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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불상이 '청주의 미소'로 불리는 이유

김수녕 양궁장 가까이 있는 '청주순치명석불입상'

등록|2013.10.22 16:16 수정|2013.10.22 16:16

▲ 순치명석불 ⓒ 변종만


지난 20일, 풍요로움이 넘치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니 유명 관광지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럴 때 자연풍경과 함께 주변의 문화재까지 찾아보면 일석이조다.

잠깐만 시간을 내면 찾아볼 수 있는 문화재가 청주순치명석불입상(淸州順治銘石佛立像)이다. 순치명석불(충북유형문화재 제150호)은 시민들의 쉼터인 김수녕 양궁장과 가깝고, 이정골 저수지나 신항서원에 가려면 지나쳐야하는 용정동 선돌골마을 입구의 작은 개울 옆 논가에 서있다. 도심 가까이에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안내 부족으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은 게 아쉽다.

▲ 순치명석불의 얼굴부분 ⓒ 변종만


▲ 순치명석불의 몸통부분 ⓒ 변종만


석장승 모습을 하고 있는 높이 316㎝, 머리높이 70㎝의 석불 입상은 네모난 돌기둥을 깎아 선으로 얼굴과 상체를 조각했다. 마을 수호신의 기능을 겸했던 민간의 불상이 청주의 미소로 불리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언뜻 보면 공을 들이거나 신경 쓰지 않고 대충 돌에 선을 만들어 얼굴 모양을 표현한 것 같다. 하지만 양쪽의 귀가 없고 목이 짧아 균형이 맞지 않는데도 큼지막한 이마, 긴 눈썹, 내려뜬 눈, 도드라진 눈두덩이, 짤막한 코, 반달모양의 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정감이 느껴진다. 소리 없이 빙긋이 웃는 그런 웃음이 미소다. 순치명석불의 꾸밈이 없는, 그래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찾아온 사람들을 빙그레 웃게 한다.

조성연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석불의 몸통부분 아래에 '순치9년11월 16일입(順治十一月十六日立)'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조선 효종 3년(165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은 원래 이 근처 마을이 장승배기였고, 석불이 2개였는데 홍수에 멀리 떠내려간 것을 찾아와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고 얘기한다.

▲ 외삼문과 신항서원 ⓒ 변종만


▲ 묘정비와 계개당 ⓒ 변종만


순치명석불에서 600여m 거리의 이정골마을 북쪽 끝에 신항서원(莘巷書院)이 있다. 신항서원(충북기념물 제42호)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와 고려 후기의 학자로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목은 이색을 비롯한 아홉 선현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선조 3년(1570년)에 유정서원으로 세워졌고, 1660년에 신항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57년 복원하였다. 조선시대의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으며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묘정비는 신항서원의 건립경위와 제향 인물에 대해 기록한 비석으로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계개당은 평소에는 선비들이 공부하는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고 제향 때는 선비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강당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항서원의 사당인 구현사에는 중앙의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목은 이색, 남계 경연, 강수 박훈,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송재 한충, 천곡 송상현, 서계 이득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신항서원의 내삼문과 구현사(九賢祠) ⓒ 변종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블로그 '추억과 낭만 찾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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