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박격포 만들어라! '번개 사업' 아시나요?
[죽음의 거래를 멈춰라3] 한국의 방위산업의 일그러진 역사
2013 ADEX(무기전시회) 개최시기에 맞춰 <오마이뉴스>와 '평화군축박람회 준비위원회'는 무기산업이 초래하는 비윤리성과 인명살상, 군비경쟁의 문제점을 환기시키고 정부의 방위산업 육성 정책을 비판하고자 '죽음의 거래를 멈춰라' 칼럼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한국 무기산업의 역사, 해외의 무기전시회 대응 캠페인 사례, 무기전시회 평화적 관람팁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무기산업을 바라보는 평화적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지난 10월 29일 ADEX(무기전시회) 행사가 열리는 킨텍스에서 직접행동을 펼친 평화군축박람회 준비위원회 활동가들 모습이다. ⓒ 평화군축준비위원회
한국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군사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반세기만에 세계 최하위권에서 10위권으로 진입했다. 군수산업의 비약적 성장 때문이었다. '방위산업'이라는 고상한 다른 이름을 가진 군수산업은, 국가가 주도하면서도 국가를 유일한 구매자로 삼는 상품을 생산했고, 거액의 군사비로 완성품과 원료의 상당 부분을 보전함으로써 독점 기업들에게 높은 이윤을 확보해 주었다. 단언컨대, 군수산업이야말로 기업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한국 방위산업의 탄생
1965년 베트남전 참전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확보한 1억 달러와 1969년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의 철수 정책의 보상으로 받은 5억 달러를 기반으로 한국은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을 시도했다. 1970년에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했고 최초로 '병기개발 추진방안'을 발표하면서 일명 '번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6개 기본 병기(소총, 박격포, 지뢰 등)를 신속히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번개사업은 당시에 추진되고 있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중화학공업 전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는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의 병행 육성이라는 정책에 따라 이루어졌다. 병기 개발을 위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화를 선도하기 위한 계기로 활용했고, 방위산업 건설을 통해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을 동시에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 경공업의 기반조차 미약했던 산업 여건을 급속히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기에 상당히 역동적으로 추진되었지만,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함께 획득할 수 있었던 대기업은 정부의 특혜적 지원 덕분에 독점 재벌이 될 수 있었다.
당시에 육성하고자 했던 중화학공업은 기계공업, 자동차공업, 조선공업, 전기공업 등이었다. 이러한 공업들은 정권의 군사적 의지로 인해 방위산업과 융합되었다. 번개사업으로 1972년에 최초의 병기 개발이 이루어진 이후 양산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기반이 절실히 필요했다.
1974년 방위산업 건설을 위해 조성한 창원기계공업단지 등에서는 총포, 탄약, 통신 등 군수 물품을 생산하는 주요 기업들이 정부의 엄청난 특혜와 투자 지원 속에서 급속히 성장했다. 76년에는 한국방위산업진흥회가 설립되어 군과 방산업체를 연결하며 제반 애로사항을 협의 조정할 수 있도록 했고, 업체의 생산에 대해 보증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소요되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건설을 위해 국가는 수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토지 제공, 저리 융자, 면세, 보조금과 장려금 지원, 연구개발비 보상, 적정 이윤 보장, 방위사업체 지정, 병역특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기업의 방위산업 생산라인에 대한 특혜적 지원을 제도화했다. 이에 따라 방위산업체의 무기 생산력이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전력증강사업이었던 일명 '율곡사업' 등을 통해 기본 병기들을 양산할 수 있었고 군의 소요를 빠르게 충족시켰다. 1970년대 후반에는 미사일과 전차, 헬기, 구축함, 전투기 등도 일부 국산화하거나 조립 생산 혹은 공동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979년을 기점으로 소형 화기를 비롯한 기본 병기는 국내 수요를 거의 충족시키게 되고 유도무기 등 정밀무기뿐 아니라 핵무기 제조에도 나서려고 시도했다.
