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몽골제국 수도 될 뻔했다
[2013 전국투어 - 제주도③] 역사를 통해 본 '탐라'
<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입니다. 10월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제주도입니다. [편집자말]
▲ 제주도 남서부 모퉁이에 있는 송악산에서 찍은 제주 남쪽 바다. 인근에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가 있다. ⓒ 김종성
육지 사람들은 제주도 탐라의 역사를 육지 역사의 틀 속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만약 한 번쯤 제주도의 입장에서 그 역사를 바라본다면 이곳이 훨씬 더 큰 영토를 가진 국가이자 훨씬 더 큰 바다의 중심 세력이었으며, 세계 최강 몽골제국으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지역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곳은 몽골제국의 수도가 될 뻔했던 섬이다.
먼저 탐라의 영토가 제주도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추론케 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백제의 지배력이 전라도 전역에 제대로 미치기 이전에 탐라국이 전라도 일부를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편에는 탐라국이 조공을 하지 않자 498년 백제 동성왕이 탐라를 침공하려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참고로 조공은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이었다. 다만 신하국은 바치고 상국(上國)은 답례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신하국 입장에서는 굴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국은 신하국에게 굴욕을 안기는 대신에 무역 적자를 감내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무역은 신하국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했다.
동성왕이 보낸 군대가 '위협적인 지역'까지 다가오자, 탐라왕은 신속히 화친을 요청했다. 그 '위협적인 지역'은 어디일까? '백제본기' 동성왕 편에서는 그곳이 지금의 광주였다고 말한다. 백제군이 광주까지 접근한 사실에 놀란 탐라왕은 서둘러 화친을 요청했다. 만약 탐라 영토가 제주도에만 국한됐다면, 이 섬의 사람들은 적군이 전라도 해안쯤에 나타났을 때부터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북부지역쯤에 해당하는 광주에 백제군이 출현하자 탐라인들이 놀라서 화친을 서둘렀다는 것은 탐라의 북방 국경이 광주 부근 어딘가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광주 밑에 있는 나주에서 탐라 왕릉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군이 발견된 것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이것은 탐라가 육지에서도 상당한 영토를 보유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탐라가 지배한 바다는 한반도 남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탐라인들은 한·중·일 삼국의 해상을 연결했을 뿐만 아니라 상하이 앞바다에까지 해상 기지를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당나라 때 상하이 근처의 주산 열도에 있었던 신라방 혹은 신라번이라는 해상 기지의 존재에서도 추론이 가능하다.
바다 경영에 적극적이었던 탐라
▲ 동아시아 해역. ⓒ 김종성
서기 9세기에 중국 교포인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자마자 한·중·일 삼국의 해상 네트워크를 남해안에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에 대한 신라 정부의 지배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만약 신라 정부의 지배력이 강했다면 장보고가 그처럼 신속히 남해를 장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6세기에 해상강국 가야를 멸망시키고 7세기에 해상강국 백제를 멸망시킨 나라가 9세기가 넘도록 남해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면, 신라의 해상 지배력이 약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라가 한반도 남해안을 넘어 상하이 앞바다까지 해상 기지를 확장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바다의 강자인 탐라·백제·가야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은 쪽은 탐라였다. 탐라국은 12세기 전반 혹은 그 직전에 고려왕조의 탐라현으로 편입된 뒤에도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육지 정권의 지배력은 탐라까지는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조선 초기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가야·백제가 망한 뒤에 한반도 남쪽 해역을 지배한 쪽은 탐라국일 수밖에 없고, 가야·백제 출신의 해상세력이 손을 잡은 대상도 탐라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아시아 바다를 누비며 상하이 앞바다에까지 해상 기지를 건설한 주역은 탐라인들과 그들에게 합세한 가야·백제 출신 해상세력이라고 봐야 한다.
