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설만 했다 하면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해 시월, 세 사람의 죽음③] 동료 구재보가 기억하는 세원테크 이해남 열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세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3년 10월의 일이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씨가 정리해고에 맞서 공장 크레인에 목을 맸다. 대구의 자동차 부품회사 세원테크의 노동자 이해남씨는 회사의 노동조합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에 저항하며 분신했다.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씨 역시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분신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질책했다. 노동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의 차가운 반응에 노동계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그 해 11월 9일, 종로거리는 성난 노동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바다가 됐다. 그렇게 큰 홍역을 앓고 난 후 10년이 지났다. 우리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자신의 몸을 던져 비정규직 차별과 노동탄압에 저항했던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 - 기자 말
'학출'은 '학생운동 출신'을 줄인 말로 노동현장에 투신한 대학생 혹은 지식인을 의미한다. 70~80년대 당시 대학생들은 졸업 후 안정된 직업과 신분상승의 기회가 보장된 사회의 엘리트였다. 안락함을 포기하고 고통받는 노동자와 함께하겠다고 결심한 만큼 이들의 선택은 숭고했다.
구재보(40)씨도 소위 '학출'이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2001년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비정규직 차별과 여전히 열악한 우리 사회의 노동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다. 재보씨가 노동현장으로 투신했던 2000년대에는 대학생이란 신분은 사회에서 별다른 경쟁력이 없었다. 따라서 대학생이 공장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숭고한 결단은커녕 경우에 따라서는 취업난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재보씨는 '학출'이란 배경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현재 민주노총 충남본부 조직부장을 맡고 있다.
재보씨가 처음으로 들어간 공장은 충남 아산의 현대자동차의 부품공급업체인 세원테크였다. 당시 세원테크는 군대식 노무관리와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노동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기에 딱이었다. 그러나 재보씨에 앞서 이미 회사에 불만을 느낀 한 노동자가 자연스레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해남(당시 39세). 대전 출신의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파친코에 빠져 빚도 지고 방탕한 시절을 보낸 적도 있었다. 결혼해 아이가 둘 생기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마흔이 다돼 세원테크에 입사했다.
당시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 관계자에 따르면, 세원테크 사측은 노조 결성을 주도하던 이해남을 9시간 넘게 감금한 채 퇴사를 종용했다. 보다 못한 재보씨와 동료들이 회의실을 박차고 들어가 그를 빼냈고 내친김에 노조결성 보고대회를 해버렸다. 2001년 10월, 그렇게 '민주노총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가 탄생했다.
노동운동 초짜들이 만들어낸 첫 작품이었다.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이해남이 지회장(위원장)으로 선출되고 구재보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해남은 자신보다 아는 것이 많아 생각이 깊고 매사에 침착한 구재보를 신뢰했다. 재보씨는 이해남을 "직선도로 같은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그렇다고 독불장군이 아니라 주변의 의견을 깊이 듣고 한번 결정하면 실행하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들은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서로 존중하는 일터로 바꾸려고 했고 일한 만큼만 대접받기를 바랐다. 노조를 만든 이유는 그뿐이었다. 그러나 재보씨는 형과 같던 이해남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이해남은 노조 결성 이후 끊임없이 노조를 파괴하려던 사측의 노조탄압에 맞서 2003년 10월 23일 세원테크 본사인 대구 세원정공에서 분신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연말 종무식 때는 회장에게 거수경례
"연말 종무식 때 사원들을 모아놓고 사장이 우수사원 표창하고 훈시를 하잖아요. 훈시 전에 관리자가 '차렷, 경례'라고 지휘하면 다른 직원들 모두가 '세원!' 하고 거수경례를 하는 거예요."
구재보씨가 입사 당시를 회상했다. 숨 막히는 현장의 군대식 분위기가 두 사람이 노조를 만든 계기였다. 이해남은 특히 젊은 나이의 작업반장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반말을 하고 폭행을 일삼는 현장의 분위기에 분노했다. 예비군 훈련을 받고 회사로 복귀하지 않았다고 직원들은 반장에게 구타를 당했다.
