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장에서 만난 일본인들

올해는 갑오동학농민혁명 119주년... 그들은 왜 동학 다큐멘터리를 찍었을까

등록|2013.10.25 14:44 수정|2013.10.25 14:44
내년 2014년은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되는 해다. 육십갑자가 두 번 겹치는 특별한 해이므로, 내년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제10회 전국기념대회'는 서울에서 열기로 했다. 그리고 올해 '119주년, 제9회 전국기념대회'를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라는 이름으로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개최했다.   

119년 전의 충북 보은을 가다

지난 17∼18 양일간 '119년 전의 보은'을 보기 위해 또 한 번 먼 길 나들이를 했다. '동학의 고장'인 충남 태안에서 고장의 '갑오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일에 관여하는 사람으로서 동학의 고장인 충북 보은을 가는 일은 일종의 의무이기도 했다. 건강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으로서 1박까지 해야 하는 먼 길 출타는 부담스러웠지만(나는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 상이등급 5급이다), 약을 많이 챙겨가야 하는 등 여러 가지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갑오동학농민혁명 119주년 제9회 전국기념대회 첫날의 학술대회가 열린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 전경 ⓒ 지요하


오래 전에 보은을 한 번 간 것 같긴 한데, 언제 무슨 일로 갔는지는 기억이 명확치 않다. 또 그때는 보은이 동학의 고장이라는 것도 몰랐다. 보은이 동학의 고장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보은(報恩)이라는 지명이 한결 정답게 느껴지게 된 것은 인지상정이기도 할 터였다.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우리 일행은 먼저 청주의 충북대학교로 갔다. 구내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교내 개신문화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1993년, 동학농민혁명 전야(前夜)를 밝히다'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학술대회였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전 이사장)의 기조 강연 '1890년대 변혁지향운동과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연계성'만을 듣고 개신문화관을 빠져나와 보은으로 향했다.

먼저 보은읍 성족리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으로 가서 합토식을 보고 위령헌화를 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전국 각지의 흙을 가지고 와서 한데 합하는 합토식을 보면서 나는 충북 보은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중심지였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

합토식 갑오동학농민혁명 119주년 제9회 전국기념대회 첫날인 17일 오후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의 '합토식' 장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전국 각지의 흙을 가져다가 한데 합하는 행사였다. ⓒ 지요하


보은은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은거했던 곳이고, 1894년 10월의 대봉기에 앞서 1893년 3월 장안면 장내리에서 전국 규모의 '보은취회'가 열렸던 곳이다. 또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이 충북 영동을 거쳐 보은 '북실' 마을로 퇴각해 들어와서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복실 마을로 들어온 동학농민군은 함박눈을 맞으며 밤을 새우다가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2600여 명이 처참하고도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나는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의 '통곡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보은군청에서 나온 해설사로부터 복실전투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거듭 탄식을 해야 했다. 신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꾸만 일본에서 온 다큐멘터리 제작진 쪽으로 신경을 쓰곤 했다.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부터 나는 그들을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온 다큐멘터리 제작진이라는 말을 들은 탓이었다. 감독도 촬영기사도 중년을 넘긴 사람들이었고, 음향기기를 들고 있는 보조기사만 젊은이였다. 그들은 젊은 여성 통역사를 대동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를 취재하는 일본 다큐멘터리 제작진 

그들은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에서 합토식을 취재한 다음 합토식에 참여했던 태안동학농민혁명유족회의 문영식 회장(여, 59)을 붙잡고 오래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문영식 회장에게 가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서도 얘기를 많이 하라고 주문을 했다.

나는 내년의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제10회 전국기념대회'를 생각하고, 올해 119주년 전국기념대회에 대해서는 애초 글을 쓸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치밀한 취재 활동을 보면서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일본군을 떠올리자니 그쪽으로 글을 하나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인터뷰일본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동학농민혁명 전국기념대회의 전모를 정밀 취재하면서 '합토식' 후 태안유족회의 문영식 회장과 오래 인터뷰를 했다. ⓒ 지요하


내게 인터뷰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일본 말을 모르는 내가 여성 통역사에게 인터뷰를 자청한다는 것도 번거롭고 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일본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끝내 좌절하고만 사실을 일본인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자기모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할 터였다. 문영식 회장에게 일본군의 만행 사실을 언급하라고 주문을 한 것도 사실은 불유쾌한 일이었다.

