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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만에 처음, 내 그림을 우리 집 벽에 걸었다

등록|2013.11.04 12:09 수정|2013.11.05 14:00

소래포구계양미술협회전에 출품한 유화그림 /이 월성 ⓒ 이월성


내 나이 77살, 50년 전 27살 때부터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화가들을 환쟁이라고 부르며 천시해 왔다.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1930년 31, 32, 33, 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이인성·나혜석·이봉상·오지호·이마동씨와 같이 입선하신 한국초창기 서양화가이셨기에 그 뿌리를 찾아간 것이다.

당시 아버지 이준실(李俊實)씨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인천 월미도 일본군 화약고를 폭파하려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사악한 전기고문을 당하시다가 정신병 피해망상증으로 요절하셨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한 우리 아버지를 조선 최초의 화가 명단에서 제명해 버렸다. 일본인이 발행한 조선 미술사 사적에 오르지 못하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조선미술사를 번역해 마치 자신이 연구 발굴한 조선미술사인양 논문을 발표한 교수도 있었다. 이처럼 잘못 표기된 조선미술사(한국미술사)를 고쳐 보려고 한국미술사를 쓴 작가들을 찾아가 이준실(李俊實)씨가 조선 최초 서양화가이었음을 시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논문을 발표했던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정정하였어야 함에도 정정하지 못하고 죽고, 지금은 미대 교수들이 우리 아버지께서 조선 초창기 서양화가임을 인식하고 한국미술사를 고쳤다.

나는 어머니까지 2살 때 여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품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일찍 돌아가셔서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부터 신문 배달을 하고 혼자서 의식주를 해결하여야 했다. 대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고학 직업 전선에 앞장서야 했다. 27살에 결혼을 하고 생활안정이 되자 아버지 혈통을 이어 갈 생각에 서양화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열심히 그리고 또 그리기를 반복하여 나의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빨래판에 밀납으로 유화 그림을 그렸다. 워낙 제주도 없었지만, 지저분하게 그려서 미술전시회를 열면 우리 집사람과 두 딸들이 손사래를 치고 전시장에 와 보지도 않았다. 우리 집 벽에는 내 그림 한 장을 걸어 보지 못했다.

이렇게 집안 식구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거칠고 투박한 그림을 인천시전 초대작가로 한국미술 문화 대전에 초대작가상, 국제 미전에 초대작가상 (도쿄도 미술관)을 받고 인천 종합 예술관에서 열렸던 환갑 전에는 <조선일보> 문화란 톱을 장식하는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도 그림 한 점 팔지 못하고 작품비와 출품비만 계속 들어갔다. 내가 미술품을 그려서 집안사람을 기쁘게 해 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집 안 벽에 못을 박고 내 그림을 걸면 집사람이 "지긋지긋해"하며 그림을 떼어 집구석에 내려놨다.

내가 계양미술협회전에 미술품을 전시하려고 그림 한 점을 꺼내 놓고 액자를 보니 때가 묻어 있어 액자에 흰 유화 물감을 찍어 바르고, 소래포구 그림을 프레임에 끼어 놓고 계양미술협회 전시장에 걸었다.

오픈식 날 인천의 원로 화가로 내가 소개되었는데 집사람이 오픈식을 보고 와서는 내 그림을 "벽에 걸라"고 말했다. 50년 만에 처음 내 그림을, 내 손으로 우리 집 벽에 걸었다.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린 것 같았다. 집사람이 손을 잡아주니 눈물이 핑 돌았다.
덧붙이는 글 이월성 기자는 계양미술협회 전시작품에 <소래포구>를 전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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