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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에 아빠, 19살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고난 딛고 일어선 '은혜 받고, 은총 입고, 복 받은' 자매

등록|2013.11.10 11:57 수정|2013.11.10 12:03
#1

지난 10월 어느날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저는 밝고 명랑한 두 여자 분을 마주했습니다. 예약자의 이름은 박은총. 저는 두 분을 마주하자마자 누가 '은총'인지를 물었습니다.

"동생이 '은총'입니다."

두 사람은 자매였습니다.

-이 이름은 누가 지어셨나요?
"아빠가요."

-부모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었을 거라고 여겼어요. 딸을 낳고 소중한 생명을 얻은 기쁨이 얼마나 커셨으면 '은총'이라고 지었을까요. 은총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느꼈을 부모님의 행복이 고스란히 느껴져요. 언니의 이름은 뭐에요?"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이름도 마찬가지군요. 자녀를 얻고 이런 큰 복은 주신 것에 대한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담으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분을 은혜와 은총으로 여기며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을 부모님께 극진하게 효도를 하셔야겠어요.
"……."

-아버님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은혜)제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은총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오,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참 힘드셨겠군요. 어머님도 함께 모시고 오시지….
"어머님은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은총이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저는 제가 무심코 던진 질문에 되돌아온 답변을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몰라 당혹감으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갤러리와 뮤지엄은 비교적 일찍 문을 닫거든요. 꼭 보고 싶은 곳을 먼저보세요."

저는 서둘러 두 분을 집 밖으로 내 몰았습니다.

#2

두 분은 저녁을 먹고 너무 늦지 않는 시간에 모티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서재에 함께 앉았습니다.

저는 낮 시간에 제가 할퀸 생채기에 대해 단도직입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은혜씨가 가장이었던 셈이군요. 현재도?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임신 중이에요. 동생이 바쁜 프로젝트를 끝내서 저도 태교를 겸해서 함께 온 거에요. 구태여 따진다면 제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제가 가장이었고 현재는 은총이가 가장이지요."

-가족이 더 있습니까?
"아직 대학 재학 중인 남동생이 있어요. 오늘은 집에서 강아지를 돌보고 있어요. 동생의 이름은 은복이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집안의 항렬에 따라 돌림자를 살려 상현이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어머님이 계셨으니까 슬픔을 쉬 달래고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었겠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그 큰일을 감당하기에는 세 남매가 너무 어렸잖아요. 대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중학교 2학년으로서는….
"(은혜)당시에는 일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아무 정신없이 지나갔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제게서 세상에 대한 어떤 기대도, 의욕도 남김없이 사라져버렸어요. 그러니 학교 갈 기력이 없는 것은 물론,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어요. 저는 침대에서 누워있는 시간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채웠고 앉아 있는 시간에는 빵만 먹었어요. 무기력에 탄수화물 중독 상태에 빠진 겁니다. 욕망은 증발하고 몸의 밸런스는 깨지고……. 이 죽음의 늪에서 건져준 것은 은총이었어요. 저는 맏이로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은총이는 점점더 악발이가 되더라구요. 은총이가 저와 상현이의 엄마였어요."

-고등학교 3학년이면 수험생인데…. 일반가정에 수험생 한 명만 있어도 모든 가족이 그 수험생에게 생활리듬을 맞추는데 본인은 도리어 집안의 엄마 역할을 해냈군요?
"(은총)저는 당시 미국으로 유학간지 한 학기 정도 되었을 때에요. 미국의 이모댁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요. 급히 귀국해서 장례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습니다. 유학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학기만 다 채우고 1년 만에 귀국했어요. 귀국하고도 한국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미국과는 전혀 다른 교과내용이었으므로 돌아가도 한국 친구들의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을 거예요. 제가 독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귀국해보니 침대에만 누워있는 언니를 어떻게든 침대 밖으로 내몰아야했습니다. 마침내 학교에 다시 가도록 만들었어요. 그런데 동생이 막 사춘기라 정서가 불안했어요. 친구들가 밖으로만 돌던 어느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상현이가 크게 다쳤다고….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고 했는데, 더 이상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오토바이 사고가 아니면 그 정도 크게 다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악독한 누가가 되어 동생의 친구들을 두들겨 팼습니다. 눈에서 독기를 뿜는 누나를 상현이의 친구들이 무서워했어요. 그렇게 상현이의 사춘기는 지나갔습니다."

-도대체 상상이 되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네요.
"(은총)그런데 모두가 수습이 되었어요. 언니는 대학에 다시 적응했고 동생도 그 후로는 더 이상 나쁜 길로 가지 않았어요. 저는 한국의 고등학교에 복학하는 대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은혜씨는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서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해서 새가정을 꾸렸고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은총씨도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원하는 직장에 입사, 직장 초년생의 생활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은총․상현 남매는 현재 출가한 은혜씨집 옆동 아파트에서 이웃해 살고 있습니다.

