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가 최루탄 속에 태어난 명곡?
[서평] 1970∼80년대 대중문화사가 오롯이 담긴 <낭만광대 전성시대>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중략)
- 양희은 <늙은 군인의 노래> 일부
지난 2010년 4월 5일,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인 '강석·김혜영의 싱글벙글쇼'에서 가요 <늙은 군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천안함 침몰사고 희생자와 한주호 준위·남기훈 상사를 추모한다는 멘트와 함께 이 곡이 나왔던 것.
청취자들에게 '깜짝 선곡'이라는 의아함과 놀라움은 어느새 심금을 울렸다. 방송을 들은 청취자 대부분은 잠시나마 마음속 깊이 고인들을 추모하며 이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을 따라 불렀으리라. 하지만 이 <늙은 군인의 노래>가 유신시대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신시대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1970~80년대 대중문화를 다룬 책 <낭만광대 전성시대>가 출간돼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저자 오광수(<경향신문> 문화사업국장)씨는 오랜 기자생활 동안 직접 만나고 체험하며 호흡해온 낭만적인 '광대' 들의 진솔한 삶을 담았다. 직접 체험한 이야기와 전해들은 이야기 그리고 그와 관련된 시대상을 펼쳐놓아 오늘날 한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단언컨대 박정희 정권은 대중음악계의 '암흑기'
1970~80년대 대중문화를 규정했던 가장 큰 힘은 단언컨대 '독재권력'이었다. 특히 대중가요는 철저한 검열을 통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설령 그렇게 나온 노래가 있다고 해도 다시 정치적 억압을 통해 가위질을 당하거나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만들고 본격적인 독재의 칼날을 휘두르던 시기. 우리 대중음악계는 한 마디로 '암흑의 시대'였다.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문화공보부가 공연활동 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수많은 노래들이 금지곡들로 하나둘 묶이기 시작했다.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거나 패배·자학·비관적인 가사, 선정·퇴폐적인 곡이라고 결정되면 무조건 퇴출대상이 됐다.
아무리 독재의 칼날을 휘두르던 시대였지만, 금지곡 선정 이유들이 무척 황당했다. 지금이야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화 덕분에 대부분의 노래들이 해금됐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지금은 명곡 반열에 올라있는 신중현의 <미인>은 내용이 '퇴폐적'이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반정치적'이라 금지곡이 됐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나 한 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중략)
- <미인> 작사·작곡 신중현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중략)
- <거짓말이야> 작사·작곡 신중현
문제가 되는 대목은 어디였을까. <미인>의 경우,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가 퇴폐적이란다. 또 <거짓말이야>의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이라는 노랫말은 반정치적이라는 '누명'을 썼다. 일설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방송 연설 직후, 한 방송국에서 <거짓말이야>를 트는 바람에 금지곡이 됐다고도 한다.
신중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정권에서 국민통합을 추구하는 곡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의 노래가 무더기로 금지곡이 됐다고 한다. 심지어 조국 산천이 아름답다고 외친 <아름다운 강산>까지 금지곡 딱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밖에도 금지곡 리스트에는 물고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한대수의 <물 좀 주소>가, 허무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한다는 이유로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의 노래가 포함됐다. 특히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가관이었다. 노래에서 강조하는 '행복의 나라'가 혹시 북한이 아니냐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가 붙었기 때문이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중략)
- <행복의 나라로> 작사·작곡 한대수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이게 공권력 조롱?
'OOO을 연상케 하므로 금지!'라고 밝혀진 금지곡 심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 이장희 <그건 너> :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못 이루나' → 늦은 밤까지 잠 못이루는 이유가 무엇인가?
▲ 배호 <0시의 이별> : 하필이면 통행금지 시간인 자정에 이별을 하는 게 말이 되는가?
▲ 혜은이 <제3한강교> :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 외설적인 가사 자체가 문제.
▲ 송창식 <왜 불러> :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 장발단속에 저항하고 공권력을 조롱함.
▲ 조영남 <불 꺼진 창> : 쓸데없는 상상력을 불러 일으킴.
▲ 이장희 <한잔의 추억> : '마시자, 한 잔의 술' → 청소년들이 술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 있음.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건으로 살해된 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지만, 대중음악을 향한 정권의 탄압은 여전했다.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때 그 여인' 심수봉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됐다.
