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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만난 초딩 친구들아, 내가 그렇게 예뻤니?

스마트폰 어플에서 만난 초등 동창들과 '만추'를 즐기다

등록|2013.11.14 18:23 수정|2013.11.14 18:23
"드르르륵~"
"무슨 소리야? 요새 저 소리 자주 나던데."

저녁을 먹다가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초등학교 밴드(공감대가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을 다지는 스마트폰 어플)에서 나는 소리야. 요새 초등학교 애들하고 밴드에서 수다 떠는 재미로 살거든."

한 달 전부터 수시로 핸드폰에서 알림 소리가 난다. 초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어느날 카톡이 왔다.

"초딩애들 보고 싶으면 초딩 밴드에 가입해~."

메시지를 보자마자 얼른 가입했다.

어느새 초등학교 교정이 된 스마트폰 어플

막상 밴드에 가보니 30년 동안 만나왔던 두어 명의 친구들을 빼고는 모두 모르는 아이들이다. 나는 서울에 살다가 6학년 2학기 때 잠시 경기도 오산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6개월 정도 다닌 학교인데 아무리 시골 학교이고 반이 세 개 밖에 없다고 해도 아이들 얼굴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가입을 했으니 아는 체는 하고 봐야 했다. 기억이 날듯 말듯한 친구가 있길래,

"어머나, 넌 그때 우리 옆반이었고 키도 크고 예뻤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전한 것 같다."
"헐~ 내 키는 그때 크고 안 컸나봐. 그대로야. 그래서 지금은 아주 작은 편이지. ㅠㅠ"
"그래? 키야 그렇다 치고 프로필 사진으로 보니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네. 여전히 예쁘다."
"고마워~."

공개적인 게시판에서 얘기 하다가 사적인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1대 1 대화창을 열고 대화를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다를 떨었는지 전철 타고 가다가 내릴 역을 여러 번 지나치기도 하고 밥 먹는 시간이 배로 걸리기도 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밴드의 멤버수가 늘기 시작했다. 3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 넘었는데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밴드'라는 온라인 어플은 어느새 초등학교 교정이 돼가고 있었다. 

밴드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한 달 쯤 지났을까? "번개산행을 공지 한다. 시간되는 친구들은 ㅇ월 ㅇ시 에 과천역 1번 출구에 모여 청계산에 가자"라는 글이 올라왔다. '마침 친구들 얼굴도 궁금했는데 잘됐구나' 하면서 냉큼 번개에 '참여한다'는 덧글을 달았다.

약속 장소에 나온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서 남자 친구 한 명과 여자 친구 한 명 모두 세 명 뿐이었다. 아무리 못 와도 대여섯 명은 될 줄 알았는데 세 명이라니, 조금 실망했지만 반가운 얼굴로 산행을 시작했다. 하필 나는 전날 밤늦게까지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졸립고 피곤하고 조금 걷다보니 다리에 힘까지 없다. 산은 야트막하고 가을의 정점이라 나뭇잎은 곱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올라가다가 아직 밴드에 가입하지 않은 한 친구가 생각나서 예전 핸드폰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라고 한다. 다시 핸드폰에 남아 있는 집전화로 전화를 걸었더니 받는다.

"여보세요? 거기 A집이죠? 친구 문세경이라고 합니다. A있나요?"
"네, 제가 A예요. 근데 누구시죠?"
"나야, 문세경. 기억하겠니? 우리 지금 초딩애들 B, C하고 산행하고 있어. B는 네가 첫사랑이라고 하는데 맞니?(웃음)"

옆에 있던 B는 씨익~ 하고 웃는다. 산행 도중 번갈아가며 전화 통화를 하고 낄낄거리며 웃고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었다. 남자 친구가 싸온 마약김밥, 미니족발, 막걸리, 여자 친구가 싸온 삶은 밤, 내가 싸간 총각김치. 어린 시절 소풍가서 까먹던 그 도시락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을 비켜가고 다시 만난 친구들과의 추억이 아련한 도시락 타임이었다.

산책길 가장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모닝 술'을

그렇게 초딩 친구들과의 첫 번째 번개 산행을 마무리 했다. 1주일 후, 또 다른 친구가 이번에는 "지리산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의 코스로 만추를 즐겨보자"는 번개를 쳤다. 지리산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고 한 번 가고 나니 두 번째는 거리가 먼 곳임에도 스스럼 없이 간다고 했다. 그동안 지리산은 이 핑계 저 핑계로 가지 못한 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번 산행은 오후 10시에 오산에서 출발하기로 한 야간 산행이고 함께 가기로 한 친구들은 네 명이다. 남자 셋, 여자는 나 하나. 나는 예전부터 야간 산행에 자주 다녀서 차에서 쪼그려 자고 아침부터 산행하는 게 무척 피곤한 일이라 웬만하면 피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힘들면 언제든지 기댈 수 있고 다리 아파 업어 달라고 하면 업어줄 친구들이 셋이나 된다. 과연 저 녀석들이 나를 업을 만한 체력이 될지 모르지만. 

