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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도 좋지만, 최민식 작가도 기억해주세요

전시회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 감상 후기

등록|2013.10.18 17:10 수정|2013.10.21 09:29

▲ 세종문화회관 옆길에 세워 둔 스탠딩 포스터, 큰 양산으로 연인을 위해 햇빛을 가려주고 있는 이가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다. ⓒ 정태승


'로버트 카파'라는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 작품전이 열린다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카파는 지금은 폐간된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와 <콜리어스>의 프리랜서 사진 기자였다. 그는 모두 다섯 번의 전쟁을 체험한다. 스페인 내전(1936~1939), 중일전쟁(1938) 그리고 2차 세계대전(1941~1945), 중동전쟁(1948), 인도차이나전쟁(1954) 등에 참전해 사진을 찍으며 청춘을 바친 '평생 군복 입은 평화주의자'였다고 한다.

잘 생긴 외모로도 유명해 당대 최고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애를 태운 사람이기도 하다며, 한쪽 벽면에서 상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소개하고 있다. 버그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녀가 출연했던 헤밍웨이 원작 영화의 제목이 "For whom the bell tolls"냐 "For whom the bell rings"냐를 가지고 뭐가 맞는 건지 알쏭달쏭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시장엔 이 영화가 코딱지만한 브라운관 TV로 상영되고 있다.

1954년 5월 25일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산화한 그의 마지막 작품은 '지뢰밭의 군인들'이라고 한다. 비극적인데 영웅적이다. 그래서 전설이 된다. 한창 때인 40대 초반의 나이가 신화의 무게를 더한다. 더욱이 그의 영웅적 서사를 완성하는 마침표가 지뢰밭이라니 왠지 각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완벽해서! 그가 터지는 지뢰 속 당사자인 줄도 모르고 뒤를 따르던 한 병사는 "젠장, 저게 카파가 원하는 장면인데"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카파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종군기자의 끝판왕임이 틀림없다.

스페인 내전의 걸작,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

피카소의 <게르니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그리고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 등 세 작품은 스페인 내전(1936~1939)이 낳은 3대 걸작으로 꼽힌다. 카파의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은 충격적이다. 코앞에서 한 병사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뒤로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뉴욕에서 발간된 시사화보잡지 <라이프>지에 실렸던 이 사진은 '카파이즘'이란 용어까지 탄생시켰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의 2009년 8월 19일자 사설은 <The Falling Soldier, 쓰러지는 병사>로도 알려진 이 사진이 연출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진은 1936년 9월 5일 당시 '에스페조(Espejo)'라는 마을에서 촬영된 것으로 확인됐는데, 같은 사설에서 이 마을은 전장에서 36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으며 스페인 역사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년 9월까지 이 마을(에스페조)에서 내전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가 22살에 불과했고 헝가리의 유태계 출신이다 보니 영웅심리와 파시즘에 대한 반감 등이 연출을 충동했을 수도 있다고 사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이 사진으로 워낙 유명해진 데다 이후의 종군 이력은 그 아니면 불가능한 완벽한 실제였음이 분명함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는 "사진이 뭔가 불만족스럽다면 한 발짝 더 다가가서 찍으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종군해 찍었던 사진들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고.

스페인 내전을 비롯해,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중의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등에서의 목숨과 맞바꾼 사진들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비극적 사망은 그에게 인류 최고의 종군기자라는 수식을 헌정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천착한 우리의 사진가 '최민식'

나는 로버트 카파가 찍은 스페인 내전 중 또, 한커우에서 일본의 공습 중 찍은 사진들 중에서 부상한 어린이를 안고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최민식'이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의 인물만을 찍었던 작가.

유명 배우와 같은 이름의 '최민식'은 1928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지난 2월 타계한 노 사진작가다. 주목할 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만 찍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이 '밀레'의 그림집을 사다 주었는데 그림 속 가난한 사람들에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50년대와 60년대, 그의 사진 속 등장 인물들은 카파의 사진 속 전쟁 중 사망하거나 다친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 없다. 어떤 설명보다 처연하고 가슴 아프다. 최민식은 외국인 신부가 운영하던 청소년 보호시설인 '소년의 집'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자갈치 시장의 아낙네들이 만든 손수건과 함께 미국의 불특정 다수에 부쳤다고 한다. 그러면 1달러부터 많게는 수백 달러가 들어 있는 회신을 받았다고. 

그는 사진 작가로서 60~70년대 해외 초청을 받기도 하고 해외 사진전에서 '올해의 사진가'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하다 보니 정작 국내에선 환영 받지 못했다. 군부독재 시절이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을 찍어 북한으로 보내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는 울릉도 무장공비가 그의 사진첩을 들고 있어 더욱 심하게 곤혹을 치렀다고.

그도 카파와 같이 '캔디드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말하자면 도둑 촬영이다. 그래서 초상권 침해로 사진 속 당사자가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오륙십 년대는 초상권 운운할 만큼 여유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평생을 가난한 이들에게만 눈길을 준 '최민식'은 훌륭한 사진작가이자 시대의 어른으로 한번쯤 추억하고 조명해 봄직한 작가가 아닐까 한다.

현재 그의 사진은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군부독재 시절의 거부를 견디어내고 국가의 부름을 받은 작가 최민식의 사진들을 멋진 전시장에서 만나고 싶다. 로버트 카파의 사진들처럼! 한국전쟁정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전시회는 그의 동생 코넬 카파가 설립한 ICP(뉴욕의 국제사진센터)의 협력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국전쟁 정전 후 사회상을 최민식 사진전을 통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이 전시회는 그냥 우리끼리 하면 되고 잘 되면 우리가 협조해, 해외 전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앙리마티스,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 카파의 친구였다. ⓒ 정태승


세종문화회관 지하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엔 퉁퉁한 노인이 긴 작대기로 앞에 놓인 캔버스에 뭔가 그리고 있는 사진이 있다. 바로 벌거벗은 여자들 넷이 강강수월래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림으로 유명한 '앙리 마티스'다. 그 밖에도 나이든 피카소, 마초 분위기의 헤밍웨이, 존스타인 백, 잉그리드 버그만, 윌리엄 포크너 등 카파의 절친이었다는 유명인사들의 모습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한 발짝 더 아니, 바짝 다가서서'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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