▲ 심수봉 <순자의 가을> : 영부인인 이순자 여사를 연상케 함.
▲ 심수봉 <무궁화> : '참으면 이긴다'→ 참으면 어떻게 누가 이긴다는 것인가?
▲ 전인권 <그것만이 내 세상> :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창법이 미흡해서 놀림거리가 될 수 있음.
▲ 쟈니 리 <내일은 해가 뜬다> : '내일은 해가 뜬다' → 그렇다면 오늘은 해가 안 떴다는 것인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80년대 금지곡 리스트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대학가 시위현장을 중심으로 불리던 '운동권 노래'들은 대개 구전가요였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정권이 금지시킬 수 없는 영역에서 불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곡들이 구전가요나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형태로 불렸고, 대부분 미디어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전가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음악에 비해 오랜 세월 구전돼 현실의 시련과 막연한 인생 여정의 암시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건강한 정서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10여 년 전 가수 태진아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곡을 발표해 크게 히트했다. 물론 그 곡은 교도소에서 많이 불렸다는 구전가요 <영자송>을 기초로 편곡을 한 곡이었다.
영자야 내 딸년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서울에 있는 이 아빠는 사장님이 아니란다
(이하 '추임새' 부분은 심의 관계상 생략)
서울에 있는 이 아빠는 사장님이 아니라서
광화문하고도 한복판에서 싹싹 닦는 청소부란다. (추임새)
영자야 내 동생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군대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란다. (추임새)
군대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라서
38선 하고도 철책 선에서 빡빡 기는 군바리란다. (추임새)
영자야 내 동생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서울에 있는 이 언니는 여대생이 아니란다. (추임새)
서울에 있는 이 언니는 여대생이 아니라서
청계천 하고도 지하공장서 뺑이 치는 공순이란다.
- 구전가요 <영자송>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 대학생활을 한 이라면 이 노래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영자송>으로 대표되는 구전가요들은 도시의 불빛 속에서 자신의 빛을 찾지 못하던 민중들의 절망이 담긴 노래였다. 대학생들도 소주에 과자를 옆에 두고 <성냥공장 아가씨>와 함께 구전가요를 불렀다.
비록 세련되고 화려하진 않지만, 유희적으로 세태를 풍자하고 토속적이며 인간적이기까지 한 이런 가요들을 어느 명곡에 견줄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 시절 이런 노래들을 수많은 사람들이 불렀다는 점이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일주일에 열두 갑
치마 밑에 숨겨 놓고 정문을 나서다~
(심의 관계상 이하생략, 참고로 2절은 '설탕공장')
- 구전가요 <성냥공장 아가씨>
산업화의 희생양 우리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 경아와 영자
1970년대 초반 수출 100억 불 달성으로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삼촌들은 월남전에서 하나같이 마음의 상처와 육체의 부상을 입고 귀국했지만,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누이들은 하나둘 도시로 떠났다. 도시에 나가 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공장 직공 혹은 버스 안내양이나 식모살이였다. 또 누군가는 독일로 간호사가 돼 떠났다.
최인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을 발표했다. 차가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된 호스티스 경아의 사랑 이야기였다. 3선 개헌과 유신헌법 등으로 한층 검열이 강화돼 새마을운동 영화와 전쟁영화,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영화들이 판치던 영화계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린 이 베스트셀러 소설은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했다.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 보는군" "아저시, 추워요. 안아주세요" "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 등 낯간지러운 명대사를 만들어 낸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 신성일과 안인숙을 주인공으로 앞세워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주관객은 정든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온 우리들의 누이들이었다. 누이들은 밤샘 작업을 해서 번 돈으로 소설책을 사 보고, 또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별들의 고향>에 이은 또 하나의 히트작 <영자의 전성시대>도 1970년대 우리 누이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무작정 상경한 영자가 식모로 일하다 성폭행 당한 뒤 버스안내양을 거쳐 외팔이로 청량리 588 직업여성으로 전락한다는,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스토리였다.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한국 영화계는 호스티스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만다. 순박한 시골처녀가 다방에서 일하다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꽃순이를 아시나요>와 <오양의 아파트> 역시 누이들의 기구한 삶을 다뤘다.
또 자유연애를 표방하는 여대생을 다룬 장미희의 출세작 <거울여자>와 호스티스로 살다가 스물여섯 살에 생을 마감한 여주인공의 애처로운 삶을 다룬 <26×365=0> 등은 당국의 검열 강화로 의식있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시대상황이 낳은 결과였다.
