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받이가 된 공녀들? 황제가 알면 기겁할 일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기황후>, 첫 번째 이야기
▲ 드라마 <기황후>. ⓒ MBC
배우 하지원을 주연으로 내세운 MBC 드라마 <기황후>가 첫 회에서 화려한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제1회 초반부에 묘사된 공간과 인원은 마치 중국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 화려한 모습에 뒤이어 나온 것은 공녀들의 처참한 장면이었다. 몽골로 끌려가는 기승냥(하지원 분) 모녀의 모습이 처절하게 묘사됐다.
공녀 징발 부대에 붙들려 끌려가던 승냥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도주를 시도하다가 몽골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승냥도 하마터면 화살을 맞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몸을 피해 소금 밀매상의 삶을 살다가 하급 병사로 변신했다. 물론 실제의 기황후가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
사극 속의 공녀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느낌을 갖는다. 하나는, 공녀를 요구한 중국 혹은 유목국가들에 대한 것이다. 이들에 대해 우리는 모종의 증오심을 품는다. 또 하나는 공녀를 내준 우리나라 왕조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한심하고 무책임한 나라'라는 느낌을 품는다.
그런데 공녀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공녀 징발이 궁녀 선발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었으며, 공녀 징발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궁녀 선발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이다.
강대국인 황제국이나 상국(아래 '황제국'으로 통일)이 신하국에 공녀를 요구한 일차적 목적은 궁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공녀가 고관의 첩이 되거나 유곽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대부분의 공녀는 황제국에 가서 궁녀가 되었다. 기황후도 몽골 궁궐의 일반 궁녀로 시작했다. 그는 차를 따르는 궁녀였다.
▲ 기황후(하지원 분). ⓒ MBC
황제국이 신하국에서 궁녀를 충원한 것은 궁녀를 모으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황제국이든 신하국이든, 궁녀를 모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다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신하국에 떠넘긴 것이다.
어떤 사극에서는 궁녀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궁녀는 노예 혹은 노비와 다를 바 없었다. 궁녀는 자유인 신분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궁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궁녀를 청와대 여직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반 백성들은 궁녀 직업을 기피했지만, 궁궐에서는 어떻게든 궁녀를 확보해야 했다. 궁궐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경우에는 강제로 궁녀를 모집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민간에서는 거센 저항이 나타나곤 했다.
예컨대, 조선 효종 4년 9월 24일자(음력) 즉 1653년 11월 13일자(양력) <효종실록>에 따르면, 궁녀 지원자들이 나타나지 않자 국가에서는 관리들을 풀어 민간 여성들을 잡아갔다. 그러자 민간에서 소요 수준의 저항이 나타나고 어린 딸을 서둘러 결혼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흔히, 조혼 풍습은 공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생긴 풍습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조혼 풍습은 공녀뿐만 아니라 궁녀로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생긴 풍습이었다. 백성들은 남의 나라 궁궐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궁궐에 끌려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백성들이 이 정도로 궁녀를 기피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경우에는 공노비(관노비) 중에서 궁녀를 충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궁녀가 되면 왕을 유혹해서 왕비가 될 기회가 생기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상당수의 궁녀는 평생토록 왕의 근처에 가지도 못했고, 어쩌다 왕의 관심을 끈다 해도 왕비나 후궁에 의해 목숨을 잃기 쉬웠다. 궁녀 신분으로 왕비가 된 장희빈은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을 수록한 역사학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따르면 고종의 눈길을 받은 궁녀가 다음 날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궁녀를 뽑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황제국은 자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목적으로 신하국에 공녀를 요청했다. 신하국은 자기 나라 궁궐에 들일 궁녀뿐만 아니라 황제국 궁궐에 들일 궁녀까지 뽑아야 했으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녀와 궁녀는 실상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궁궐 일꾼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똑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공'과 '궁'이 점 하나 차이인 것과 같았다. 여담이지만, 공녀의 '공'에는 점(ㅗ)이 위쪽에 찍혀 있고, 궁녀의 '궁'에는 아래쪽에 점(ㅜ)이 찍혀 있다. 고려시대 여인들을 포함해서 역대 한민족 여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공녀는 위쪽 즉 북쪽 궁궐로 가는 여인이고 궁녀는 그냥 이쪽 궁궐로 가는 여인이었다.
▲ 고려시대 여인의 모습 중 하나를 묘사한 연필 스케치. ⓒ 김종성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공녀를 확보하는 일은 궁녀를 확보하는 일보다 비용이 훨씬 더 높았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에 공녀는 국가 간의 무역거래를 통해서 매매됐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생구(生口) 매매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이것은 일종의 인신매매였다. 노예제나 노비제가 존재하던 시대에는 사람을 매매하는 행위가 당연한 일로 인식되었다. 생구란 표현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온조왕이 적진에서 사로잡은 노예들을 '생구'로 표현했다.
생구는 황제국과 신하국 사이에서 조공 물품으로 거래되었다. 조공무역은 신하국이 조공 물품을 바치면 황제국이 회사(回賜) 즉 답례 물품을 하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신하국만 일방적으로 바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의 조공무역은 이렇게 물물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주요 조공품목 중 하나가 바로 생구 즉 공녀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무역을 예로 들면, 조선이 제공한 주요 품목은 말·은·공녀 등이었고, 명나라가 제공한 주요 품목은 비단 등이었다.
드라마 <기황후>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고려시대에도 공녀는 대표적인 조공 품목이었다. 공녀가 유상으로 매매되었다는 점은, 고려 고종 18년 12월 23일(음력) 즉 1232년 1월 16일(양력)에 고려 조정에 도착한 몽골의 국서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사> '고종 세가'에 실린 이 국서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몽골 황제 오고데이칸(우구데이칸)은 "사신을 통해 고려왕에게 물건을 보내니 그것을 받으면 답례 물품을 보내라"고 하면서 남녀 인질 및 금·은·구슬·말·수달피 등과 함께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금·은·구슬 등과 함께 사람까지도 물건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경우에 황제국은 공녀를 확보하기 위해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모든 경우에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황제국은 신하국에 비용을 지급하고 공녀를 데려갔다. 그래서 자국 백성을 궁에 들일 때보다 신하국 백성을 궁에 들일 때가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드라마 <기황후> 제1회에서처럼 몽골 군인들이 공녀들에게 화살을 마구 쏘아대는 장면을 봤다면 몽골 황제는 아마 기겁했을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이는 공녀들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니 말이다. 공녀와 궁녀는 점 하나 차이였지만, 공녀는 유상 거래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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