119년 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은 거의 일본군 때문이었다. 우금티 전투 참패도, 북접 동학군의 홍주성 전투 패퇴도 결정적 요인은 일본군의 신무기였다. 일본군은 연발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박격포 등의 대포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 정예부대의 신무기 화력 앞에서 동학농민군은 사실상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신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을 생각하면 조선시대 슬기롭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의 우둔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일찍부터 약삭빠름을 발휘했다. 일본 근해를 지나다가 난파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상륙하는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선원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들에게서 무기 만드는 방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조선의 관리들은 1653년(효종 4년)에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 선원 하멜 등 38명을 여러 곳의 병영에 분산 감금하고 박대만을 했을 뿐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후 인질로 붙잡혀 가서 청나라 심양과 북경에서 9년 동안 생활하며 서양 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소현세자를 견제하다가 결국은 독살을 하고 말았다. 소현세자가 넓은 세상에서 접하고 온 서양 문물을 조선 최고 암군(暗君) 중의 하나인 인조와 조정 관리들은 오로지 치지도외만을 했던 것이다.

일본 관리들과 조선 관리들의 안목과 습성의 차이는 결국 20세기로 넘어와서도 한국은 여전히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해서 낫을 벼리고 호미를 벼릴 때 일본은 군수공장에서 비행기를 만들고 잠수함을 만들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막강한 힘을 비축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창피하기 짝이 없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결정적 실패를 일본군의 개입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하는 것도 사실은 민족의 열패감과 연결되어 어느 정도 자기모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일본의 다큐멘터리 제작진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에게 붙잡혀 카메라 앞에 서서 오래 인터뷰를 하는 문영식 회장을 보자니 처량하고 안쓰러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부터 나는 이상한 궁금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부터 보은의 여러 행사장을 돌며 동학농민혁명 119주년 전국기념대회의 전모를 정밀 취재하고 있는 일본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근본 의도가 몹시 궁금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시각으로 119년 전의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고 또 어떤 관점으로 오늘의 전국기념행사를 보며 무슨 의미를 도출해낼지, 나로서는 궁금함을 지나 불안한 심정마저 끼어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태안유족회의 문영식 회장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태안 백화산 '교장(絞杖)바위'의 참혹한 사연까지 소개를 했다는데, 일본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그 부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더럭 궁금하면서도, 결국은 그 궁금증이 불유쾌한 열패감과 연결되니 더욱 난감하고 우울한 심정이었다.

통곡의 계단보은읍 성족리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의 '통곡의 계단'을 오르면서 공주 '우금티전투'와 보은의 '복실전투'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 지요하


그런 심정 때문에 나는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의 '통곡의 계단'을 오르는 일이 더욱 힘들었다. 2600여 명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복실전투의 참상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몸이 절로 곱송그려지기도 했다.

보은 행사장에서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를 떠올리다

18일 저녁에는 유족들의 숙소인 속리산 레이크힐스호텔의 9층 대연회장에서 '유족회원 위로의 밤'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장에서도 일본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취재했다. 취재에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그들의 취재 모습에 신경을 쓰다가 불현듯 2007년 공주의 '우금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의 청탁을 받고 지은 내 장막 희곡 <저 바위에는 꽃이 피네>을 떠올렸다.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에 관한 이야기였다. 교장바위를 동학농민혁명군과 관련하는 '絞杖바위'로 보는 시각과 일제 때 일본인 교장과 관련하는 '校長바위'로 보는 시각에 의한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과거 태안 동학농민혁명군 진압에 앞장섰던 일본군 장교의 후손이 증조부의 일기를 가지고 온 덕에 논란이 매듭을 짓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창작이지만,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기록습성'을 일면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또한 일본군 장교의 그 기록에 의해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 논란'이 종식된다는 설정 또한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제 때 일본총독부의 유화정책에 편승하여 '絞杖바위'를 교묘히 '校長바위'로 치환하는 일본인들의 교활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설정을 차용했지만, 그것은 지금도 내 가슴에 찜찜함으로 남아 있다.             
   
그런 생각이며 찜찜한 마음 때문에 나는 유족의 밤 행사에서 흥을 낼 수가 없었다. 여러 유족들이 다투어 무대로 나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지만 나는 신나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건강 문제 때문에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하니 더욱 흥이 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권유를 사양하고 끝내 노래 한 곡도 부르지 않았다.

정상혁 보은군수갑오동학농민혁명 119주년 제9회 전국기념대회 첫날 저녁 속리산 '레이크힐스호텔' 9층 대연회장에서 '유족 위안의 밤' 행사가 열렸다. 정상혁 보은군수가 인사말을 하면서 보은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들려주어서 깊은 김명을 받았다. ⓒ 지요하


이 글을 마치면서 정상혁 보은군수에게 감사하고 싶다. 민주당 후보로 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탈당을 한 분이라 내 선입견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18일 저녁 '유족의 밤' 행사에서 그의 인사말을 들으며 크게 감명을 받았다. 올해 72세라는 그는 원고 없이 보은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얘기를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그가 복실전투의 참상을 말할 때는  내 콧마루가 찡하기도 했다. 보은을 동학의 고장답게 가꾸어 가려는 그의 의지에 감사한 마음 한량없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