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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전문가와 떠나는 섬뜩한 냄새여행

[서평] 쥐스킨트 <향수>를 읽고

등록|2013.10.17 09:37 수정|2013.10.17 09:37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란 부제를 달고 나온 소설 <향수>는 음습(陰濕) 그 자체다. 시종 회색 빛과 비린내로 일관한다. '조용한 암살자'인 주인공, 그르누이의 행적은 파격적이며 충격적이다. 소설은 독일 출신의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1985년 발표한 이후 세계적으로 천 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 중에 베스트셀러다.

▲ 1996년 발행된 <향수>의 표지다. 손 때인지 먼지가 때로 변한 건지 꼬질꼬질하지만 이후에 나온 책 표지보다 클래식하고 내용과 어울리는 것 같다. ⓒ 열린책들


인간의 기억은 향수와 같이 짙은 향기를 뿌리다 흩어져 버려 부질없다. 십여 년이 지났다고는 하나 이렇듯 충격적인 내용이 어렴풋하여 지난 주말 다시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강명순의 번역으로 1991년에 초판 인쇄된 <향수>는 1995년 개역 판을 내게 되는데 내가 읽은 것은 1996년 출판된 책이다. 뒷면에 5800원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대체로 책값이 17년 만에 두 배쯤 오른 것 같다. 17년 묵은 종이냄새가 향긋하다. 읽다 보면 모골이 송연 해지기도 하는 이 소설은 가을보다는 여름에 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진드기와도 같은 냄새천재, 그르누이


생선 대가리와 생선 내장들이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의 첫 요람이다. 탯줄을 생선칼로 잘라냈기 때문일까 그에겐 체취가 없다. 이를 두려워 한 그의 첫 유모는 아이를 수도원의 신부에게 돌려 준다. 후임(後任)은 후각을 잃은 가이아르 부인이니 아이에겐 다행이다. 영아살해 죄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생선장수 엄마에 대한 헌사였는지 아기의 첫 마디는 '생선'이었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그르누이는 홍역, 이질, 수두, 콜레라 등의 질병과 크고 작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생존한다.

수도원에서의 지원이 끊기자 유모는 여덟 살이 된 그르누이를 무두장이에게 팔아 넘긴다. 고난의 도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부패된 동물들 사체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와 가죽으로부터 살점들을 떼내기 위해 사용되는 위험한 약품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다.

냄새로 주인의 성격까지 파악한 그르누이는 동물의 살갗을 파고들기 위해 나무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는 진드기와 같이 언젠간 만나게 될 '기회'를 기다린다. 결국 그는 천부적인 후각을 이용해 향수제조인 발디니의 조수로 일하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발디니의 도제가 되기 전 무두질을 하던 그르누이는 저녁 산책 중 한 소녀의 향기를 좇게 되는데, 그 향기에 도취된 그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살인은 그르누이가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내어 그것을 그대로 복원해 내는 작업에 몰입하게 되는 원인과 결과가 된다.

교활한 그르누이는 인내와 절제, 겸손을 통해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얻어내고야 만다. 무두장이의 도제로서, 향수제조인의 도제로서, 향수의 원료가 되는 에센스를 제조하는 공장에서의 도제로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르누이. 빛이 없어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그 모든 일은 그의 코에서 시작되어 코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단, 그의 도제생활을 이끌던 무두장이 그리말, 파리 최고의 향수전문가 발디니, 향수공장의 드뤼오, 이 셋은 그르누이의 저주 탓인지 그와 헤어지자마자 불귀의 객이 된다.

모든 냄새를 복사하라


파리의 발디니를 떠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피해 오베르뉴 산맥의 한 동굴에서 살게 된다. 무려 7년간 도마뱀이나 뱀, 이끼 등으로 연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겐 체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산에서의 생활을 마감한다. 자신의 체취를 만들기 위해!

그라스로 무대를 옮긴 그르누이는 여기서 금작화, 오렌지꽃 등에서 침지법을, 재스민이나 밤히아신스와 같이 향 추출과정이 까다로운 꽃들에서는 냉침법을 이용하여 향수의 원료가 되는 에센스 만드는 법을 완벽하게 익힌다. 이렇게 익힌 기술로 돌, 유리, 문의 손잡이 등에서 나는 냄새들까지도 채취하는 법을 터득한다.

'특별 작업실에서 차가운 동물 유지(油脂)를 바른 유리판 위에 꽃을 뿌려 두거나, 아니면 적당하게 올리브유에 적신 헝겊으로 꽃을 감싸 놓음으로써 꽃이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해주는 방법이었다.' 냉침법에 대한 설명이다. 친절한 설명에는 이유가 있다. 향기추출방법을 터득한 그르누이가 소녀들을 살해한 후 체취를 채취할 때 바로 이 냉침법을 사용한다.

▲ 독일과 프랑스 언론의 격찬이 소개된 뒷 표지이다. 값 5,800원 현재 값의 절반 정도다. ⓒ 열린책들


향기로 절정을 맛본 그르누이, 향기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그르누이는 누구인가. 생선장수 여인에게서 태어나 생선 내장들과 함께 버려지고 버려지던 영아들 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애초에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저주받은 영혼이다. 남루하고 고달픈 그의 인생에 뜻밖에도 초인간적인 후각이 동반자가 되면서 목표라는 것이 생긴다.

유모들에게 버림받고 악덕 업주들에게 고통 받지만 웅크린 채 묵묵히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목표는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 것. 그 향기는 소녀들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비극을 잉태한다. <광화사>의 화가 솔거가 최고의 작품을 위해 여인의 죽음을 조건(條件)하는 것처럼 말이다.

변검(变脸)과도 같이 자유자재로 스스로를 덫 씌울 수 있는 다양한 냄새와 25명의 소녀들로부터 얻은 최고의 향기가 그르누이를 우리 이웃처럼 편히 느껴지게도 하고, 때론 신(神)보다 더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추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인간이 마치 돈이나 명예 또는 권력의 다소(多少)에 따라 달리 보이듯이 말이다.

프랑스 왕국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파리의 한 식료품 시장(옛 이노생 묘지 자리)에서 태어난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일까 결국 악취를 좇아 자신이 태어났던 그 자리로 돌아와 충격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그르누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가 만든 향수로 부린 마술이다.

덧붙이는 글 <향수>의 저자는 독일의 파트리크 쥐스킨트이고 번역은 강명순이며, 제가 읽은 책의 출판연도와 출판사는 1996년, 열린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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