근로조건도 말이 아니었다. 공장에 휴게실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점심을 먹고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회사에 하나뿐인 조그만 탈의실로 몰려갔다. 잔업과 일요일 특근은 기본이었고 관리자들이 기숙사를 돌며 노동자들과 실습생들을 작업현장으로 끌고 갔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토요일 작업이 끝나면 천안으로 나가 친구네 집이나 피시방을 전전하며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다. 실습생들은 관리자의 눈을 피해 기숙사 장롱 속에서 숨어 잠을 잤다.(이해남·이현중 평전 <당신의 나의 영혼> 참고)
재보씨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니까 관리자들이 노조 눈치를 보며 반말이나 폭행이 싹 들어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작업현장에서 동료들끼리 유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세원테크 노동자들은 신입사원이 출근해도 말을 잘 걸지 않았다. 워낙 근로조건이 열악해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주야간 교대 자들끼리는 서로 이름도 몰랐다.
"삭막했던 공장이 가정적으로 변하더라고요. 노조를 하면서 서로 이름을 알고 자연스레 술도 한잔 하기 시작했죠. 선배 조합원과 형수가 기숙사 젊은 애들을 집으로 불러다 밥을 해 먹이기도 했어요."
재보씨의 말처럼 공장에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월급날 '용역깡패'에 쫓겨난 노조원들
그러나 봄날은 잠깐이었다. 구재보는 2001년 12월 10일을 잊지 못한다. 그날은 세원테크의 월급날이었다. '퇴근 후 한잔'에 들떠 있던 조합원들은 노조를 만든 지 두 달 만에 용역깡패에 의해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당시 금속노조 충남지부장으로 활동한 정원영씨에 따르면, 충남지역에서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사측의 의뢰를 받은 용역폭력배들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사례가 많았다. 12월 12일, 소식을 듣고 충남지역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연대파업을 결의했다.
"유성기업을 비롯해 충남지역 14개 노조가 통근버스를 세원테크 정문으로 돌렸어요. 단일 사업장의 노동문제를 두고 지역전체 노조가 파업을 벌이는 것은 유례가 없었죠. 그날 1500명이 우리를 돕기 위해 몰려오는데 그때 기분은 다시 느낄 수 없을 거예요."
재보씨는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15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물결에 150명의 용역 폭력배들은 공장 뒷산으로 달아났다. 회사는 노조에 무릎을 꿇었다. 회사는 노조가 요구한 '비정규직 3명의 정규직화', 그리고 '노조에 대한 민형사상 고소취하'를 받아들였다.
사측은 노조파괴전문가를 관리이사로 영입해 끊임없이 노조를 와해시키려 했다. 노조의 파업에 19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원들의 통장과 집, 자동차에 가압류를 걸었다. 이해남은 아들이 뇌수막염으로 시름시름 앓는데도 병원비를 인출할 수 없었다. 회사 관리자에게 병원비라도 가압류를 풀어달라 사정했지만 회사는 불법을 엄단한다며 거절했다.
노조를 옥죄는 또 다른 무기는 물량 이원화였다. 노조의 파업을 겪은 이후, 회사는 아산공장의 현대·기아차 납품 물량을 줄여나갔다. 줄어든 물량은 주변의 현대 하청인 신영금속, 성주하이텍, 명신 등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일거리가 줄어들고 노동자들은 생계가 막혔다. 관리자들과 회사에 우호적인 직원들이 "밥줄 끊기면 노조가 책임질 거냐"며 노조를 비판했다. 노동자들이 노조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세원테크의 노조탄압 방식은 오늘날 중소규모 제조업체의 노무관리에 큰 영감을 줬다. 노조파괴 전문 컨설팅업체로 유명한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방식은 10년 전 세원테크와 너무도 닮았다. 불법으로 용역깡패를 동원해 노사대립의 현장에서 노동자를 폭행하고 물량을 다른 공장으로 돌려 "노조 때문에 생산물량이 줄어든다"고 '일자리 위협론'을 펼쳤다. 노조로부터 조합원을 빼내 회사에 우호적인 어용노조를 만들었다.