지리산 성삼재 자락 주차장에 닿은 것은 오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고 주변은 띄엄띄엄 켜져 있는 가로등 몇 개가 전부다. 나는 피곤한 몸과 마음 때문인지 조금만 더 자고 아예 아침에 올라가면 어떻겠냐고 했다. 한 녀석이 단호히 안 된다며 날 놔두고 자기들끼리 올라간단다. 어쩔 수 없이 감기는 눈을 비비며 산행을 시작했다.

내가 평소에 가던 산악회는 웬만하면 기복이 많고 험한 산길을 가는데 오늘 코스는 생전 처음 밟는 포장도로이다. 행복하다 해야 하는지 아닌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산행이 아니라 산책이군' 힘들지 않은 코스로 가게되서 다행이긴 한데 아찔한 스릴이 없으니 긴장도 풀어지고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했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한 녀석이 "아까 오다가 편의점에 술 샀는데 그거나 먹고 갈까?" 한다. 나는 단번에 "오케이, 좋아!" 하며 산책길 가장자리에 철퍼덕 주저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 사위는 점점 밝아지고 시계를 보니 오전 6시를 넘고 있었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술 마신 적은 밤새 집회하고 아침에 해장술 먹는다고 마신 적과 팔팔했던 20대 말고는 없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왠지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과 노고단 바로 아래에서노고단 정상에 못가고 바로 아래에서 기념 촬영 ⓒ 문세경


드디어 노고단에 다다랐다. 노고단 정상은 하루에 다섯 번만 정해진 시간에 올라갈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로 밑 돌탑 쌓아놓은 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기념 촬영 후 노고단 대피소에 다시 내려가더니 한 녀석이 배낭에서 음식과 코펠, 버너 등을 주섬주섬 꺼낸다. 나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부시럭 부시럭 거리면서 식수대를 왔다갔다 하더니 세상에나 어느새 진수성찬을 차렸다.

물론 배낭을 짊어지고 온 녀석 혼자 한 것은 아니고 같이 온 두 녀석도 함께 차린 거다. 나는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 '마님'이 되었다. 그 기분을 누가 알까. 매일매일 식구들 밥상을 차리지만 정작 내 밥상은 생일날에나 한 번 받을까 말까 한데 산에서 이렇게 거창한 상차림과 함께 "너를 위해 준비했어"라는 멘트까지 날려주니 영화가 따로 없었다. 

친구가 싸온 양념 불고기친구가 옆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싸 온 양념 불고기 ⓒ 문세경


그래봤자 산에서 먹는 거니 김치찌개나 하나 끓이면 다행이고 밥 다 먹고 커피나 한 잔 먹으면 황송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친구 녀석은 불고기 양념까지 해서 싸 온 것이다.

"이거 마트에서 양념 해 놓은 거 사왔니?"
"아니, 옆집 아줌마한테 양념해 달라고 부탁해서 가져온 거야."

난 깜짝 놀랐다.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먹으려고 하지도 못하는 음식을 옆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만들어 온 그 정성에. "정말 대단하구나. 상호! 맛있게 잘 먹을게." 밥 다 먹고 나니 뜨거운 커피도 한 잔 내준다. 어찌나 행복하던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친구들은 추억에 취하고, 나는 눈물이 나네

돌아오는 길, 우리는 바로 서울로 오지 않고 남원에 들렀다. 다들 중년 나이라 그런지 술을 좋아한다. 맛집이라는 음식점을 스마트폰으로 찾아 돼지 갈비를 시켰다. 사내 녀석 셋에 끼어 무슨 얘기를 할까 하고 있는데 각자 살아 온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가만히 듣고 있는데 한 녀석이 말한다.

"난 세경이가 잘 기억 안 나는데 확실히 기억나는 건, 어느 날 옆 반에 엄청나게 예쁜 애가 전학을 왔다는 거야. 그래서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했던 적이 있어. 그 애가 세경인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 된 거야."

"내가 그때 그렇게 예뻤나? 쑥스럽구만. 자자~ 건배나 하자"며 술잔을 부딪혔다. 나에게 예쁘다고 말한 친구 녀석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십여 년 전부터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돕고 있다고 한다. 한 친구는 도배 일을 하면서 산을 즐기고 있었고, 한 친구는 디자인 공부를 해서 지금은 광고 사업을 한단다. 나는 사업도 아니고 돈 버는 일도 아닌 사회복지쪽 일을 한다고 하니 조금은 놀라는 눈치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아침을친구가 아침을 해줘서 먹고 있다. ⓒ 문세경


"앞으로 너희들은 돈 벌면 무조건 나한테 기부를 해라, 그 기부금은 반드시 내가 좋은 곳에 쓸 테니까."

한 녀석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세경이에게 기부 안 하면 어디다 기부 하겠어"라고 말하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술자리는 무르익어가고 친구들은 추억 얘기에 취해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 장난기 많았던 그 꼬마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희끗희끗 흰머리가 늘고 있는걸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2세들 걱정을 하고, 친구들을 보고 싶어 하고, 가난한 아이를 챙기려는 모습에서는 눈물이 났다.

만추여서 인지 남쪽 지방이어서 인지 나뭇잎 색깔은 더욱 선명하게 바래가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하늘에서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새벽부터 마신 술에 취해서 "얘들아, 나 좀 업어줘. 술에 취해서 더 이상 걷지 못 하겠어"라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느 녀석이 제일 먼저 달려올까를 궁금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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