경아나 영자는 어쩌면 대한민국을 경제부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일지도, 혹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좋은 남자 만나서 살림 차리고, 토끼 같은 자식 낳아서 알콩달콩 사는 게 꿈이었던 소박한 경아와 영자 누나는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행복할까.
흑백시대 대표작 <수사반장>과 컬러시대 대표작 <전원일기>
금성TV. 1966년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요술상자'의 이름이다. 지금의 LG가 만든 이 흑백TV는 고단한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마법과 같았다. 여름날 저녁 시골 마을의 안마당에 TV를 내놓고 온동네 사람들이 보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만은 아니었다.
MBC가 1974년 방영을 시작한 <타잔>은 흑백TV 세대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리즈다.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치타 흉내를 내는 것이 대유행이 됐다. 당시 <타잔>의 인기가 짐작된다.
또, 1972년 KBS를 통해 전파를 탄 <여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분이(태현실 분)가 최주사댁의 모자라는 아들(장욱제 분)과 결혼한다는 신산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여로>는 명실상부한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랐다. 70년대 힘들었던 삶을 살아야 했던 대다수 국민들은 드라마를 보며 마치 자기 일처럼 혀를 차고 눈물을 훔쳤다. 하루하루 울고 싶도록 힘든 삶에 지쳐있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드라마를 핑계로 실컷 울 수 있었다.
1975년 매주 토요일 저녁, 전국의 까까머리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지직거리던 흑백화면 앞으로 불러 모았던 인기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시추에이션 국민드라마 <전우>였다. TV가 없는 아이들이 오죽하면 동네 만화방에서 눈물을 머금고 거금 10원까지 주고 기를 쓰며 이 드라마를 봤겠는가.
'반공방첩'의 기치 아래 북한을 '괴뢰도당'이라고 부르던 그 시절, 극악한 괴뢰군들을 용감무쌍하게 무찌르던 국군의 활약은 전 국민의 혼을 쏙 빼놓고도 남았다. 특히 늠름하고 멋진 소대장(나시찬 분)의 말 한 마디에 죽음의 공포를 조국의 품에 기꺼이 바치던 부대원들의 모습에 수많은 아이들은 열광했다. 그 시절, '별셋'이 부른 주제곡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후 10월부터는 간첩 잡는 대공기관 '113 수사본부'의 활약상을 그린 반공 드라마 <113수사본부>(문화방송)가 나왔다. <113수사본부>는 난수표 해독·독침사건 등 매주 한 차례씩 간첩의 흉악함을 소재로 구성된 일종의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다. 정리하면 간첩단 사건을 소재로 일일드라마를 만들어 내보낸 것.
이 드라마는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부풀린 소재에 허구까지 덧붙여 제작됐다. 온국민의 의식속에 '반공의식'을 심기에 충분했다. 텔레비전이 있는 친구네 집에서 <113수사본부>를 본 뒤 컴컴한 언덕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갈 때, 뒤에서 간첩이 따라오는 것만 같아서 집을 향해 마구 달리던 기억이 나지 않는가?
특히 1971년 3월부터 시작된 <수사반장>은 70년대 안방극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드라마였다. <수사반장>의 최불암이 서민적이고 인간적이지만 날카로운 추리력을 가진 형사반장이었다면, 컬러시대 대표드라마 <전원일기>의 최불암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최불암은 <수시반장>과 <전원일기> 덕분에 국회의원이 됐고, 유인촌은 문화부장관에 오르기까지 했다. 최불암은 <전원일기>의 열혈 시청자였던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으로, 유인촌은 현대 가에서 뼈가 굵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전원일기>의 영향력을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사랑노래 <창밖의 여자>, 1980년 민초들의 대변곡?
