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선진화법 개정, '핵주먹과 최루탄'이 돌아온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반발 목소리... "선진화법 폐기는 폭력국회로 돌아가는 것"
▲ 2010년 예산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그해 12월 7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 앞 대형 유리문이 민주당 보좌진들과 경위들의 몸싸움으로 파손되었다. ⓒ 유성호
[기사 대체 : 15일 오후 6시 53분]
# 장면 1.
▲ 2011년 11월 22일 한미FTA 비준안이 통과된 직후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 가루까지 뿌리며 강력하게 저지했던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왼쪽 아래)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 남소연
# 장면 2.
2011년 11월 22일 김선동 민주노동당(현 통합진보당) 의원이 본회의장 단상에 섰다.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본회의장은 단숨에 흰 가루로 뒤덮였다. 최루탄이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본회의장을 점거해 한·미 FTA 비준동의안 단독처리에 나서자 김 의원은 최루탄 뇌관을 당겨버렸다. 의원들은 코와 입을 막은 채 서둘러 본회의장을 빠져 나왔다. 한 의원이 소리쳤다.
"야! 이 테러리스트야!"
지난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99건의 법안을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처리했고, 연말마다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국회는 폭력으로 물들었고, '몸싸움' 국회는 해외 토픽에 실릴 정도로 국제적 망신을 당해야 했다. 급기야 혈투가 벌어지고,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극악한 상황에까지 몰렸다.
이에 여야는 지난해 5월, 국회법 제85조와 85조 2항, 85조 3항을 개정해 일명 '국회 선진화법'을 만들어 냈다. 쟁점 법안에 대해 국회 상임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재적 의원 3/5 이상의 동의 없이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는 것이 핵심 골자다. 지난해 4월, 당시 비대위원장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18대 국회에서 꼭 처리됐으면 한다"며 선진화법 처리를 독려했다. 민주당과 협상을 주도한 당시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법안 통과 직후 "더 이상 폭력적인 국회를 하지 말자는 새로운 국회를 여는 역사적 순간"이라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랬던 새누리당이, 선진화법을 손볼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야당이 선진화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국회 마비법'이 됐다"는 것이 개정 추진의 이유다.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는 법안 개정이 불가능할 시, 헌법소원 심판 청구 및 위헌법률 심판 청구 등 가능한 모든 방안을 동원한다는 방침이다. 이 같은 뜻이 관철된다면, 19대 국회에서 '핵주먹'과 '최루탄'이 부활할 가능성이 높다.
'선진화법' 처리 주도한 황우여 백기투항 "총사령관인 최경환에게 힘 모아야"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선진화법 개정에 열을 올리고 있다. 15일 그는 의원총회에서 "야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선진화법을 뒤에 숨기고 의사일정을 합의해 주지 않고 있다"며 "총알 없는 총을 들고 전투를 하는 심정으로 여야 협상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선진화법에 대해서 당 내에서도 이런 저런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야당이 막무가내로 정쟁의 도구로 선진화법를 휘두르는 것에 대해 지혜를 모아달라"며 선진화법 개정 움직임에 힘을 실어줄 것을 호소했다.
선진화법을 최전선에서 추진했던 황우여 대표도 백기를 들었다. 그는 "어려운 때에는 모든 의원이 한 마음으로 원내대표와 뜻을 같이 해야 한다"며 "이견이 있을 수 있고 협상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지만 협상의 총사령관인 원내대표께 힘을 모아주고 일체 모든 것을 같이 해달라"고 말했다. 사실상 선진화법 개정 움직임에 찬성을 뜻을 내비친 것이다. 본인이 추진한 법을 스스로 부정하는, 촌극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선진화법 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 소장파 의원 15명은 이날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원내지도부의 법 개정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들은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하는 것은 폭력 국회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국회는 국민께 쇠사슬·해머·최루탄·주먹 난동 등으로 기억돼 왔다"며 "이에 국회는 지난해 5월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음에도 여당은 '의안을 단독처리라도 해 국정운영을 해나가겠다'며 선진화법 헌법소원과 개정을 공언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소수당이 국회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면 다수결 원리와 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개정안을 이른 시일 내에 제출할 것"이라는 최 원내대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기자회견에는 남경필·정병국·김세연·이명수·홍일표·황영철·권은희·김동완·김상민·박인숙·이상일·이운룡·이이재·이재영·이종훈 의원 등 15명이 뜻을 모았다.