아산에서 현대차에 부품을 납품하던 유성기업과 대구 상신브레이크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그렇게 탄압받고 있었다. '창조컨설팅'과 '컨텍터스'의 노조파괴 실태가 최근에 와서야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것을 생각하면 세원테크는 노조탄압 분야에서는 시대를 앞서 가는 회사였다.
"이해남은 절망하고 꺾일 때 나를 곧추세우는 힘"
노조는 2002년 5월 '손해배상 가압류'와 회사의 '물량이원화'에 맞서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정문에 철제 바리케이드를 치고 노조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2002년 8월 회사 정문에서 벌어진 공장진입 투쟁에서 노조원 이현중이 회사 측과의 충돌로 두개골이 함몰됐다. 그는 후유증으로 '상악동 암'이라는 질병에 걸려 2003년 8월 투병 중 사망했다.
"현중이가 저와 동갑인데 순박했어요. 노조가 어려운데 자기는 아파서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것에 크게 마음이 상했나 봐요. 요양하던 칠곡에서 자꾸 아산으로 올라오더라고요. 병세가 많이 악화됐죠."
구재보씨가 기억하는 이현중은 "사람 좋은 시골청년"이다. 이현중의 누나 이미정씨에 따르면 회사관리자들이 이현중의 순박함을 이용해 돈을 주고 노조의 동태를 파악하려 했다. 이현중은 이를 거부했고 그 일로 회사의 시달림을 받았다.
이현중의 죽음은 이해남에게 충격을 줬다. 노조원들은 크게 격앙됐다. "회사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회사의 태도는 노조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이해남과 노조원들의 대구 성서공단 앞 세원정공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현중의 죽음에 대한 회사 측의 사과와 보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다. 대구 세원정공 투쟁으로 이해남에게 두 번째 수배가 떨어졌다.
노동자가 법에서도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수배되고, 해고되는 정말로 웃기는 나라에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갖지 못할 것 같다. (중략) 내 한 몸 희생으로 노동탄압, 구속, 수배, 해고, 가압류라는 것들은 정말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2003년 10월 17일 이해남의 유서 중)
이해남은 여전히 장례도 못 치르고 병원에 누워 있는 이현중에게 미안했다. 기약 없는 싸움에 점점 힘들어하는 노조원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났다. 이현중의 유족과 노조원들이 대구 세원정공 앞에서 노숙하며 수십 일 동안 싸웠지만 사측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해남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고 가기로 결심한다. 결국 이해남은 2003년 10월 23일 대구 세원정공에서 자신의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제가요. 정말… 이해남 지회장 분신하던 10월 23일에 기아차노조 대의원 대회에서 연설을 했어요. 26일에는 세원투쟁과 지회장 분신을 알리러 서울 종각 비정규직 집회에서 연설하고 내려오는데 내 뒤에서 이용석 열사가 분신을 했고요. 근데, 더 충격적인 건요. 10월 30일 금속노조 대의원 대회서 발언해 달라고 부산엘 내려갔는데 글쎄 그날 곽재규 열사가 죽었어요."