우리 시대의 명반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앨범이 있다. 바로 1980년대 벽두를 장식했던 조용필의 앨범 <창밖의 여자>다. 그 해 대학 캠퍼스는 온통 구호와 최루탄 투성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최후를 맞이한 직후 모두들 '민주화의 봄'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권력의 상층부에서는 이상 징후가 발생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체포되면서 군부는 박정희 살해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1980년 개강과 함께 대학가는 온통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전두환은 학내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결국 온나라가 군부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자국 군대의 총칼에 희생됐다. 역설적이게도 <창밖의 여자>는 그 아비규환 속에서 태어났다.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은 대학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던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는 절규는 민주화의 꿈을 한꺼번에 잃은 민초들의 한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 노랫말은 평범한 사랑노래에 불과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군부정권에 반기를 든 내용으로 다가왔다. 국민가수, '가왕'의 본격적인 등장은 이렇게 시작됐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며 사람들은 정과 낭만, 여유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그래도 옛날이 참 좋았다"고 말한다. 기자 생활의 대부분을 신중현·조용필 등 소위 '딴따라'들과 보냈던 저자 오광수씨는 디지털 시대의 한가운데서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하며 옛 기억을 반추한다.
낭만의 이름으로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우리시대의 광대들
저자 오광수씨는 책 프롤로그를 통해 "되도록이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하려 했고, 정치권력이 한 인간과 한 시대를 어떻게 난도질했는지를 보여주고, 대중문화가 우리네 삶의 당의정이나 조미료 역할을 넘어서 시대정신을 만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고 감히 밝힌다.
1부 '진격의 거인 조용필'에서는 30년 호형호제하는 조용필과의 만남과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고, 2부 '낭만광대의 시대'에서는 장소팔·고춘자·사영춘·이주일 등 불멸의 코미디언들과 흑백TV 시대의 국민 드라마·드라마작가·잡지와 만화 등을 조명했다. 이어 3부 '노래가 인생에게 물었다'에서는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 사단에서부터 6080세대를 풍미했던 가수들, 정권에 짓밟힌 금지곡과 저항가수들, 음악다방의 황제 DJ들과 매니저들의 일상까지 가요계의 애환과 갖가지 현상들을 소개했다.
마지막 4부 '그 많던 영자는 어디로 갔을까'에서는 '진짜 진짜', '얄개'로 대표되는 교복 영화에서부터 당시를 풍미했던 영화, 암울했던 시대에 '빨간'으로 표장된 불법 영화와 도서 등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던 세운상가를 둘러보며 흘러간 시대상을 추억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낭만의 이름으로 노래하고 연기하며 팬들과 기쁨과 아픔을 함께한 이 시대의 진정한 '광대'들이 있었기에 당시 민중들이 고된 시대를 살아가며 위로받지 않았을까. 나아가 오늘날 한류라는 이름의 세계적 문화상품이 탄생하지는 않았을까.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중략)
- 양희은 <늙은 군인의 노래> 일부
▲ 조용필과 아날로그 시대의 대중문화 사수기 <낭만광대전성시대> 표지. ⓒ 세상의아침
청취자들에게 '깜짝 선곡'이라는 의아함과 놀라움은 어느새 심금을 울렸다. 방송을 들은 청취자 대부분은 잠시나마 마음속 깊이 고인들을 추모하며 이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을 따라 불렀으리라. 하지만 이 <늙은 군인의 노래>가 유신시대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신시대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1970~80년대 대중문화를 다룬 책 <낭만광대 전성시대>가 출간돼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저자 오광수(<경향신문> 문화사업국장)씨는 오랜 기자생활 동안 직접 만나고 체험하며 호흡해온 낭만적인 '광대' 들의 진솔한 삶을 담았다. 직접 체험한 이야기와 전해들은 이야기 그리고 그와 관련된 시대상을 펼쳐놓아 오늘날 한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단언컨대 박정희 정권은 대중음악계의 '암흑기'
1970~80년대 대중문화를 규정했던 가장 큰 힘은 단언컨대 '독재권력'이었다. 특히 대중가요는 철저한 검열을 통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설령 그렇게 나온 노래가 있다고 해도 다시 정치적 억압을 통해 가위질을 당하거나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만들고 본격적인 독재의 칼날을 휘두르던 시기. 우리 대중음악계는 한 마디로 '암흑의 시대'였다.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고 문화공보부가 공연활동 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수많은 노래들이 금지곡들로 하나둘 묶이기 시작했다.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거나 패배·자학·비관적인 가사, 선정·퇴폐적인 곡이라고 결정되면 무조건 퇴출대상이 됐다.
