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지역의 문화재 중 넓은 공간에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만복사지를 찾았다. 여러 번 찾았으나 찾을 때마다 느낌은 역시 다르다.
사적 제349호 남원 만복사지는 왕정동에 위치해 있는데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고려 문종 때 지어진 절이다.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인 김시습의 '만복사 저포기'로 유명한 장소이다. 대략 내용은 노총각 양생이라는 사람이 일찍 부모를 잃고 결혼도 못한 채 만복사 동쪽에 홀로 살고 있었으나 부부의 정을 맺은 양생의 사랑과 부모 간의 이야기를 전개해간다는 내용이 전체 줄거리이다.
이 곳에는 발굴조사를 여러 번 하였으며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가 약 10m 정도 되는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과 불상대좌(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입구에 들어서면 특이한 석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석인상은 원래 남원시 왕정동 국도 24호선 도로 갓길에 머리 부분만 노출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매몰된 상태였다.
현재는 다 드러나 있는데 귀가 길며 안구가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얼굴을 약간 고개 쪽으로 돌리고 있어 부자연스런 부분이 있으나 이것이 또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당간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예전 모습을 미루어 보아 용도가 제대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오층석탑은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 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절터에 남아 위용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어 볼 만한 작품이다.
석조 대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다. 조각의 마멸은 심하나 일부 면에는 뚜렷하게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문양이 잘 남아 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 양식이 다소 보인다.
당간지주는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절터에 남은 석조물과 같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해 본다.
석조 여래입상은 보호각에 있는데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으나 현재는 없어진 상태이다. 광배는 굵은 선으로 구분되고 있다.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며 광배 뒷면에 선각으로 또 약사여래 조각이 새겨진 것이 볼 만하다.
절터는 넓고 석탑 부재와 석조물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네모난 돌에 구멍이 많이 있는 돌이 있다. 아직도 알지 못하는 무궁한 상상 속의 넓은 공간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게 되는 양생을 생각해 보며 다시 한 번 만복사 저포기를 읽어 보아야겠다.
남원에 가면 광한루만 들러보지 말고 남원에서 가장 큰 절이었던 만복사지도 둘러보길 바란다.
▲ 만복사지 전경만복사지는 넓은 면적에 여러문화재가 남아 있다. ⓒ 김환대
사적 제349호 남원 만복사지는 왕정동에 위치해 있는데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고려 문종 때 지어진 절이다.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인 김시습의 '만복사 저포기'로 유명한 장소이다. 대략 내용은 노총각 양생이라는 사람이 일찍 부모를 잃고 결혼도 못한 채 만복사 동쪽에 홀로 살고 있었으나 부부의 정을 맺은 양생의 사랑과 부모 간의 이야기를 전개해간다는 내용이 전체 줄거리이다.
▲ 만복사지만복사지는 고려시대 초기 사찰로 보인다. ⓒ 김환대
이 곳에는 발굴조사를 여러 번 하였으며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가 약 10m 정도 되는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과 불상대좌(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입구에 들어서면 특이한 석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석인상은 원래 남원시 왕정동 국도 24호선 도로 갓길에 머리 부분만 노출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매몰된 상태였다.
▲ 용도를 알수 없는 석인상추정만하지 정확한 용도를 모르는 석인상 ⓒ 김환대
▲ 만복사지 석인상만복사지 석인상 ⓒ 김환대
현재는 다 드러나 있는데 귀가 길며 안구가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얼굴을 약간 고개 쪽으로 돌리고 있어 부자연스런 부분이 있으나 이것이 또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당간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예전 모습을 미루어 보아 용도가 제대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 오층석탑오층석탑 ⓒ 김환대
오층석탑은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 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절터에 남아 위용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어 볼 만한 작품이다.
▲ 석조대좌석조대좌는 매우 큰 편이며 규모를 짐작게 한다. ⓒ 김환대
석조 대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다. 조각의 마멸은 심하나 일부 면에는 뚜렷하게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문양이 잘 남아 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 양식이 다소 보인다.
▲ 석조물 문양석조물 문양 ⓒ 김환대
당간지주는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절터에 남은 석조물과 같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해 본다.
▲ 당간지주당간지주는 다소 투박하다. ⓒ 김환대
석조 여래입상은 보호각에 있는데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으나 현재는 없어진 상태이다. 광배는 굵은 선으로 구분되고 있다.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 석조여래입상석조여래입상은 광배 뒷면에도 선각이 된 약사여래가 새겨져 있다. ⓒ 김환대
▲ 석조여래입상석조여래입상 ⓒ 김환대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며 광배 뒷면에 선각으로 또 약사여래 조각이 새겨진 것이 볼 만하다.
▲ 용도 미상의 석부재용도 미상의 석부재 ⓒ 김환대
절터는 넓고 석탑 부재와 석조물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네모난 돌에 구멍이 많이 있는 돌이 있다. 아직도 알지 못하는 무궁한 상상 속의 넓은 공간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게 되는 양생을 생각해 보며 다시 한 번 만복사 저포기를 읽어 보아야겠다.
남원에 가면 광한루만 들러보지 말고 남원에서 가장 큰 절이었던 만복사지도 둘러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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