240여 개의 섬들로 구성된 주산 열도에 세워진 해상 기지가 신라방이나 신라번으로 불린 것은 탐라가 형식상으로는 신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사람들의 눈에서는 탐라국 사람들도 신라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당나라를 상대하는 탐라인들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나라인들과의 거래에 더 유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는 당나라의 최대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14세기 후반에 주산 열도의 해상세력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자 탐라로 도주한 일이 있다. <고려사> '공민왕 세가'에 따르면, 탐라로 도주한 해상세력 가운데서 100명 정도가 고려 정부에 체포되어 명나라로 압송됐다. 이것은 탐라인들이 그때까지도 여전히 주산 열도와 긴밀한 관련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주도의 말과 목장에 관심 보인 몽골
마지막으로 탐라는 세계 최강인 몽골제국으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지역이다. 몽골은 심지어 이곳에 수도를 세우려고 한 적까지 있다. 유목민 출신들이 이 정도로 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몽골제국에 대해 가장 늦게까지 집단적 차원에서 저항한 고려인들은 삼별초 잔존세력이었다. 이들은 서남부 해안을 거점으로 몽골에 맞서 싸우다가 1271년에 제주도에 들어가 2년간이나 저항했다. 외지인들이 탐라에 가서 2년씩이나 버티는 것은 토착 지배세력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봐야 한다.
▲ 제주도 송악산에서 찍은 백마. ⓒ 김종성
그런데 삼별초를 진압할 목적으로 탐라를 침공한 몽골은 이 섬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목민 출신인 그들에게 이 섬이 매력적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들은 제주도의 말과 목장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중국측 관점에서 기록된 몽골 역사서인 <원사>에 따르면 1273년에 삼별초의 제주 항쟁을 진압한 직후에 몽골 조정에서는 탐라를 빼앗자는 정부 차원의 결의가 나왔다. 몽골은 1273년에 군사·행정 책임자인 다루가치를 탐라에 설치하고 이곳을 군사 활동을 위한 보급 기지로 설정했다.
1273년에 몽골은 탐라 및 전라 지역에서 300백 척의 해군 선박을 건조하고, 1277년에는 탐라에 목장까지 설치했다. 참고로 유목민 출신 국가인 몽골이 해군 선박을 건조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계 제국으로 등극한 이후에 몽골은 해상 전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몽골은 1294년에 탐라 지배권을 고려에 넘겨준 뒤에도 섬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몽골 목동들은 이곳에서 계속 활동했고, 몽골인들 중에는 토착세력과 손을 잡는 이들도 있었다. 훗날 이들은 탐라에 계속 남아 육지 정권에 대한 현지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기도 했다.
탐라로 수도를 옮기고 싶었지만
삼별초를 진압할 목적으로 탐라에 군대를 보냈다가 탐라의 매력에 푹 빠진 몽골인들은 급기야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세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고려사> '공민왕 세가'에 나온다.
공민왕 16년 2월 17일(음력), 1367년 3월 17일(양력). 주원장을 비롯한 중국인 저항세력의 반란으로 몽골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탐라를 거쳐 고려를 방문한 몽골 사신이 후한 선물을 들고 고려 수도 개경을 방문했다.
사신은 공민왕뿐만 아니라 대신들에게도 비단을 두루 나누어주었다. 선물을 분배한 뒤 사신은 몽골 황제 토곤테무르칸의 희망사항을 전달했다. 대도(몽골 수도, 지금의 북경 절반과 그 위쪽)가 점령될 경우에 몽골 황제가 탐라로 도읍을 옮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려 정부의 반대로 몽골 황제의 희망은 깨졌다. 결국 이듬해인 1368년에 대도가 점령되자 몽골은 할 수 없이 북쪽 몽골초원으로 수도를 옮겼다. 초원으로 간 몽골 정부는 1402년에 멸망했다. 몽골인들이 고향인 몽골초원보다 탐라를 우선적인 피난지로 생각했다는 것은 이 섬이 그들에게도 매력적인 곳으로 비쳤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탐라는 탐나는 곳이다.
탐라가 한때는 제주도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보유했고, 한반도 남해보다 훨씬 더 큰 바다에서 활약했으며, 세계 최강 몽골까지 이곳에 거점을 만들려고 했다는 점. 이는 우리에게 탐라와 제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다. 한반도 남쪽 끝의 섬이 아니라 동아시아 바다의 중심지로서의 탐라와 제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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