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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복사지에서 저포놀이를 상상해본다

등록|2013.11.19 21:09 수정|2013.11.19 21:09
남원지역의 문화재 중 넓은 공간에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만복사지를 찾았다. 여러 번 찾았으나 찾을 때마다 느낌은 역시 다르다.

만복사지 전경만복사지는 넓은 면적에 여러문화재가 남아 있다. ⓒ 김환대


사적 제349호 남원 만복사지는 왕정동에 위치해 있는데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고려 문종 때 지어진 절이다.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인 김시습의 '만복사 저포기'로 유명한 장소이다. 대략 내용은 노총각 양생이라는 사람이 일찍 부모를 잃고 결혼도 못한 채 만복사 동쪽에 홀로 살고 있었으나 부부의 정을 맺은 양생의 사랑과 부모 간의 이야기를 전개해간다는 내용이 전체 줄거리이다.

만복사지만복사지는 고려시대 초기 사찰로 보인다. ⓒ 김환대


이 곳에는 발굴조사를 여러 번 하였으며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가 약 10m 정도 되는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과 불상대좌(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입구에 들어서면 특이한 석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석인상은 원래 남원시 왕정동 국도 24호선 도로 갓길에 머리 부분만 노출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매몰된 상태였다.

용도를 알수 없는 석인상추정만하지 정확한 용도를 모르는 석인상 ⓒ 김환대


만복사지 석인상만복사지 석인상 ⓒ 김환대


현재는 다 드러나 있는데 귀가 길며 안구가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얼굴을 약간 고개 쪽으로 돌리고 있어 부자연스런 부분이 있으나 이것이 또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당간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예전 모습을 미루어 보아 용도가 제대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오층석탑오층석탑 ⓒ 김환대


오층석탑은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 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절터에 남아 위용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어 볼 만한 작품이다.

석조대좌석조대좌는 매우 큰 편이며 규모를 짐작게 한다. ⓒ 김환대


석조 대좌는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다. 조각의 마멸은 심하나 일부 면에는 뚜렷하게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문양이 잘 남아 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 양식이 다소 보인다.

석조물 문양석조물 문양 ⓒ 김환대


당간지주는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절터에 남은 석조물과 같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해 본다.

당간지주당간지주는 다소 투박하다. ⓒ 김환대


석조 여래입상은 보호각에 있는데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으나 현재는 없어진 상태이다. 광배는 굵은 선으로 구분되고 있다.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석조여래입상석조여래입상은 광배 뒷면에도 선각이 된 약사여래가 새겨져 있다. ⓒ 김환대


석조여래입상석조여래입상 ⓒ 김환대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며 광배 뒷면에 선각으로 또 약사여래 조각이 새겨진 것이 볼 만하다.

용도 미상의 석부재용도 미상의 석부재 ⓒ 김환대


절터는 넓고 석탑 부재와 석조물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네모난 돌에 구멍이 많이 있는 돌이 있다. 아직도 알지 못하는 무궁한 상상 속의 넓은 공간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게 되는 양생을 생각해 보며 다시 한 번 만복사 저포기를 읽어 보아야겠다.

남원에 가면 광한루만 들러보지 말고 남원에서 가장 큰 절이었던 만복사지도 둘러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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