"(은혜)주말에는 함께 식사를 해요. 동생들이 우리집으로 와서 한 밥상으로 먹으니 식사를 준비해주는 은총이 때문에 제가 도리어 편해요."

#3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서재에서 상면했습니다. 아침에 은혜와 은총을 보자 마치 제가 두 사람 가족의 일원인양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어젯밤 서로를 허심탄회하게 털어 논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카다르시스로 작용했던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동물이에요?"

▲ 발바닥이 평평하지 못해 바로 서기가 어려운 아기 코끼리 조각상 ⓒ 이안수


책상위에 놓인 동물나무조각을 보고 은총씨가 물었습니다.

"아기 코끼리에요. 마사이족이 직접 깎아 만든 것이지요. 3년 전에 마사이마라에 갔다가 마사이족 마을에서 산거에요. 이 녀석은 아직 아기라서 상아도 없고 잘 서지도 못해요. 평평한 바닥에 놓아도 흔들흔들하다가 겨우 서지요. 사실 이것은 조각을 하신 분이 발바닥을 평평하게 깎지 않은 실수 때문이에요. 하지만 걸음마를 뗀지 얼마되지 않은 코끼리가 뒤뚱뒤뚱하는 것은 당연하다 싶어서 오히려 잘 서지 못하는 이 코끼리를 골랐어요."

▲ 이 아기코끼리를 산, 케냐의 마사이족 부락의 흙으로 된 좌판 ⓒ 이안수


은총씨가 아기코끼리를 세우려고 애쓰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바로서기위해서는 안간힘이 필요한 이 코끼리가 좋아요. 콧잔등에 상처도 있고 눈은 하나밖에 없네요."

▲ 이 아기 코끼리는 짝발에다가 외문박이이며 콧잔등이에 상처까지 가졌다. ⓒ 이안수


우리는 이 미숙한 아기 코끼리를 함께 좋아하게 된 이유도 같았습니다.

서툴고 모자라는 것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아기 코끼리 한 마리씩을 간직하고 살지 않나 싶었습니다. 두 다리는 멀쩡하지만 항상 바르게 걸어가지 못할 때가 많고, 두 눈을 가졌으되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을 가졌지만 상처투성이의 마음이 내 안에 함께 살고 있기도 하니까요.

저는 이 용기 있는 두 자매들과 숨김없는 방황과 극복의 얘기들을 나누고 나서 하룻밤 사이에 제가 훌쩍 커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에게 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서로 등 기대면서, 혹은 손내밀어주면서 함께 걸어온 시간들이었지만 이제 두 가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카메라 앞에 두 사람을 세우자 은혜와 은총 자매는 다소곳한 예쁜 모습의 포즈대신 함께 두 팔 벌려 비행하는 갈매기의 모습으로 포즈를 바꾸었습니다.

작별을 하면서 은혜씨가 말했습니다.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자매가 이름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은혜 받고, 은총 입고, 복 받으면서……. 은복이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다음번에는 꼭 은복이와 함께 올게요."

#4

11월 초, 은혜 씨로부터 불쑥 메일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은혜입니다^^

선생님을 뵌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네요^^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와 아기는 매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은총이와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귀한 사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메일을 최근에 확인을 잘 못하다 이제야 열었습니다.
답신이 늦어져서 죄송해요^^;;

저는 헤이리에 다녀온 후 긍정에너지를 더욱 충전해서~
저녁마다 남편과 한강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는데요,
지난 달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자면...
2주일간 같은 시간대 같은 장소를 산책하면서
초승달이 보름달로 변해가는 과정을 눈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 "달이 차오른다"는 것을 목도하며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감동이 참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린 시절 과학시간에 분명 사진으로 보고 교과서를 통해 배웠을 테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뱃속의 아기가 꿈틀하고 움직일 때 마다 그 심장박동이 느껴질 때마다
생명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요즘, 같은 장소 같은 풍경도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결국, 모든 것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여 가치를 발견하는가 겠지요^^

선생님과 모티프원을 통해 경험한 헤이리 역시 이전에 제가 알던 헤이리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행복을 마음속에 품으며 건강한 출산을 준비하겠습니다.

선생님도 모티프원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치유와 쉼, 행복과 감사의 풍성한 에너지를 나누시며 따뜻한 겨울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박은혜 드림

저는 은혜씨의 반가운 메일을 읽고  청소년 가장으로 살아남아야했던 세 남매의 협력과 극복 그리고 조화의 행복을 다시 음미해봅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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