재보씨는 이후 집회현장에서 연설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사측은 "학출인 구재보가 착한 이해남을 선동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재보씨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노조원들과 신뢰가 돈독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해남을 먼저 보냈다는 부채감은 여전했다. 그것이 재보씨가 "노동운동을 하다 절망하고 꺾일 때 자신을 곧추세우는 힘"이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분신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질책했다. 노동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의 차가운 반응에 노동계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그 해 11월 9일, 종로거리는 성난 노동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바다가 됐다. 그렇게 큰 홍역을 앓고 난 후 10년이 지났다. 우리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자신의 몸을 던져 비정규직 차별과 노동탄압에 저항했던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 - 기자 말
▲ 구재보 민주노총 충남본부 조직국장 ⓒ 이동철
'학출'은 '학생운동 출신'을 줄인 말로 노동현장에 투신한 대학생 혹은 지식인을 의미한다. 70~80년대 당시 대학생들은 졸업 후 안정된 직업과 신분상승의 기회가 보장된 사회의 엘리트였다. 안락함을 포기하고 고통받는 노동자와 함께하겠다고 결심한 만큼 이들의 선택은 숭고했다.
구재보(40)씨도 소위 '학출'이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2001년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비정규직 차별과 여전히 열악한 우리 사회의 노동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다. 재보씨가 노동현장으로 투신했던 2000년대에는 대학생이란 신분은 사회에서 별다른 경쟁력이 없었다. 따라서 대학생이 공장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숭고한 결단은커녕 경우에 따라서는 취업난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재보씨는 '학출'이란 배경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현재 민주노총 충남본부 조직부장을 맡고 있다.
재보씨가 처음으로 들어간 공장은 충남 아산의 현대자동차의 부품공급업체인 세원테크였다. 당시 세원테크는 군대식 노무관리와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노동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기에 딱이었다. 그러나 재보씨에 앞서 이미 회사에 불만을 느낀 한 노동자가 자연스레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고 있었다.
▲ 이해남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장(오른쪽), 왼쪽은 이현중 열사. ⓒ 구재보 제공
그의 이름은 이해남(당시 39세). 대전 출신의 평범한 노동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파친코에 빠져 빚도 지고 방탕한 시절을 보낸 적도 있었다. 결혼해 아이가 둘 생기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마흔이 다돼 세원테크에 입사했다.
당시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 관계자에 따르면, 세원테크 사측은 노조 결성을 주도하던 이해남을 9시간 넘게 감금한 채 퇴사를 종용했다. 보다 못한 재보씨와 동료들이 회의실을 박차고 들어가 그를 빼냈고 내친김에 노조결성 보고대회를 해버렸다. 2001년 10월, 그렇게 '민주노총 금속노조 세원테크지회'가 탄생했다.
노동운동 초짜들이 만들어낸 첫 작품이었다. 둘은 죽이 잘 맞았다. 이해남이 지회장(위원장)으로 선출되고 구재보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해남은 자신보다 아는 것이 많아 생각이 깊고 매사에 침착한 구재보를 신뢰했다. 재보씨는 이해남을 "직선도로 같은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그렇다고 독불장군이 아니라 주변의 의견을 깊이 듣고 한번 결정하면 실행하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들은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서로 존중하는 일터로 바꾸려고 했고 일한 만큼만 대접받기를 바랐다. 노조를 만든 이유는 그뿐이었다. 그러나 재보씨는 형과 같던 이해남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이해남은 노조 결성 이후 끊임없이 노조를 파괴하려던 사측의 노조탄압에 맞서 2003년 10월 23일 세원테크 본사인 대구 세원정공에서 분신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연말 종무식 때는 회장에게 거수경례
▲ 2001년 12월 노조파괴를 위해 세원테크 측이 고용한 용역깡패들 ⓒ 구재보 제공
"연말 종무식 때 사원들을 모아놓고 사장이 우수사원 표창하고 훈시를 하잖아요. 훈시 전에 관리자가 '차렷, 경례'라고 지휘하면 다른 직원들 모두가 '세원!' 하고 거수경례를 하는 거예요."
구재보씨가 입사 당시를 회상했다. 숨 막히는 현장의 군대식 분위기가 두 사람이 노조를 만든 계기였다. 이해남은 특히 젊은 나이의 작업반장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반말을 하고 폭행을 일삼는 현장의 분위기에 분노했다. 예비군 훈련을 받고 회사로 복귀하지 않았다고 직원들은 반장에게 구타를 당했다.