자주국방이라는 구호가 제창된 이래,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 병행 추진되면서 급속히 발전했고 10여 년만에 안보적 필요 이상으로 내수를 충족시켰으나 내수시장의 제한성 때문에 상업적 요구는 일정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위기의 탈출을 위해 해외시장의 개척으로 나아갔다. 1970년대에는 군복, 군화, 배낭, 텐트, 탄약 등 군수 물자 정도였지만 1980년대에 와서는 자주포, 박격포, 지뢰 등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때부터 군과 산업 간에 인적 연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한국 군부와 방산업체 혹은 재계와의 연결구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연결구조는 퇴역군인이 방산업체로 이전하는 관행을 만들었고 현역 방위산업 업무 담당 군인과 정치권과 방산업계 간의 공식적, 비공식적 결속으로 이어지게 했다.
방위산업의 위기
대기업들은 정부의 온갖 특혜와 지원 덕분에 방위산업 공장에 중복 투자하거나 과잉 투자하더라도 그 위험 부담을 스스로 질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방위산업 전문 대기업이라기보다 주요 부품을 해외에서 수입하여 단순 조립하거나 중개하는 업체로 전락하게 되었고, 한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부품과 소재를 개발해 오던 중소전문기업들의 몰락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방위산업의 과잉 투자, 중복 투자는 업체에게 자기자본 비율의 하락이라는 재무구조의 부실화 현상을 초래했다. 개별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재고는 누적되었고, 내수가 충족되어 시장이 포화되면서 공장 가동율은 50% 이하로 현저히 떨어졌다. 게다가 방위산업체의 방만한 재정 운용이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또한 중화학공업의 규모의 경제로 인한 재벌 위주의 독점적 체제가 확립되어 중소업체들의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켰다.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위기는 정부의 중화학공업-방위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재정적 지원 정책 때문이었다.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방만한 산업 구조를 개선하기보다 엉뚱한 방향을 선택했다. 국방 재정 운용은 전력 증강에만 집중되었고, 연구개발보다 미국 무기를 직구매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개발보다 수입에 치중했던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자신의 정당성을 미국으로부터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두환의 신군부의 출현으로 새로운 군·산·정 결속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국가전략산업들이 조정되고 정부와 업체와 군이 새로이 결탁되었다. 새로운 군인 출신이 방위산업 관련 정부 기관과 업체의 요직에 배치되고 의회에 진출했다.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인사가 마구 단행되고, 그에 따라 안보를 내세운 이권추구가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결속은 관료 사회에 만연한 무사안일주의와 결합되면서 비효율적 운용 구조를 더욱 확산시켰다. 무기체계 선정과 무기도입 과정에서 로비가 만연해졌고 무기 구매 단가가 턱없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그만큼 국민의 세금 부담이 커졌다. 국방 재정 확보를 위해 정부는 방위세, 방위성금, 국민투자기금 등을 조성해 국민에게 그 재정적 부담을 전가시켰다.
이 시기에 한국의 방위산업은 재래식 무기와 장비 대부분을 양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1980년대 방산업체들은 기본 화력 장비는 물론 유도탄이나 항공기를 조립 생산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해 있었다. 1988년의 경우 총포, 탄약, 함정, 물자, 통신 및 전자, 항공 및 유도, 기동 부문 등 7개 부문에서 71개 방산업체가 92개 공장에서 3만2천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구개발과 기술축적을 통해 헬기, 전투기(제공호), 함정, 탱크, 장갑차, 휴대용 전화, 전자전 장비 등을 양산할 수 있는 생산 설비를 갖출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방위산업 업체들은 경영난에 허덕였고 효율적인 생산체제를 여전히 구축하지 못하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해외 수출로 이를 타개하고 싶었으나 무기 생산품의 대부분은 미국의 면허도입 생산이거나 미국의 기술자료에 의해 생산된 것이어서 미국의 동의가 필요했다. 미국이 동의를 하더라도 미국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했다.