▲ 신중현이 만든 대부분의 곡은 금지곡이었다. ⓒ 지구레코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나 한 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중략)
- <미인> 작사·작곡 신중현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중략)
- <거짓말이야> 작사·작곡 신중현
문제가 되는 대목은 어디였을까. <미인>의 경우,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가 퇴폐적이란다. 또 <거짓말이야>의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이라는 노랫말은 반정치적이라는 '누명'을 썼다. 일설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방송 연설 직후, 한 방송국에서 <거짓말이야>를 트는 바람에 금지곡이 됐다고도 한다.
신중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정권에서 국민통합을 추구하는 곡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의 노래가 무더기로 금지곡이 됐다고 한다. 심지어 조국 산천이 아름답다고 외친 <아름다운 강산>까지 금지곡 딱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밖에도 금지곡 리스트에는 물고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한대수의 <물 좀 주소>가, 허무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한다는 이유로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의 노래가 포함됐다. 특히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가관이었다. 노래에서 강조하는 '행복의 나라'가 혹시 북한이 아니냐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가 붙었기 때문이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중략)
- <행복의 나라로> 작사·작곡 한대수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이게 공권력 조롱?
'OOO을 연상케 하므로 금지!'라고 밝혀진 금지곡 심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 이장희 <그건 너> :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못 이루나' → 늦은 밤까지 잠 못이루는 이유가 무엇인가?
▲ 배호 <0시의 이별> : 하필이면 통행금지 시간인 자정에 이별을 하는 게 말이 되는가?
▲ 혜은이 <제3한강교> :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 외설적인 가사 자체가 문제.
▲ 송창식 <왜 불러> : '돌아 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 장발단속에 저항하고 공권력을 조롱함.
▲ 조영남 <불 꺼진 창> : 쓸데없는 상상력을 불러 일으킴.
▲ 이장희 <한잔의 추억> : '마시자, 한 잔의 술' → 청소년들이 술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 있음.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건으로 살해된 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지만, 대중음악을 향한 정권의 탄압은 여전했다.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때 그 여인' 심수봉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됐다.
▲ 심수봉 <순자의 가을> : 영부인인 이순자 여사를 연상케 함.
▲ 심수봉 <무궁화> : '참으면 이긴다'→ 참으면 어떻게 누가 이긴다는 것인가?
▲ 전인권 <그것만이 내 세상> : 가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창법이 미흡해서 놀림거리가 될 수 있음.
▲ 쟈니 리 <내일은 해가 뜬다> : '내일은 해가 뜬다' → 그렇다면 오늘은 해가 안 떴다는 것인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80년대 금지곡 리스트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대학가 시위현장을 중심으로 불리던 '운동권 노래'들은 대개 구전가요였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정권이 금지시킬 수 없는 영역에서 불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곡들이 구전가요나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형태로 불렸고, 대부분 미디어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전가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음악에 비해 오랜 세월 구전돼 현실의 시련과 막연한 인생 여정의 암시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건강한 정서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10여 년 전 가수 태진아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곡을 발표해 크게 히트했다. 물론 그 곡은 교도소에서 많이 불렸다는 구전가요 <영자송>을 기초로 편곡을 한 곡이었다.
영자야 내 딸년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서울에 있는 이 아빠는 사장님이 아니란다
(이하 '추임새' 부분은 심의 관계상 생략)
서울에 있는 이 아빠는 사장님이 아니라서
광화문하고도 한복판에서 싹싹 닦는 청소부란다. (추임새)
영자야 내 동생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군대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란다. (추임새)
군대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라서
38선 하고도 철책 선에서 빡빡 기는 군바리란다. (추임새)
영자야 내 동생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서울에 있는 이 언니는 여대생이 아니란다. (추임새)
서울에 있는 이 언니는 여대생이 아니라서
청계천 하고도 지하공장서 뺑이 치는 공순이란다.
- 구전가요 <영자송>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 대학생활을 한 이라면 이 노래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영자송>으로 대표되는 구전가요들은 도시의 불빛 속에서 자신의 빛을 찾지 못하던 민중들의 절망이 담긴 노래였다. 대학생들도 소주에 과자를 옆에 두고 <성냥공장 아가씨>와 함께 구전가요를 불렀다.
