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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살, 아버지가 나를 금은방에 팔았다"

안양시민학교에서 읽은 할머니들의 백일장 작품은 명작이었다

등록|2013.10.20 12:30 수정|2013.10.20 12:30
"어려서 엄마가 돌아가셨다. 오빠 둘과 할머니하고 살았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딸이라고 미워하셔서 오빠 둘만 밥을 주고 나는 밥을 주지 않았다... 할머니는 치매가 걸린 증조할머니를 돌보라며 나를 그 집(증조할머니 집)에 보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밥을 해 먹어야 했다."

장아무개 할머니의 사연 중 일부다. 그 다음에는 친구들이 학교 가는 모습이 부러워 울었다는 이야기와 평생 배우지 못한 설움과 가난에 싸여 살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 동생이 일곱 명 태어났다... 열 살 때부터 개울가 뚝방(방죽) 위에다 원두막처럼 생긴 조그만 가게(가 건물)를 지어서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6·25 전쟁이 나고 나서 고생을 많이 했다..."

김아무개 할머니의 고생담이다. 다음 내용은 대전에 있는 방직공장에 다닌 것과 마흔 다섯 살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오남매를 혼자 키운 이야기다.

"열 살 때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시내를 따라 나갔다. 내가 들어간 곳은 금은방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그 집에다가 팔았다. 내 손에 사과 한 개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 버렸다. 나는 계속 울었지만 '울어도 울어도' 소용이 없어서..." 

최아무개 할머니가 열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식모살이로 나선 사연이다. 다음에는 금은방 집 육남매 시중을 들면서 서러운 어린 시절을 보낸 이야기가 이어졌다. 최 할머니는 그 시절을 "그때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도 없고 꿈도 없고 그저 짐승처럼 일만 하는 인간일 뿐이었다"고 표현했다.  

▲ 안양시민학교 학생과 교사 ⓒ 김경희


이 절절한 사연의 주인공들은 모두 문해(문자해독) 교육 기관인 안양시민학교의 학생들이다. 어린 시절, 생활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해 까막눈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결말은 뒤늦게 글을 깨우치고 나서 인생이 새로워졌고, 그래서 지금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1991년에 설립된 안양시민학교는 3년 과정으로 문해 교육을 하고 있다. 지난 23년 동안 대략 700여 명의 학생들이 문해교육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 학력인정기관으로 선정돼 16명의 초등학력 이수자를 배출했다. 상근교사와 자원봉사자로 이루어진 교사 10명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초교육이 부족한 성인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가을 추위가 닥쳐 꽤나 쌀쌀한 시월 어느 날이었다. 저 곳에 가면 따뜻한 차를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구나 싶어 안양시민학교에 들렀다가 할머니들이 성인문해백일장에 출품한 작품을 읽게 됐다.

그런데 읽어 보니 하나 하나가 모두 명작이다. 매끄럽지도 않고, 수려하지도 않은 문장인데 왜 그럴까, 왜 명작이란 생각이 들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불현듯 뭔가가 스쳤다. 바로 그들의 인생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들의 인생이 명품이었다. 팔순 나이에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니 분명 명품인 게다. 명품 인생이 직접 쓴 글이니 명작일 수밖에.

그들 인생이 명품인 이유는 아마도 '결핍'이란 게 있어서일 것이다. '까막눈'이라는 결핍을 채우려고 노력하며 흘린 기분 좋은 땀, 그 결핍을 채운 후에 오는 쾌감이 황혼기의 그들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 주지 않았을까.

어머니들 한 풀어 주려고 일 하다 보니 어느새

"오셨어요?
"어~ 잘 지냈어?"
"나야 늘 잘 지내죠."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안양시민학교 교사 중 한 분이 반가운 얼굴로 알은 체를 하며 탁자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바로 김경희 안양시민학교 교감이다. 교사로 일하다 교감이란 직함을 얻었지만 하는 일은 여전히 '교사'인 사람이다.

"이제 이곳에선 꽤 고참이지?"
"그렇지요, 벌써 8년이나 됐네요. 저도 이렇게 오래 일할 줄 몰랐어요. 제가 본래 한 곳에서 2년을 못 채우거든요."

"첨에 올 때는 봉사 차원이었지?"
"그렇지요, 자원봉사하려고 왔다가 눌러 앉은 거죠."

"그래, 이곳이 뭐가 그렇게 맘에 들었어?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닐 텐데."
"글쎄요, 어머니들(학생들) 한 풀어 주고 싶어서 일하다 보니, 초등학교 졸업장 주고 싶어서 하다 보니... 아! 작년에 초등학력인증기관이 돼서 어머니들한테 졸업장 줬어요. 어머니들 모두 학사모 쓰고 졸업했어요.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그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 김경희 안양시민학교 교감 ⓒ 김경희


교감 김경희, 그녀도 행복하단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행복하니, 참으로 바람직하고 환상적인 사제지간이 아닌가. 초등학력 인증기관으로 선정됐다는 전화 받았을 때와 학생들이 학사모 쓰고 졸업하던 날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녀 모습도 정말 행복해 보였다.

"모든 일에 빛과 그늘이 있잖아, 좋은 날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날도 있었을 텐데?"
"그렇죠, 당연히 있었지요. 다른 교사들이 힘들다고 그만 둘 때도 힘들었고요, 학생들이나 교사들이 아플 때도 힘들었고요, 암 투병하시던 분 돌아가셨을 때도..."
"암, 누가? 그런 분도 있었어?"
"네, 자원봉사 교사였는데 암 투병 중에 여기서 자원봉사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가 제일 맘 아팠어요. 지금은 고맙게도 그 분 남편이 봉사를 하고 있어요, 후원회장으로... 아내의 유지를 받들겠다면서."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한다. 그 순간 그녀가 "그래도 좋은 날이 훨씬 많았어요, 기억에 남는 어머니(학생)도 있고요"라며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나도 눈물을 숨길 수 있었다.

"누구?"
"역시, 우리 회장님이죠, 학생회 회장님."

"그래, 어떤 점 때문에?"
"지금 일흔 일곱이신데, 늘 학교 일에 적극적이고... 예전에 어느 핸가 대보름날이었는데, 교사들에게 나물 나누어 주려고 오시다가 넘어져서 팔이 부러진 적이 있어요. 무거운 것 들고 오다가 넘어진 거죠. 그런데도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았어요. 한 쪽 눈 시력도 잃은 상태인데도 정말 열심히 하세요. 이번 졸업식 날 상 받았어요. 죽는 날까지 공부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분이에요."

"와~정말 대단한 분이네, 이런 분 있으면 교사들도 정말 힘이 나겠는데, 보람도 있겠고."
"그럼요,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걸 배우죠. 어머니들이 알고 있는 삶의 지혜 같은 거요. 우리학교 교훈이 '교사와 학생이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우리학교'예요. 그 말이 우리학교의 모든 걸 말해 주지요. 이런 점이 저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것 같아요."

차를 마시고 밖으로 나오니 거리에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뜨거운 차를 마셔서인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가을 추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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