근로조건도 말이 아니었다. 공장에 휴게실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점심을 먹고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회사에 하나뿐인 조그만 탈의실로 몰려갔다. 잔업과 일요일 특근은 기본이었고 관리자들이 기숙사를 돌며 노동자들과 실습생들을 작업현장으로 끌고 갔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토요일 작업이 끝나면 천안으로 나가 친구네 집이나 피시방을 전전하며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다. 실습생들은 관리자의 눈을 피해 기숙사 장롱 속에서 숨어 잠을 잤다.(이해남·이현중 평전 <당신의 나의 영혼> 참고)
재보씨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니까 관리자들이 노조 눈치를 보며 반말이나 폭행이 싹 들어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작업현장에서 동료들끼리 유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세원테크 노동자들은 신입사원이 출근해도 말을 잘 걸지 않았다. 워낙 근로조건이 열악해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주야간 교대 자들끼리는 서로 이름도 몰랐다.
"삭막했던 공장이 가정적으로 변하더라고요. 노조를 하면서 서로 이름을 알고 자연스레 술도 한잔 하기 시작했죠. 선배 조합원과 형수가 기숙사 젊은 애들을 집으로 불러다 밥을 해 먹이기도 했어요."
재보씨의 말처럼 공장에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월급날 '용역깡패'에 쫓겨난 노조원들
▲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9월 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산업현장폭력용역관련 청문회에서 공개한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의 내부 문건. ⓒ 은수미 의원실 제공
그러나 봄날은 잠깐이었다. 구재보는 2001년 12월 10일을 잊지 못한다. 그날은 세원테크의 월급날이었다. '퇴근 후 한잔'에 들떠 있던 조합원들은 노조를 만든 지 두 달 만에 용역깡패에 의해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당시 금속노조 충남지부장으로 활동한 정원영씨에 따르면, 충남지역에서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사측의 의뢰를 받은 용역폭력배들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사례가 많았다. 12월 12일, 소식을 듣고 충남지역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연대파업을 결의했다.
"유성기업을 비롯해 충남지역 14개 노조가 통근버스를 세원테크 정문으로 돌렸어요. 단일 사업장의 노동문제를 두고 지역전체 노조가 파업을 벌이는 것은 유례가 없었죠. 그날 1500명이 우리를 돕기 위해 몰려오는데 그때 기분은 다시 느낄 수 없을 거예요."
재보씨는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15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물결에 150명의 용역 폭력배들은 공장 뒷산으로 달아났다. 회사는 노조에 무릎을 꿇었다. 회사는 노조가 요구한 '비정규직 3명의 정규직화', 그리고 '노조에 대한 민형사상 고소취하'를 받아들였다.
▲ 10월 20일 금속노조 유성지회 노동자들이 충북 옥천 IC 부근 광고탑에서 유성기업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처벌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다. ⓒ 이동철
사측은 노조파괴전문가를 관리이사로 영입해 끊임없이 노조를 와해시키려 했다. 노조의 파업에 19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원들의 통장과 집, 자동차에 가압류를 걸었다. 이해남은 아들이 뇌수막염으로 시름시름 앓는데도 병원비를 인출할 수 없었다. 회사 관리자에게 병원비라도 가압류를 풀어달라 사정했지만 회사는 불법을 엄단한다며 거절했다.
노조를 옥죄는 또 다른 무기는 물량 이원화였다. 노조의 파업을 겪은 이후, 회사는 아산공장의 현대·기아차 납품 물량을 줄여나갔다. 줄어든 물량은 주변의 현대 하청인 신영금속, 성주하이텍, 명신 등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일거리가 줄어들고 노동자들은 생계가 막혔다. 관리자들과 회사에 우호적인 직원들이 "밥줄 끊기면 노조가 책임질 거냐"며 노조를 비판했다. 노동자들이 노조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세원테크의 노조탄압 방식은 오늘날 중소규모 제조업체의 노무관리에 큰 영감을 줬다. 노조파괴 전문 컨설팅업체로 유명한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방식은 10년 전 세원테크와 너무도 닮았다. 불법으로 용역깡패를 동원해 노사대립의 현장에서 노동자를 폭행하고 물량을 다른 공장으로 돌려 "노조 때문에 생산물량이 줄어든다"고 '일자리 위협론'을 펼쳤다. 노조로부터 조합원을 빼내 회사에 우호적인 어용노조를 만들었다.