비록 세련되고 화려하진 않지만, 유희적으로 세태를 풍자하고 토속적이며 인간적이기까지 한 이런 가요들을 어느 명곡에 견줄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 시절 이런 노래들을 수많은 사람들이 불렀다는 점이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일주일에 열두 갑
치마 밑에 숨겨 놓고 정문을 나서다~
(심의 관계상 이하생략, 참고로 2절은 '설탕공장')
- 구전가요 <성냥공장 아가씨>
산업화의 희생양 우리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 경아와 영자
1970년대 초반 수출 100억 불 달성으로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삼촌들은 월남전에서 하나같이 마음의 상처와 육체의 부상을 입고 귀국했지만,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누이들은 하나둘 도시로 떠났다. 도시에 나가 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공장 직공 혹은 버스 안내양이나 식모살이였다. 또 누군가는 독일로 간호사가 돼 떠났다.
▲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 화천공사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 보는군" "아저시, 추워요. 안아주세요" "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 등 낯간지러운 명대사를 만들어 낸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 신성일과 안인숙을 주인공으로 앞세워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주관객은 정든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온 우리들의 누이들이었다. 누이들은 밤샘 작업을 해서 번 돈으로 소설책을 사 보고, 또 영화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별들의 고향>에 이은 또 하나의 히트작 <영자의 전성시대>도 1970년대 우리 누이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무작정 상경한 영자가 식모로 일하다 성폭행 당한 뒤 버스안내양을 거쳐 외팔이로 청량리 588 직업여성으로 전락한다는,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스토리였다.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한국 영화계는 호스티스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만다. 순박한 시골처녀가 다방에서 일하다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꽃순이를 아시나요>와 <오양의 아파트> 역시 누이들의 기구한 삶을 다뤘다.
또 자유연애를 표방하는 여대생을 다룬 장미희의 출세작 <거울여자>와 호스티스로 살다가 스물여섯 살에 생을 마감한 여주인공의 애처로운 삶을 다룬 <26×365=0> 등은 당국의 검열 강화로 의식있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시대상황이 낳은 결과였다.
경아나 영자는 어쩌면 대한민국을 경제부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일지도, 혹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좋은 남자 만나서 살림 차리고, 토끼 같은 자식 낳아서 알콩달콩 사는 게 꿈이었던 소박한 경아와 영자 누나는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행복할까.
흑백시대 대표작 <수사반장>과 컬러시대 대표작 <전원일기>
금성TV. 1966년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요술상자'의 이름이다. 지금의 LG가 만든 이 흑백TV는 고단한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마법과 같았다. 여름날 저녁 시골 마을의 안마당에 TV를 내놓고 온동네 사람들이 보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만은 아니었다.
MBC가 1974년 방영을 시작한 <타잔>은 흑백TV 세대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리즈다.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치타 흉내를 내는 것이 대유행이 됐다. 당시 <타잔>의 인기가 짐작된다.
또, 1972년 KBS를 통해 전파를 탄 <여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분이(태현실 분)가 최주사댁의 모자라는 아들(장욱제 분)과 결혼한다는 신산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여로>는 명실상부한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랐다. 70년대 힘들었던 삶을 살아야 했던 대다수 국민들은 드라마를 보며 마치 자기 일처럼 혀를 차고 눈물을 훔쳤다. 하루하루 울고 싶도록 힘든 삶에 지쳐있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드라마를 핑계로 실컷 울 수 있었다.
1975년 매주 토요일 저녁, 전국의 까까머리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지직거리던 흑백화면 앞으로 불러 모았던 인기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시추에이션 국민드라마 <전우>였다. TV가 없는 아이들이 오죽하면 동네 만화방에서 눈물을 머금고 거금 10원까지 주고 기를 쓰며 이 드라마를 봤겠는가.
'반공방첩'의 기치 아래 북한을 '괴뢰도당'이라고 부르던 그 시절, 극악한 괴뢰군들을 용감무쌍하게 무찌르던 국군의 활약은 전 국민의 혼을 쏙 빼놓고도 남았다. 특히 늠름하고 멋진 소대장(나시찬 분)의 말 한 마디에 죽음의 공포를 조국의 품에 기꺼이 바치던 부대원들의 모습에 수많은 아이들은 열광했다. 그 시절, '별셋'이 부른 주제곡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후 10월부터는 간첩 잡는 대공기관 '113 수사본부'의 활약상을 그린 반공 드라마 <113수사본부>(문화방송)가 나왔다. <113수사본부>는 난수표 해독·독침사건 등 매주 한 차례씩 간첩의 흉악함을 소재로 구성된 일종의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다. 정리하면 간첩단 사건을 소재로 일일드라마를 만들어 내보낸 것.
