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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책'의 시대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서평] 어니스트 겔너의 <쟁기, 칼, 책>

등록|2013.11.13 13:58 수정|2013.11.13 13:58
"우리는 불가피학 인류 역사의 패턴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그 패턴을 사용하느냐 마느냐에 관해서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역사철학자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관점을 되도록 사실들과 일치시켜 명백하며 일관된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관점을 거의 무의식적이고 일관성 없이 사용하느냐일 뿐이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일종의 '상식'처럼 은연중에 제공되는 관념을 아무런 검증이나 비판 없이 사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셈이다."(<쟁기, 칼, 책> 10쪽)

▲ 책 <쟁기, 칼, 책> 표지 ⓒ 삼천리

인류 역사의 장구한 과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우리가 그것을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대답하는 저자에게 확신은 별로 없는 듯하다. 저자가 직접 제시해놓은 책 <쟁기, 칼, 책>의 목적부터가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가 제시한 이 책의 목적은 가장 뚜렷하고 어쩌면 조금은 과장된 윤곽선으로 인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저자는 '우리의 관점을 되도록 사실들과 일치시켜 명백하며 일관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연역적인 추론 방식을 쓴다. 연역추론은 대전제에서 소전제를 거쳐 결론에 이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대전제). 갑식이는 사람이다(소전제①). 을순이도 사람이다(소전제②). 갑식이와 을순이는 죽는다(결론)'와 같은 식이다. 소전제가 일종의 사례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소전제에 해당하는 사례들이 풍부하면 할수록 전제와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논리적인 타당성을 얻는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책에는 다양한 전제와, 이들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언뜻 혼란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다. 책을 읽어나가는 속도가 지지부진해진다면 이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명쾌한 하나의 논리만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더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분명히 나름대로 자신만의 일정한 흐름을 바탕으로 책을 서술한다. 저자는 식량 생산과 정치의 중앙집권화, 분업, 문자 생활, 과학, 지적인 해방 등이 일정한 역사적 순서로 나타난다고 전제한다. 인류 역사라는 연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등장인물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고, 그들이 나타나는 '순서'에 제약이 가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문화를 통해 전파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한 사회를 특징짓는 특유한 방식의 활동으로, 구성원들의 유전적 구조에 지배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인류가 속한 사회들은 그 모두가 다양한 행동 양식을 드러내지만, 모든 사회가 분명히 인류 '공동의' 유전적 유산, 곧 문화를 바탕에 둔다는 것이다. 저자가 자신의 논지를 펼치면서 여러 가지 문화적인 개념을 다채롭게 활용하는 배경이다.

인류 역사를 '단계'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나 방법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그중에서도 3단계론은 그 사례가 가장 다양하다. 그 역사도 제법 오래됐고, 그들 각각의 '3단계'가 설명하는 대상의 폭과 깊이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저자가 드는 3단계론의 사례 몇 가지를 보자.

중세 사상가 피오레의 요아킴은 성부·성자·성령의 시대를 가정했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 단계를 구분했다. 제임스 프레이저는 인류 역사를 주술의 시대·종교의 시대·과학의 시대로 나눴다. 마르크스는 잉여와 착취롤 몰랐던 시대·잉여와 착취가 뚜렷하게 존재하던 시대·잉여는 있으나 착취가 사라진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 칼 폴라니는 호혜주의 사회·재분배 사회·시장사회의 세 단계를 주장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인류 역사 발전의 3단계론을 펼쳐 보인다. 수렵채취 사회·농경 사회·산업사회의 3단계론이 그것이다. 이 3단계의 변화는 각 단계별로 '생산' '억압' '인식'이라는 인간 활동의 기본 기제를 갖는다. 책 제목에 들어가는 대상, '쟁기' '칼' '책'은 바로 이들 인간 활동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단어들이다.

저자는 인류 역사를 단계와 변화로 볼 때 유의할 점이 있다고 말한다. 역사가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앞선 단계가 나중 단계의 전제 조건이라고 해서 앞선 단계 다음에 반드시 뒤의 단계가 온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발전이 예정돼 있거나 예측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직선적인 역사관 또는 '역사는 발전하기 마련'과 같은 당위 명제적인 역사관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하는 말들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다음과 같은 거창한(?) 의문에 대한 지적인 해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인류 역사의 최초 단계에 있었던 우리의 원시인 조상들은 사회성을 중시하고 윤리적인 게으름을 즐긴 좌파였을까 아니면 효율성을 좋아하고 낭비를 싫어한 우파였을까. 헤겔은 이 책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역사 철학이라는 난해한 학문을 그 누구보다 뜨겁고 진지하게 사랑한 이였다. 헤겔은 그런 유의 거창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인류학자 우드번의-기자 주) 이 매력적인 부르주아 이론은 근검, 금욕 만족의 참을성 있는 연기라는 빅토리아 시대풍의 미덕을 산업혁명뿐 아니라 신석기혁명의 원동력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를 진보라는 위태로운 길로 나아가게 한 건 바로 신석기시대의 탐욕스러운 원시 부르주아였다는 것이다.

헤겔은 '한' 사람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여럿'이 자유로운 조건으로 진보하고, 마침내 '모두'가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세계사라고 정리했다. 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처음에는 모두가 여가를 누렸고 그뒤에는 일부만이 여가를 누렸으며, 마지막으로는 노동 윤리의 지배 아래 아무도 여가를 누리지 않게 되었다는 서술로 이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애초부터 만족의 지연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고, 그뒤에는 보상의 지연이 나타났으며, 마지막으로 노동 자체가 노동의 보상이 된 시대에 보상은 영원히 지연된다."(본문 39쪽)

'세계사'의 발전 경로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한 헤겔은 참 대단하다. 그런데 헤겔의 그 말을 이어받아 세계사를 정리하면서, 오늘날의 노동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 저자의 논평은 그보다 훨씬 놀랍고 공감이 간다. 일하는 것 자체가 그 일의 보상이 됐다! 비정규직과 상시 해고가 광범위하게 널리 퍼진 오늘날의 현실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지나온 역사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해서 앞으로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질지 자신 있게 예언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의 이런저런 역사가 인류에게 늘 교훈만을 주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든, 한 나라나 개인의 역사든 지난날을 성찰하면서 현재의 좌표를 확인하고 미래를 진지하게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 바람대로만 굴러가지는 않는 것 같다. 유신 독재의 망령은 1979년에 끝났다. 내 나이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로부터 34년이 지났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그 고색창연한 '유신'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이들이 많다. 오죽하면 어느 보수적인 목사가 유신 인물들이 앞에 나서 으스스하다고까지 말했을까.

이 서슬퍼런 '칼'의 시대를 지나 따뜻한 '책'의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쟁기'에만 목을 맬 수밖에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 새록새록 되새겨지는 찬 새벽이다.
덧붙이는 글 <쟁기, 칼, 책>(어니스트 겔너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3.10.18 | |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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