아산에서 현대차에 부품을 납품하던 유성기업과 대구 상신브레이크의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그렇게 탄압받고 있었다. '창조컨설팅'과 '컨텍터스'의 노조파괴 실태가 최근에 와서야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것을 생각하면 세원테크는 노조탄압 분야에서는 시대를 앞서 가는 회사였다.
"이해남은 절망하고 꺾일 때 나를 곧추세우는 힘"
▲ 세원테크 노조원 이현중 ⓒ 구재보 제공
"현중이가 저와 동갑인데 순박했어요. 노조가 어려운데 자기는 아파서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것에 크게 마음이 상했나 봐요. 요양하던 칠곡에서 자꾸 아산으로 올라오더라고요. 병세가 많이 악화됐죠."
구재보씨가 기억하는 이현중은 "사람 좋은 시골청년"이다. 이현중의 누나 이미정씨에 따르면 회사관리자들이 이현중의 순박함을 이용해 돈을 주고 노조의 동태를 파악하려 했다. 이현중은 이를 거부했고 그 일로 회사의 시달림을 받았다.
이현중의 죽음은 이해남에게 충격을 줬다. 노조원들은 크게 격앙됐다. "회사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회사의 태도는 노조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이해남과 노조원들의 대구 성서공단 앞 세원정공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현중의 죽음에 대한 회사 측의 사과와 보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다. 대구 세원정공 투쟁으로 이해남에게 두 번째 수배가 떨어졌다.
노동자가 법에서도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수배되고, 해고되는 정말로 웃기는 나라에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갖지 못할 것 같다. (중략) 내 한 몸 희생으로 노동탄압, 구속, 수배, 해고, 가압류라는 것들은 정말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2003년 10월 17일 이해남의 유서 중)
이해남은 여전히 장례도 못 치르고 병원에 누워 있는 이현중에게 미안했다. 기약 없는 싸움에 점점 힘들어하는 노조원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났다. 이현중의 유족과 노조원들이 대구 세원정공 앞에서 노숙하며 수십 일 동안 싸웠지만 사측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해남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고 가기로 결심한다. 결국 이해남은 2003년 10월 23일 대구 세원정공에서 자신의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 구재보 민주노총 충남본부 조직국장.(가운데) ⓒ 구재보 제공
"제가요. 정말… 이해남 지회장 분신하던 10월 23일에 기아차노조 대의원 대회에서 연설을 했어요. 26일에는 세원투쟁과 지회장 분신을 알리러 서울 종각 비정규직 집회에서 연설하고 내려오는데 내 뒤에서 이용석 열사가 분신을 했고요. 근데, 더 충격적인 건요. 10월 30일 금속노조 대의원 대회서 발언해 달라고 부산엘 내려갔는데 글쎄 그날 곽재규 열사가 죽었어요."
재보씨는 이후 집회현장에서 연설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사측은 "학출인 구재보가 착한 이해남을 선동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재보씨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노조원들과 신뢰가 돈독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해남을 먼저 보냈다는 부채감은 여전했다. 그것이 재보씨가 "노동운동을 하다 절망하고 꺾일 때 자신을 곧추세우는 힘"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해남이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세원테크지회는 2004년 현재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회사에 우호적인 기업별 노조로 전환했다. 이현중·이해남 열사정신계승사업회는 올해 8월 26일 이현중 열사의 추도식을 치렀다. 이해남 열사의 10주기를 맞아 오는 11월 17일 11시 천안풍산공원에서 추도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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