결국 이 시기 정부는 국내 무기생산 업체들이 생산의 전문화를 이루기보다 대규모의 외국의 무기체계를 조립하거나 중개하는 수입 대행업체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업체는 국방부의 무기 구매 계획을 미리 알아내는 로비에 더 집착하게 되었고 무기생산 대기업과 국방부 간의 유착관계는 더욱 은밀해졌다. 5, 6공화국의 대통령이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던 주요 공급원은 바로 무기체계 선정과 관계한 대기업 방산업체들이었다.
한국 방위산업의 가능성?
▲ 지난 10월 29일 ADEX(무기전시회) 행사가 열리는 킨텍스에서 직접행동을 펼친 평화군축박람회 준비위원회 활동가들 모습이다. ⓒ 평화군축박람회 준비위원회
1990년대 들어 냉전이 끝나면서 세계 군비지출은 급감했고 군수산업도 자연스레 축소되기 시작했다. 91년의 걸프전은 일시적으로 군수회사들에게 호황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때 사용된 첨단 무기의 핵심 부품들이 일본 제품이어서 군수산업이 새로운 방향으로 재편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군사기술들은 대부분 일본의 상업적 기술에 추월당했다. 과학기술 투자를 상업 부문에 집중시켰던 일본은 군사적 제약에도 최첨단 군사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기술이 상업기술을 선도하기보다 상업기술이 군사력에 더 많이 기여하는 추세도 생겨났다. 냉전 이후로 변화된 군수산업의 환경 속에서 생존 전략이 모색되고 국방 과학기술 정책과 민수 과학기술 정책이 긴밀히 연계되기 시작했다. 대학과 민간연구소와 기업연구소가 국방 연구개발을 함께 맡게 되고 민간에 투자가 확대되었다.
군수산업의 민수 연관 효과와 관련해 군수기술의 민수 이전이라는 스핀 오프(spin-off) 논리가 있다. 이 논리는 민간기업의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이 국방 연구 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상업용 제품들을 개발한다는 것으로 국방 부문이 민수 부문에 스핀 오프가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컴퓨터, 정보 통신, 특히 인터넷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군수의 민수로의 기술 이전이라는 스핀 오프는 과학기술 간의 복잡한 연관 관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일본의 상업적 기술이 군사기술의 핵심이 된 것처럼 다양한 형태의 기술 연동은 가능하며 민수/군수 양용의 첨단 과학기술도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고도의 첨단 기술일수록 특수한 독립적 기술이 되어 파급효과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국방 기술과 민간 기술 간의 융합 혹은 연동 효과는 계속 새로이 생겨날 수 있다. 첨단화, 자동화, 정보화 되고 있는 오늘날의 과학기술들은 군수와 민수를 넘나들며 상호 작용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군수산업의 새로운 활로이기도 하다.
한국도 1990년 이후 산업구조가 첨단화, 정보화, 자동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군수산업도 군 정보화, 자동화 시스템 구축으로 나아갔다. 각종 무기들은 첨단화되고 있고 정보체계와 통신체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학이나 민간연구소에 국방 관련 연구 위탁이 증대되었다. 재래식 기본 병기 분야는 소요가 감소해 가동율이 점점 떨어졌고 매출액도 줄어들었다. 한국의 군수산업이 새로운 경향을 따라가고 있지만 처음부터 국가 주도의 독점 재벌을 육성했던 구조에서 과연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한국의 모든 방산업체는 민간기업이지만 국가가 육성해 왔다. 중화학공업과 병행하며 이룩한 방위산업은 그래서 단기간에 괄목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곧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군수산업도 변화하며 계속 성장할 것인가? 대부분의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핵심 부품은 수입하고 있는 처지에서 달라질 수 있을까? 수출로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지만 무기 수출이 윤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타당성이 있을까? 그래서 과연 한국의 방위산업은 계속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질문들에 앞서 한국의 방위산업의 적정함은 어느 정도인지 그것부터 다시 따져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방위산업은 전쟁의 산업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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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선,《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청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