을 먹이려 하지 않는 한 2순위자인 망자의 부모에게까지 내려가게 하는 것보다는 이쯤에서 끊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과장님! 너무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법적인 문제가 잘 끝난다고 해도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어요. 이건 법적인 문제 외의 일인데, 빚쟁이들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거예요. 그 쪽을 굉장히 괴롭힐거예요. 내 돈 떼이고 기분 좋을 사람 없잖아요. 법은 그런 것까지 지켜주진 않아요. 스스로 견디고 이겨내야 해요.  이사를 가든지.....어쨌든 각오하셔야 돼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예전의 제가 아니에요. 이번에 많이 배웠어요. 저 빚쟁이들 앞에서 분신할 수도 있어요. "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분신을 이야기한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분신까지나...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정 괴롭히면 경찰에 112 신고하세요."

나는 당황했다.

"TV보니까. 분신 그거 어려운거 아니더라구요. 몸에 휘발유 끼얹고 라이터로 불 붙이면 되는거 잖아요. 물론 그 전에 라이터 돌이 빠진 걸로 하나 준비해야겠지만,"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이내 배꼽을 잡고 말았다. 여자도 같이 낄낄낄 웃었다. 둘이 같이 한참을 웃었다. 카페 종업원이 돌아 볼 정도로 신나게 웃었다. 한참 웃고 나니 통쾌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런 정도 여자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현진건의 작품중에서 '술 권하는 사회'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어요. 알아요?"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한 남자가 사회에 대한 울분으로 술을 마시는 이야기에요. 매일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오는 남편에게 그 아내가 왜 그렇게 술을 마시느냐고 물어보죠. 이 사회가 나를 술 먹게 한다고 대답해요. 만약 그 쪽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 제목을 '분신 권하는 사회'라고 하면 되겠네요?" 여자는 아까 너무 웃어서 웃음이 바닥났는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상속포기를 신청하는 재판에서 굳이 변호사 살 필요는 없을 거예요. 요즘에는 이런 정도 소송은 집에서 준비하더라구요. 인터넷에 절차, 방법 다 나와 있어요. 해보세요. 도와 드릴게요."
"네. 해 볼게요. 과장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근데, 카지노 도박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사업도, 가족도 잊을 정도로?"

여자가 물었다.

"글쎄요. 저는 고스톱만 쳐도 무릎 아파서 못하겠던데....근성 아닐까요? 기계한테 질 수 없다는..."
"그런 근성이 있으면 사업에다가 쏟지. 결국은 다 지게 되잖아요?"

커피숖을 나오며 여자가 쓰게 웃었다.

"그렇게 이중 인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그래서 병도 급속히 악화 됐을 거예요."

따갑고도 서늘한 늦은 오후 햇볕이 빌딩 사이로 비친다. 문득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이 너무 맑아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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