황영철 의원은 "의총에서 우리들의 취지를 의원 전체에 전달할 생각"이라며 "선진화법 개정 움직임, 헌법 소원 관련 문제들은 분명히 반대 입장을 천명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황 의원은 이날 오후 열린 의총 공개발언을 신청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발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선진화법을 둘러싸고 새누리당 내부의 갈등이 예고되는 지점이다.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 '선진화법 개정' 주장, 설득력 떨어져
▲ 새누리당 소장파 "국회선진화법 폐기는 폭력국회로 되돌아 가는것"새누리당 이재영,권은희, 김동완, 김세연, 박인숙, 황영철, 이종훈, 김상민 의원(사진 왼쪽부터)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 원내 지도부의 국회 선진화법 개정에 반대하며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하는 것은 폭력국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 유성호
당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한 데 모이지 않는 것은,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의 주장에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국회 선진화법은) 총선이 끝나고 5월에 만들었다, 그때는 레임덕 국회로 국회의원 절반 이상이 공천을 받지 못했거나 낙선했는데 이런 분들이 투표했다"며 "세밀하고 치밀하게 검토가 덜 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도 "국회선진화법이 작년 5월 2일 본회의 때 찬성 127, 반대 48, 기권 17명으로 통과됐다"며 "임기가 끝나는 18대 국회가 19대 운영의 틀을 강제로 규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18대 국회에 낙선한 사람들의 투표로 인해 19대 국회가 좌우됐다는 논리다.
그러나, 선진화법에 찬성표를 던진 127명 가운데에는 새누리당 의원 64명도 포함돼 있다. 64명 가운데 19대 국회 의원인 이들도 31명에 달한다.
더군다나 선진화법은 지난해 5월 비상대책위원장이던 박근혜 대통령의 찬성을 기반으로 친박계가 주도해서 만든 법이다. 4월 총선 공약으로도 내걸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지난해 4월 "18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다시 본회의를 소집해서 선진화법을 꼭 좀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월 국회 표결 당시 친박 핵심인 황우여 대표, 서병수·이학재·유승민 의원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이들은 당 내 중진 의원으로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더불어 새누리당은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에서 3/5 이상 동의가 없으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는 부분에 제동을 걸고 있다. 다수결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 새누리당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수결 원칙을 담은 헌법 49조는 '국회는 헌법 또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별한 규정이 있다면 규정을 따르도록 돼있는 것으로 선진화법에는 위헌 요소가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선진화법을 통과시키면서 정부는 이미 위헌 요소를 검토한 바 있다. 선진화법이 국회 통과 후 국무회의를 통과할 때, 김황식 국무총리는 "충분히 검토했고, 법률상 위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의결에 찬성했다.
야당 때문에 법안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19대 국회 개회 이후 1년 5개월 동안 총 632건의 법안이 통과됐다. 16대 국회에서 948건, 17대 국회에서 1915건의 법안이 통과된 바 있다. 정부여당이 중점적으로 추진 중인 경제 활성화 법안이 국회 계류 상태이긴 하지만 여야가 대화·협상을 통해 풀어나갈 수 있는 지점이고, 예산안 처리 역시 마찬가지다. 법안과 예산안 처리가 늦어질 수는 있지만, 연말마다 여당의 직권상정·날치기로 몸살을 앓았던 국회 보다는 발전된 모습이다.
게다가 정국이 꽉 막혀 있는 것은, 국가기관 대선 개입 등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진전된 모습을 보이면 민주당도 한 발 나아가 법안 및 예산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당 내부에서도 '국정마비'에 대한 책임을 야당에 떠넘기기 위해 무리하게 선진화법 개정을 들고나온 거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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