이 드라마는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부풀린 소재에 허구까지 덧붙여 제작됐다. 온국민의 의식속에 '반공의식'을 심기에 충분했다. 텔레비전이 있는 친구네 집에서 <113수사본부>를 본 뒤 컴컴한 언덕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갈 때, 뒤에서 간첩이 따라오는 것만 같아서 집을 향해 마구 달리던 기억이 나지 않는가?
▲ MBC <수사반장>에 나왔던 형사들. 맨 왼쪽에 배우 최불암이 보인다. ⓒ MBC
특히 1971년 3월부터 시작된 <수사반장>은 70년대 안방극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드라마였다. <수사반장>의 최불암이 서민적이고 인간적이지만 날카로운 추리력을 가진 형사반장이었다면, 컬러시대 대표드라마 <전원일기>의 최불암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최불암은 <수시반장>과 <전원일기> 덕분에 국회의원이 됐고, 유인촌은 문화부장관에 오르기까지 했다. 최불암은 <전원일기>의 열혈 시청자였던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으로, 유인촌은 현대 가에서 뼈가 굵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전원일기>의 영향력을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사랑노래 <창밖의 여자>, 1980년 민초들의 대변곡?
우리 시대의 명반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앨범이 있다. 바로 1980년대 벽두를 장식했던 조용필의 앨범 <창밖의 여자>다. 그 해 대학 캠퍼스는 온통 구호와 최루탄 투성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최후를 맞이한 직후 모두들 '민주화의 봄'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권력의 상층부에서는 이상 징후가 발생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체포되면서 군부는 박정희 살해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1980년 개강과 함께 대학가는 온통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전두환은 학내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결국 온나라가 군부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자국 군대의 총칼에 희생됐다. 역설적이게도 <창밖의 여자>는 그 아비규환 속에서 태어났다.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은 대학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던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는 절규는 민주화의 꿈을 한꺼번에 잃은 민초들의 한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 노랫말은 평범한 사랑노래에 불과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군부정권에 반기를 든 내용으로 다가왔다. 국민가수, '가왕'의 본격적인 등장은 이렇게 시작됐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며 사람들은 정과 낭만, 여유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그래도 옛날이 참 좋았다"고 말한다. 기자 생활의 대부분을 신중현·조용필 등 소위 '딴따라'들과 보냈던 저자 오광수씨는 디지털 시대의 한가운데서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하며 옛 기억을 반추한다.
낭만의 이름으로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우리시대의 광대들
▲ 조용필의 경동고 시절(왼쪽)과 경동중 시절. 오른쪽 아래는 안성기. ⓒ 세상의아침
저자 오광수씨는 책 프롤로그를 통해 "되도록이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하려 했고, 정치권력이 한 인간과 한 시대를 어떻게 난도질했는지를 보여주고, 대중문화가 우리네 삶의 당의정이나 조미료 역할을 넘어서 시대정신을 만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고 감히 밝힌다.
1부 '진격의 거인 조용필'에서는 30년 호형호제하는 조용필과의 만남과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고, 2부 '낭만광대의 시대'에서는 장소팔·고춘자·사영춘·이주일 등 불멸의 코미디언들과 흑백TV 시대의 국민 드라마·드라마작가·잡지와 만화 등을 조명했다. 이어 3부 '노래가 인생에게 물었다'에서는 한국 록 음악의 대부 신중현 사단에서부터 6080세대를 풍미했던 가수들, 정권에 짓밟힌 금지곡과 저항가수들, 음악다방의 황제 DJ들과 매니저들의 일상까지 가요계의 애환과 갖가지 현상들을 소개했다.
마지막 4부 '그 많던 영자는 어디로 갔을까'에서는 '진짜 진짜', '얄개'로 대표되는 교복 영화에서부터 당시를 풍미했던 영화, 암울했던 시대에 '빨간'으로 표장된 불법 영화와 도서 등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던 세운상가를 둘러보며 흘러간 시대상을 추억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낭만의 이름으로 노래하고 연기하며 팬들과 기쁨과 아픔을 함께한 이 시대의 진정한 '광대'들이 있었기에 당시 민중들이 고된 시대를 살아가며 위로받지 않았을까. 나아가 오늘날 한류라는 이름의 세계적 문화상품이 탄생하지는 않았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